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진흙 있어야 연꽃도 피어나듯 번뇌망상 있기에 수행도 가능”

장백산-1 2015. 4. 7.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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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煩惱妄想(번뇌망상)
“진흙 있어야  연꽃도 피어나듯  번뇌망상 있기에 수행도 가능”
2014년 09월 05일 (금) 20:03:43혜국 스님 beopbo
  
▲ 중국 최초의 절 백마사 전경.


 

 

“지동무동(止動無動)이요 동지무지(動止無止)니,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나니.”


 
결코 쉬운 말이 아닙니다. 그침과 움직임, 밝음과 어두움, 옳고 그름, 이러한 말들을 우리는 相對性으로만 生覺합니다. 그러나 ‘信心銘’에서 말하는 이러한 世界는 양변(兩邊)을 否定하면서 肯定하여 원융무애(圓融無)하게 보고 있습니다. 바로 중도(中道)를 말하는 것이지요. 성철 큰스님께서 ‘신심명’을 강의하실 때 많이 강조하신 바로 그 내용입니다. 그치면서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면서 그치는 것은 쌍조(雙照)를 보이는 것이고, 움직임이 없고 그침이 없다고 하는 것은 쌍차(雙遮)로 막아 ‘없애버림’이라고 하셨습니다. 비추면서 고요하고 고요하면서 恒常 비추는 것이 中道法界의 理致이니 宇宙의 大眞理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쌍차쌍조(雙遮雙照), 차조동시(遮照同時)를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번뇌 망상은 결국은  내가 책임져야 할 일

   번뇌 망상을 사랑해보는  법도 한 가지 방법

‘사랑한다’는 의미는  둘이 아님을 아는 것

 

‘번뇌=보리’임을 確信해야
번뇌 망상은 투쟁하면  할수록 힘이 강해지기 마련
번뇌 망상과 싸우지 말고  그냥 화두만 참구하면 돼


그 뿐만이 아니라 정(定)과 혜(慧)도 그렇습니다. 정혜동시(定慧同時)거든요.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미 본래 의미를 그르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캄캄한 방에 전등불을 켜면 등불을 켜는 동작과 밝음은 동시(同時)입니다. 등불을 켜는 行爲가 있고난 뒤에 밝음이 오는 게 아니고 燈을 켜는 行爲 自體가 밝음과 하나이기 때문에 등불을 켜는 行爲와 밝음은 둘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게 다 그렇습니다. 종소리 또한 그렇습니다. 종을 치는 行爲와 소리는 同時입니다. 종을 치고 나서 한참 있다가 소리가 나는 게 아니고 종치는 行爲 自體가 소리와 둘이 아닌 이치와 같습니다. 정(靜)과 동(動), 움직임과 그침 모두가 그렇습니다. 움직인다는 말은 그침이 있었기에 움직임이니 그침에 卽한 움직임입니다. 고로 냉철하게 보면 움직임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침이란 움직임이 없다면 그침이 홀로 있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고로 그침이 없기에 움직임과 그침이 서로 원융자재(圓融自在)합니다. 고로 서로 相對가 아니기에 相對法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러한 世界를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나니”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보여주신 겁니다.
  

相對法이란 둘 가운데 하나가 없으면 相對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 어느 王이 壁에다가 기다란 線을 그어놓고 누구든지 이 線에 손을 대지 말고 짧게 해놓으라고 命令을 내렸답니다. 어느 누구도 標示된 線에 손을 대지 않고 짧게 할 수 있는 方法이 없어서 절절매는데, 그때 지나가던 한 賢者가 아무 말 없이 그어놓은 線 밑에 훨씬 더 기다란 線을 하나 그려놓고 가버렸다고 합니다. 當然히 本來 있던 線은 짧아졌지요. 모든 게 이와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없는데 네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크다 작다 역시 또한 그렇습니다. 比較할 수 있는 작은 게 있어야 큰 게 있을 수 있듯이 相對가 끊어지면 둘이 成立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生覺들이 모두 우리들의 妄念에서 나온 生覺일 뿐이지, 眞理의 世界에서 보면 결코 꿈꾸는 사람이 잠꼬대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을 ‘알음알이(識, 分別識, 妄想)’에 우리의 意識이 속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信心銘’에서 말하는 둘이니 하나니 하는 말은 그냥 記號的인 이름일 뿐입니다. 하나라고 하는 것도 우리들 生覺이요, 둘이라고 하는 것도 生覺에서 붙여놓은 이름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신심명’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內容은 둘이 아닌 불이법문(不二法門)입니다. 兩旣不成(양기불성) 一何有爾(일하유이)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거니   하나인들 어찌 있을건가.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가르침 卽, 相對가 끊어진 道理는 生覺이 끊어진 世界, 모양이 사라진 道理라는 것이지요. 하나니 둘이니 하는 모양 卽, 크다, 작다하는 世界가 本來 없는 平等의 世界를 보여주신 겁니다.

 

우리는 큰 아파트, 작은 아파트, 큰 자동차, 작은 자동차라고 分別하지만 큰 자동차 안에 虛空이나 작은 자동차 안에 虛空이나 그냥 한 虛空일 뿐입니다. 크다, 작다 나눌 수 있는 그런 虛空이 아니겠지요. 말길이 끊어진 寂滅의 世界를 말로 表現하려니 자칫 誤解를 하기가 쉽습니다. 그 誤解를 선문(禪門)에서는 ‘알음알이(識, 意識, 認識, 妄想, 分別識, 分別心, 槪念, 觀念, 名色)’이라고 합니다.

 

스승들은 ‘알음알이’를 일으키는 것을 가장 警戒하셨습니다. 說明해주기 위해 眞實 아닌 世界를 거짓으로 보여주신 일은 없습니다. 단 한사람이라도 오직 眞理를 깨닫게 하고자 ‘올인’할 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眞正한 慈悲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다, 나다 하는 一切의 槪念들은 우리들 生覺이 만들어낸 幻想의 世界입니다. 그 生覺이라는 것이 꿈꾸는 사람의 꿈과 같다면 그 생각은 꿈꿀 때만 있는 것이지 꿈을 깨고 나면 없는 世界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승들이 恒常 하시는 말씀이 둘이라고 하면 이미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니 꿈만 깨고 나면 둘이라는 世界가 이루어질 수가 없다, 그러니까 虛空에서는 둘이라고 하는 槪念 自體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虛空을 하나, 둘 하고 셀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 當然히 하나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다고 이렇게 간절하게 말씀하신 겁니다.
  

다음 구절은 “구경궁극(究竟窮極)하야 부존궤칙(不存軌則)이니”하고 이어집니다.

 

“구경(究竟)의 궁극(窮極)은 어떤 定해진 法則도 없음이요”라는 내용입니다. 내내 같은 내용인데 쌍차쌍조(雙遮雙照)하여 중도(中道)를 깨달으면 中道라고 할 그것마저도 超越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깨달은 분상에는 中道라고 할만한 그 무엇도 없다는 말입니다. 究竟이요 窮極은, 一切 말로 表現할 길이 없는 마음 길이 滅한 자리라서 어떤 이름(名)이나 모양(色)이 붙을 수 없는 텅~빈자리라는 말입니다. 그러하기에 達磨大師의 ‘모를 뿐(不識)’이라는 對答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닙니다.

 

양무제가 여러 가지 質問을 하다가 “그렇다면 내 앞에 있는 이는 누구입니까”하고 물으니 達磨大師는“모릅니다(不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모릅니다”하는 對答은 안다, 모른다의 모른다는 대답이 아닙니다. 참으로 眞理를 그대로 보여준 너무나도 當然한 도(道)의 世界를 보여준 答입니다. 안다는 것도 내 生覺 妄想 煩惱 알음알이 識 分別心에 속는 일이요, 모른다는 것도 내 生覺 妄想 煩惱 알음알이 識 分別心에 속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達磨大師의 모른다는 對答은 안다느니 모른다느니 하는 生覺 妄想 煩惱 알음알이 識 分別心의 監獄에서 벗어난 大自由를 보여준 큰 事件입니다. 다만 生覺 妄想 煩惱 알음알이 識 分別心의 감옥 속에 갇혀 사는 이들에게는 모른다는 말이 정말 모른다는 答으로 잘못 듣게 됩니다. “달마대사가 모르고 있구나”하고 이렇게 生覺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살아 움직이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떠한 一定한 法則도 없는 것이 바로 窮極이고 究竟입니다. 그러니 大自由가 되는 것이지요. 참새 다리는 짧으면 짧은 대로 그냥 좋고 학의 다리는 길어서 좋은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모양을 떠나서 보면 있는 그대로 完全한 平等이요, 差異가 없는 것입니다. 학의 다리와 참새 다리는 걸어 다니고 뛰어다니는 데는 그냥 에너지 作用일 뿐 크다 작다 하는 分別이 전혀 없습니다. 큰 것은 큰 대로 좋고 작은 것은 작은 대로 좋다는 말이 아니거든요. 그냥 平等하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얼마나 生覺의 놀음에 빠져서 差別相에 속고, 比較하는데 속으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平生을 生覺 妄想 번뇌 알음알이 識 意識의 장난에 속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世上 사람들은 남에게 속거나 사기를 당하면 所訟을 해서라도 기필코 바로잡으려고 온갖 努力을

다 합니다. 그러나 내가 내 스스로에게 속는 일, 卽 내 意識이 내 生覺 妄想 알음알이 業識의 놀음에  平生 속는 일은 그것이 속는 것인지 그 自體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 世上에 오셔서 가장 우리에게 强調하신 말씀 중 하나가 “바로 보라. 나는 누구인가?”, 緣起空性을

眞如空性을 올바로 보라고 한평생 八萬四千法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많은 法門 가운데 中心軸이 올바로 보는 법(法), 중도법문(中道法門)입니다. 그 중도(中道)의 내용을 가장 잘 함축시켜서 表現하고 보여준 內容이 바로 이 ‘信心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中道에 대한 바른 眼目이 없으면 ‘신심명’은 바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그런 바른 眼目이란 어떤 것인가, 부지런히 수행하여 直接 고요의 體驗을 해보셔야만 합니다. 죽 끓듯이 일어나던 生覺, 煩惱, 妄想, 分別心, 알음알이, 識이 그대로 고요가 되어버린 텅~빈 고요의 體驗을 해보시면 煩惱, 妄想, 生覺, 意識, 識, 알음알이, 分別心 自體가 텅~빈 공(空)한 자리라는 걸 바로 보게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煩惱, 妄想, 生覺, 意識, 識, 分別心,알음알이와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煩惱, 妄想과 鬪爭할수록 妄想 煩惱 生覺 알음알이는 힘이 强해집니다. 왜냐하면 煩惱, 妄想, 生覺, 意識, 識, 알음알이라는 에너지는 煩惱, 妄想, 生覺, 意識, 識, 알음알이라는 에너지를 糧食으로 먹고 살아가고, 성내는 氣運은 성내려는 氣運을 糧食으로 먹고 살아가고, 잠은 잠을 자려는 氣運을 먹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煩惱, 妄想, 生覺, 分別心, 意識, 識, 알음알이라는 氣運과 싸울게 아니라 그냥 지켜보면서 話頭만 참구하십시오. 煩惱, 妄想, 生覺, 分別心, 意識, 알음알이, 識이라는 氣運은 남이 나에게 떠맡긴 것도 아니고, 아니면 밖에 있다가 들어오는 것도 아닙니다.

 

煩惱, 妄想, 生覺, 意識, 알음알이, 識, 分別心, 觀念, 槪念등의 氣運은 내가 걸어온 내 발자국이며 내가 좋아서 내 潛在意識에 錄音해서 貯藏해 놓은 所重한 내 人生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煩惱 妄想 生覺 槪念 觀念 알음알이 識은 結局 내가 責任져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煩惱 妄想 生覺 알음알이 識 分別心 槪念 觀念을 사랑해보는 법도 한 가지 方法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둘이 아님을 아는 일입니다. 煩惱가 菩提임을 믿고 煩惱 妄想 生覺 識 알음알이 分別心이 있기에 修行도 可能하다고 生覺해 보십시오. 진흙이 없으면 연꽃은 피어날 수가 없습니다. 물론 本地風光 본분사(本分事) 입장에서 보면 부질없는 소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하기에 究竟의 窮極은 定해진 法則이 없다는 이러한 가르침이 참으로 貴한 가르침이요, 眞理라는 事實을 깊이 믿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究竟의 窮極은 虛空性인 까닭이며, 恒時 부동(不動)인 까닭이며, 如來藏 가운데는 生滅이 없는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1260호 / 2014년 9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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