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신심명- 대의 요약 ,개요

장백산-1 2015. 4. 6. 00:46

 

 

 

 


신심명- 대의 요약 ,개요   信心銘  

2012/11/30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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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심명 요약

 

승찬스님은 혜가스님의 法第子로 중국 수나라 양제 대 2년 10월 5일, 서기 606년에 입적하셨다는 기록은

있으나 태어난 시기와 혜가대사와 만난 시기에 대한 기록은 없다. 「신심명」은 믿을 신(信), 마음 심(心),

새길 명(銘)인데 ‘믿음을 마음속에 새기는 글’이란 뜻이다. 큰 깨달음은 바로 마음을 믿는데 있다는 말인데,

이는 사언(四言) 二句


2) 신심명의 대의(大意)

 

「信心銘」에서는 一切 분쟁(分爭)에서 오는 苦痛은 相對的인 槪念, 卽 二分法的 思惟와 黑白 論理에

의해 비롯되는 것이다. 또 이러한 思惟는 중생의 本性이 아니라고 하여 철저히 그 對立的인 關係를

否定하고, 그 代身 不二와 中道 思想으로 서로 相對를 認定하고 세워주는 理致를 깨달아 對立을 和合

으로 바꿈으로서 對立에서 오는 고뇌(苦惱)를 消滅한다. 서로가 서로를 수용(受用)하고, 포용(包容)

함으로서 지도(至道)에 이르러 극락(極樂)을 얻게 하고자 함에 있다.

 

지도(至道)는 대도(大道), 중도(中道), 지복(至福), 극락(極樂) 등으로도 表現되는데 一切의 對立的인

思惟를 지양(止揚)함으로서 중생을 포용(包容)하여 究竟에 원융무애(圓融無碍)하게 하나가 되어 極樂을

즐기게 하고자 하는 가르침이다. 대립(對立)적인 마음은 하나의 공(空)에서 나온 것이니 對立이 인간의

마음의 根本이 아니라는 것을 認識시키고, 또 이 空은 大道의 체(體)로 모든 諸法의 不生不滅하는 本性

으로써 能히 일체 중생을 包容하여 圓融無碍하게 할 수 있는 지도(至道)이니 이 大道의 體인 空에 모든

것을 맡김으로서 지도(至道)에 이르러 極樂을 이루게 하라는 말씀이다.


3) 신심명의 개요(槪要)

 

「信心銘」은 게송 1)에서부터 相對的 黑白 논리나 二分法的인 思考를 否定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게송 1)에서 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 하여 擇하는 것이 아니면 버리는 二分法的인 思惟를 싫어하면

지도(至道)는 무난히 成就할 수 있을 것이라 하고, 게송 2)에서 但莫憎愛  洞然明白이라하여 역시

흑백(黑白) 논리나 二分法的인 思量 아니면 미움이라는 思惟를 막을 수만 있으면 至道는 洞然히 明白

해진다고 했다. 揀擇이나 憎愛등 양변(兩邊) 中 하나를 擇하고 다른 것은 버리려는 二分法的인 思惟의

예를 들면, ‘기독교를 믿으면 天國에 가고 안 믿으면 地獄에 간다.’고 하는 식으로 둘 중 하나를 擇하고

다른 것을 버리는 것보다 兩邊의 중도(中道)를 擇해 양쪽을 서로 살려가는 길이 至道로 가는 길이라는

말씀이다. 예를 들면 불교를 믿거나 믿지 않거나 상관하지 않고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극락에 가고,

악(惡)을 짓는 사람은 지옥에 간다와 같은 예이다. 그리고 양쪽을 서로 살려가려면, 한 쪽으로 치우치는

執着을 여의여야만 가능하고, 執着을 여의려면 貪嗔癡 三毒心을 여의여야하고, 탐진치를 여의려면

身口意 삼업(三業)을 淸淨히 해야 한다.

 

身口意 三業을 淸淨히 함으로서 게송 11) 지동귀지(止動歸止) 지갱미동(止更彌動)이 가능하게 된다.

卽, 모든 움직이는 煩惱를 消滅하고 고요한 지(止)에 돌아가게 되고, 지(止)에서 無分別智를 얻어 중생

救濟를 위한 菩薩行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또 지동귀지(止動歸止)가 됨으로서 게송 24) 一心不生

만법무구(萬法無咎), 25)의 무구무법(無咎無法) 불생불심(不生不心)이 가능하게 된다. 즉 一切 煩惱를

消滅하고 本來의 마음자리로 돌아가면 二分法的인 相對的인 思惟를 가진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니

萬法에 허물이 없다고 하였다. 原來 法에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二分法的인 思惟를 가진 마음을 내니

허물이 생긴다는 뜻이다.

 

이 흑백(黑白) 논리적인 사유를 하는 마음이 人間의 본성(本性)인가 아닌가를 게송 28)에서 밝히고 있다.

욕지양단(欲知兩段) 원시일공(元是一空)에서 양단(兩段)으로 가르는 二分法의 根源은 空이라고 하여

二分法的인 思惟가 人間의 本性이 아님을 설하고 있다. 卽 衆生의 本性은 공(空)이라고 했다. 그리고

게송 29)에서 일공동량(一空同兩) 제함만상(齊含萬象)이라하여 이분법(二分法)의 根源이 일공(一空)

임을 알게 되면 양변(兩邊)과 가지런히 和合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만상(萬象)과 가지런히 和合할 수

있다고 했다. 卽 二分法的인 思考가 人間의 마음의 根本 性稟이 아님이 認識되었으면, 공연히 對立을

일으키고 鬪爭할 理由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모든 生覺 妄想 分別心 槪念 觀念 알음알이 意識 등등이

本來 공(空)에서 비롯된 것임을 分明하고 確實하게 認識하고 서로 가지런히 품으라고 하는 것이다.

 


이 공(空)의 理致를 게송 31)에서 대도체관(大道體寬) 무이무난(無易無難)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空은 곧 大道의 체(體)이고  大道의 體인 空은 관대(寬大)하여 쉬운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

라고 한 것은 大道의 體인 空의 作用의 묘(妙)한 理致를 설한 것이다. 그 作用이 넓다 좁다, 작다 크다,

짧다 길다, 두텁다 얇다, 깊다 얕다, 강하다 약하다고 어떻게 二分法的으로 表現하더라도 말로서는

그 本質, 根源, 텅~빈바탕, 實體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나, 아무리 어렵고 쉬운 일이라 하더라도

大道의 체(體)인 空에 맡겨두면 그 空이 다 알아서 解決할 수 있는 能力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게송

35) 임성합도(任性合道) 소요절뇌(逍遙絶惱)이다.

 

그리고 또 大道의 체(體)인 空의 성(性)과 용(用)은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一切 萬法 어느 것에게나

普遍的으로 있는 것이니 일체중생을 尊重해야 한다고 했다. 즉 나에게 佛性이 있어 내가 부처가 될 수

있거나 부처라면 ‘나’외 다른 모든 중생도 똑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어 그들도 부처가 될 수 있거나

부처이니 나와 남의 인격을 二分法的으로 봐 남을 劣等하게 보거나 취급하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요,

그들도 나와 똑같은 佛性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대하면 정각(正覺)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게송 38)의 욕취일승(欲趣一乘) 물오육진(勿惡六塵)과 39) 육진불오(六塵不惡) 환동정각(還同正覺)이다.

 

理致가 이러하니 머리를 굴려서 짐작으로 黑白을 만들어 고민하지 말라는 것이 게송 44)의 일체이변

(一切二邊) 양유짐작(良由斟酌)이고, 또 肯定的으로 표현하여, 理致가 이러하니 ‘내’가 일체중생을

人格的으로 平等하게 對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고, 그 외의 二分法的인 思惟는 쉬게 하라는 말씀이

게송 55) 계심평등(契心平等) 소작구식(所作俱息)이다.

 

일체 중생을 平等하게 대할 수 있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이「신심명」에서 설하는 내편이 아니면

적(敵)이라는 黑白의 二分法的인 思惟, 공(空)의 原理, 人格 平等의 原理 등의 말씀에 대한 一切 疑心이

깨끗이 淨化되었을 때 바른 믿음을 세우게 되고, 그 바른 믿음으로서 일체중생과 調和를 곧게 세울 수

있다는 것을 게송 56)에서 호의정진(狐疑淨盡) 정신조직(正信調直)이라 하였다. 호의정진(狐疑淨盡)

정신조직(正信調直)이 이루어지면 마음은 텅~비어 공허(空虛)해지고 이 法界의 眞理가 저절로 밝게

비춰질 것이니 아무 것도 애쓸 일이 없게 될 것이라 하여 게송 58)에서 허명자조(虛明自照) 불노심력

(不勞心力)이라 했다.

 


그리고 허명자조(虛明自照)한 것은 生覺을 헤아리는 것으로는 알 수 없는 곳이고, 意識과 感情으로도

思量하기 어려운 곳이라 하여 게송 59)에서 비사량처(非思量處) 식정난측(識情難測)이라고 했다.

그리고 바로 虛明自照 이 자리가 眞如法界이고, 이 진여법계에는 ‘네’가 ‘나’를 欲望의 對相으로 보는

바도 없고, ‘내’가 ‘너’를 利用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는 곳이라 하여 게송 60)에서 진여법계(眞如法界)

무타무자(無他無自)라 하였다. 그리고 無他無自의 뜻을 재차 설명하기를 ‘너’와 ‘나’는 現象的으로 볼 때 

서로 다르고 相對的이고 對立的이지만, 本質的인 面에서는 서로 平等하고 같다. 즉 안 먹으면 배고프고,

병들면 아프고, 늙으면 죽는다는 사실도 같고,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는 變化의 連續이라는 것도 같고,

오온(五蘊)에 연(緣)이 있어 태어나서, 五蘊의 造化로 살다가, 五蘊의 緣이 다하면 죽는다는 사실도

같으니 ‘너’와 ‘나’는 서로 受容하고 포용(包容)하지 못할 理由가 아무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일체중생도

이와 같으니 包容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뜻에서 게송 62)에서 불이개동(不二皆同) 무불포용(無不包容)

이라 하여 불이문(不二門)을 열어 黑白 論理와 이분법(二分法)을 대치(代置)할 수 있는 비흑백(非黑白),

비이분법(非二分法) 法門을 했다.

 

게송 58)에서 허명자조(虛明自照)한 것은 게송 59)에서 비사량처(非思量處)이고 식정난측(識情難測)

하다고 한 것을 게송 64) 종비촉연(宗非促延) 일념만년(一念萬年)에서 시작해 65) 무재부재(無在不在)

시방목전(十方目前), 66) 극소동대(極小同大) 망절경계(忘絶境界), 67) 극대동소(極大同小) 불견변표

(不見邊表), 68) 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 69) 약불여차(若不如此) 필불수수(必不須守),

70)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 73) 언어도단(言語道斷) 비거래금(非去來今)이라 하여

대도(大道)의 비사량(非思量)한 具體的인 理致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상 예를 들은 비사량처(非思量處) 중 게송 68) 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에서 有無

불이(不二)와 중도(中道)로써 지복(至福)인 극락(極樂) 往生의 方便으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특히

有에서 無로, 無에서 有를 自在롭게 할 수 있음으로서 영적(靈的), 정신적(精神的), 물질적(物質的)

창조(創造)를 可能하게 할 수 있고 이들로부터 自由를 享有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허명자조(虛明自照)를 설명하는 가운데 나온 말씀이니 參禪修行의 目的이 바로 有卽是無

無卽是有) 卽 있는 것에서 없는 것을,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創造할 수 있는 能力을 배양하게

하는데 두고, 이 구(句)가 日常生活 전반의 향상을 위한 지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70) 一卽一切  一切卽一에서 일(一)은 全切를 의미하고 일체(一切)는 그 構成員의 합(合)을

의미하는 것이니, 일(一)이 한 국가의 통치권자라면 일체(一切)는 그 나라 국민이 되는 것이다. 일(一)

과 일체(一切)는 合이 될 수도 있지만 對立과 鬪爭關係도 될 수 있는 것이나  여기에서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말고 中道로써 즉(卽)을 삼아야 한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일(一)과 일체(一切)의 條件은

끝없이 變하는 것이니 中道도 力動的으로 變해가야 한다. 이는 이 地球上에서 가장 훌륭한 統治理念

이고 指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도 역시 훌륭한 지도자와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이 信心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참선수행이 필수가 되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리고 또 마지막 게송 73)에서 언어도단(言語道斷) 비거래금(非去來今)이라 하여 허명자조(虛明自照)한

경지(境地)의 신비성(神秘性)을 한 마디로 結論 맺고 있다. 이 境地를 體驗하지 못한 世上의 훌륭한 學者들

중에는 佛敎가 論理的이고 哲學的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종교가 아니라고 한다. 우리는

이런 학자들의 이런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은 自己의 根機만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內面世界 안에 허명자조(虛明自照)한 경지(境地)에서 體驗할 수 있는

언어도단(言語道斷) 비거래금(非去來今)의 신비성(神秘性)이 內在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설을 믿지

않고 人間 고타마 싯달타가 깨달은 ‘人間의 內面 世界’를 믿는 종교로서의 불교가 이 지구상에 3,000萬이

넘는 신도가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종교는 모두 폭력적이지만 이 지구상의 종교 중에 가장

비폭력적이고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가 불교인 것은 이「신심명」에서 밝히고 있는 黑白的인 對立과 갈등을

否定하고 불이법문(不二法門)을 그 이상(理想)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信)을 하되 맹신(盲信)에 치우치지 말고, 심(心)을 쓰되 虛妄한데 치우침이 없도록 하여

믿는 마음과 믿음의 對相을 불이(不二)로서 中道를 삼음으로서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고,

바른 믿음을 가져야만 이「信心銘」을 바르게 理解하고 行하여 大道를 成就하고 涅槃을 즐기게 하라고

하여 게송 72)에서 신심불이(信心不二) 불이신심(不二信心)을 설하여 發心하는 마음과 成佛하는 마음은

믿는 마음이 先行條件이면서 根本이 될 수 있는 理致를 설하고, 73) 言語道斷 非去來今으로 虛明自照를

再照明하고 「신심명」을 마쳤다.

 

 

[출처] 신심명-,대의 요약 ,개요 |작성자 모르니 어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