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다시 읽는 신심명] 33. 대립과 다름의 차이

장백산-1 2015. 4. 7. 18:45

 

 


[김형효 교수의 다시 읽는 信心銘] 33.

 

대립과 다름의 차이  |불교강의(2)일반강의-2 
 

 

[다시 읽는 신심명] 33. 對立과 다름의 差異


다르다는 것은 相互 關係를 맺고 있기에 發生,

佛敎에서의 差異는 다름을 나타내는 記號일 뿐

 

우선 『신심명』의 글귀를 먼저 읽고 숙고해 보기로 하자.


이 종취는 짧거나 긴 것이 아니라, 一念이 萬年이요, 있거나 있지 않거나가 없어서 十方(宇宙)가 바로

눈앞이로다. 지극히 작은 것은 큰 것과 同居하여서 相對的인 境界 모두 끊어지고,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同居하여서 끝과 겉을 볼 수 없음이라.”

 

 

중생의 마음과 부처의 마음이 確然히 區分된다. 같은 마음인데, 衆生心에는 好·惡, 善·惡, 是·非, 主.客, 

陰.陽, 生.死, 去.來, 始.終, 美.醜, 順.逆, 智.愚 등등 마음이 둘로 分明히 갈라져서 그 갈라진 절벽의 폭과

골이 깊어서 對立의 葛藤이 메울 길이 없을 만큼 벌어진 상태이고, 佛心에는 마음이 둘로 나눠진 그 差異

가 다만 다름을 나타내는 記號에 불과한 것이다. 佛心으로 보면 흔히 모든 것이 다 같다는 素朴·單純한

生覺을 하기가 쉬우나,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이 다 同一하다면, 佛心은 差異를 지워버리는 結果를 빚는다.

그러나 事實 佛心에게 모든 것은 서로 다 다르다는 것이다. 다르기때문에 서로 相依相關性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승찬대사가 언급한 것처럼, ‘지극히 작은 것은 큰 것과 같고,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다

(極小同大, 極大同小)’라는 表現이 생긴다. 그러나 여기서는 ‘같다’라는 말을 ‘同居하다’라는 말로 옮겼다.

왜냐하면 ‘같다’라는 말이 너무 差異를 다 지우는 ‘同一化’로 여겨질까봐, ‘同居하다’라는 어휘로 바꿨다.

同居하는 사이에는 서로 對立的인 鬪爭의 關係가 애당초 成立하지 않고, 다만 다르기에 相依相關 關係가

맺어지는 聯關性이 發生한다. 그래서 同居는 差異의 相關性이 모순 없이 함께 共存하는 聯關性을 意味한다.

 

 

그러므로 ‘지극히 크다’라는 것과 ‘지극히 작다’라는 것은 서로 對立的 槪念이 아니고, 다만 그 둘의 差異를

알려주는 記號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크다라는 標識(표지)는 작다라는 記號와 對對法的인 相關性이

있기에 成立하지, 自己 홀로 成立하는 하나의 槪念的 單位가 아니다. 佛心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槪念이

아니고 差異를 나타내는 記號일 뿐이다.

 

 

그러므로 佛法을 槪念的 意味로 思考하면 제대로 理解가 되지 않는다. 佛法은 記號論的 構造를 지니고 있다.

槪念論은 서로 敵對的인 槪念 사이에 철벽 보다 더 두터운 城를 쌓고 있으나, 記號論은 모든 것 사이에 깃털

보다 더 가벼운 差異의 標示만 있고 그 差異의 標示는 이미 다른 것의 現前으로 서로간에 影響을 받고 있다.

이것이 바로 緣起法이고, 相互依存法이다. 무거운 것은 이미 가벼운 것에 依하여 同居하고, 긴 것은 이미 짧은

것에 依持하여 역시 同居하는 共存의 모습을 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긴 것 은 짧은 것이 없으면, 긴 것으로 成立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佛法은 길고 짧음, 높고 낮음,

삶과 죽음, 취하고 버림, 오고 감, 주.객, 선.악 등등을 各各 絶對視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相依相關的 差異로

엮어진 것으로 여기기에, 一念이 萬年과 서로 同居하여 相依相關的 差異로 묶여진다.

 

 

佛法은 絶對로 一念과 萬年의 差異를 無視하고 無條件 똑같다고 우기는 그런 바보스런 주장이 아니다.

있음과 없음을 똑같은 同一한 것이라고 말하는 어리석음도 아니다. 같다는 것(the same)은 同一한 것

(the identical)과 다르다. 同一한 것은 自己 同一性을 말하지만, 같다는 것은 다른 것과 差異가 나는

다른 것을 말하는 記號일 뿐이다. 그래서 같은 것은 다른 것의 다른 것에 지나지 않지, 다른 것과 전혀

無關한 自己 同一性을 指示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처럼 승찬대사가 말하는 佛法은 存在論的 思惟를 意味하지 어떤 實體論的인 存在者的 思考方式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佛法이 공(空)이나 무(無)를 말하므로 存在論的 思考方式과 전혀 그 궤도를 달리

하는 것으로 錯覺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 이제 그런 錯覺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1052호 [2010년 06월 15일 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