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괴로움을 소멸하는 오온명상

장백산-1 2015. 4. 16. 20:40

 

 

 

 

고를 소멸하는 오온명상 - 오온(9)|붓다수업 교리강좌

법상 | | 조회 125 |추천 2 | 2015.04.14. 20:30 http://cafe.daum.net/truenature/KKTo/47 

 

 

 

 

3. 五蘊의 생활 실천

 

大乘佛敎의 核心을 설한 경전인 [般若心經]에서는 五蘊無我五蘊皆空으로 설명하면서,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라고 부언하고 있다.

  受不異空 空不異受  受卽是空 空卽是受

  想不異空 空不異想  想卽是空 空卽是想

  行不異空 空不異行  行卽是空 空卽是行

  識不異空 空不異識  識卽是空 空卽是識

  

  色은 空과 다르지 않고 空은 色과 다르지 않으며, 色은 곧 空이고 空은 다시 곧 色이다,

  受는 空과 다르지 않고 空은 受와 다르지 않으며, 受는 곧 空이고 空은 다시 곧 受이다,

  想은 空과 다른지 않고 空은 想과 다르지 않으며, 想은 곧 空이고 空은 다시 곧 想이다,

  行은 空과 다르지 않고 空은 行과 다르지 않으며, 行은 곧 空이고 空은 다시 곧 行이다,

  識은 空과 다르지 않고 空은 識과 다르지 않으며, 識은 곧 空이고 空은 다시 곧 識이다.

 

色은 곧 空이며 無我다 實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色에 執着할 어떤 理由도 없다.

色卽是空을 알아서 우리는 色에 대한 모든 괴로움을 消滅시킬 수 있다. 五蘊이 모두 空하며

無我라는 事實을 살펴봄으로써 五蘊에 괴로워하던 마음들이 事實은 오온이 괴로워할 것이

아닌 不變하는 固定되고 獨立的인 實體가 없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色卽是空은

우리의 마음을  色에 대한 執着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그러나 여기에서 머물게 되면 자칫 無記空으로 빠지거나 虛無主義에 빠질 수도 있다.

모든 것은 空하고 無我라고 하니 이 世上은 다 필요 없고, 성공할 이유도 없으며, 열심히

잘 살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般若心經에서는 다시금 中道的 理解를 위해 色卽是空에서 머물지 않고 나아가

空卽是色을 설하고 있다. 色이 곧 空이지만, 空은 다시 色인 것이다. 이 世上에 생겨나는

모든 것들이 텅~비어 固定不變하는 獨立的인 實體가 없는 空한 世上이지만, 그러한 空한

가운데 아름다운 多樣性의 삶, 世上이 있다. 肉身이 텅~비어 空하다고 해서 이 肉身으로

世上, 삶, 現實을 살면서 대충대충 막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텅~비어 空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어떤 것도 다 이룰 수 있는 無限한 能力의 可能性을 활짝 꽃피울 수 있는 것이다.

 

五蘊無我와 緣起의 가르침, 五蘊皆空의 가르침은 이 世上 모든 것들이 텅~비어 空하여서 그 어떤

것도 固定되거나 實體的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리어 그 어떤 것으로도 다 만들어낼 수 있고,

이루어낼 수 있는 無限한 能力의 可能性의 場임을 逆說的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꿈 속에서도

堅固하게 固定된 實體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무엇이든지 마음먹은 대로 다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은가.

 

色卽是空이지만 同時에 空卽是色이기 때문에 空하고 텅~빈 이 世上,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 갈 수 있는

것이다. 五蘊이 텅~비고 空하여 無我이지만, 同時에 텅~비고 空하여 無我이기 때문에 이 세상, 삶에

드러난 自己 自身이라고 생각하는 五蘊이라는 虛空꽃을 아름답게 피워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나’라고 生覺하는 五蘊의 存在는 우리의 意識이 願하는 그 어떤 存在로도 피어날 수 있는

無限한 能力을 지닌 可能性의 波動하는 에너지情報場이다. 나라고 여기는 것이 五蘊皆空 五蘊無我로

構成되어졌다는 事實은 곧 五蘊皆空 五蘊無我로 旣存의 나를 새롭게 바꾸고 變化시키며, 깨닫게 만들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章에서는 色卽是空 空卽是色의 두 가지 中道的 觀點을 살펴봄으로써, 色卽是空의 實踐, ‘五蘊皆空으로

괴로움을 消滅하는 方法’을 살펴보고, 空卽是色의 實踐, ‘五蘊無我로 幸福 만드는 方法’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오온으로 괴로움 소멸하기(苦를 消滅하는 五蘊冥想)

 

나의 괴로움은 곧 五聚蘊(오온)의 괴로움

 

우리가 ‘나’라고 여기고 生覺하는 것은 五聚蘊이다. 色受想行識 五蘊이 쌓여 이루어진 因緣假合의

存在인 나라는 것을 우리가 쉽게 나라고 錯覺하기 때문에, 오온무아(五蘊無我), 五蘊皆空의 나를 

實體的인 ‘自我’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만약 五蘊이 나라면, 나의 괴로움은 五蘊의 괴로움이다.

내가 괴롭다고 할 때, 그것은 곧 五蘊이 괴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뒤에 四聖諦에서 工夫하겠지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하신 모든 說法은 窮極的으로 ‘괴로움과

괴로움의 消滅’에 관한 것이다. 人間에게 괴로움(苦)가 없다면, 부처님께서는 法을 說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法을 說한 理由는 人間의 괴로움의 問題를 解決하기 위한데 있다.

 

마찬가지로 이 五蘊皆空 五蘊無我의 가르침 또한 人間의 괴로움과 괴로움의 消滅에 도움을 주기 위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人間들이 ‘나’라고 여기고 生覺하는 存在가 固定不變하는 獨立的인 實體가

있는 줄 錯覺하고 나에 執着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모든 괴로움이 생겨났고, 그 ‘나’가 事實은 텅~비어

空한 다섯 가지 要素, 五蘊皆空의 무더기 모임에 불과하고 그 다섯 가지 모임 또한 모두 텅~비어 空한

것이라면 그 텅~빈 다섯 가지의 모임인 ‘나’라는 것 또한 텅~비어 固定不變하는 獨立的인 實體가 없는

空한 것이다. 텅~비어 固定不變하는 獨立的인 實體가 없는 空한 存在인 ‘나’에게 執着할 理由도 없고,

괴로워 할 理由도 없다. 괴로워하는 ‘괴로운 나’가 事實 없다면, 괴로움이 붙을 곳이 없지 않은가.

 

괴로움을 消滅하려면 괴로움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出發이 어디인지, 무엇 때문에

마음이 괴로운 것인지 그 原因을 알아야 한다. 괴롭기는 한데 도대체 누가 괴로운지도 모르고, 왜 괴로운

지도 모르며, 그 괴로움의 原因도 모르고, 그 괴로움이 어디에서부터 始作되었는지를 모른다면 어떻게

괴로움을 解決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괴롭다는 것은 곧 五蘊이 괴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五蘊은 말 그대로 다섯 가지의 쌓임이다.

그렇다면 ‘내가 괴롭다’고 할 때, 그 괴롭다는 것은 곧 五蘊 中에 어떤 要素가 괴롭다는 말이다. 卽, 人間이

괴로워 할 때는 五蘊 중의 하나가 괴로워하기 때문에 괴롭워하는 것이다. 물론 五蘊의 두세 가지의 要素가

합쳐져서 괴로울 수도 있고, 다섯 가지 要素 모두가 總體的으로 다 괴로울 수도 있다.

 

 

고(苦), 五蘊으로 解體하여 思惟하기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괴로울 때 그저 막연하게 ‘괴롭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그 괴로움이 五蘊의

어떤 要素에서부터 始作되었는지, 五蘊의 어떤 要素가 괴로워 하는 것인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괴로움을 쪼개고 分解하여 살펴봄으로써 괴로움의 原因을 分明하게 確認할 수 있고, 그냥 막연하게만

괴롭다고 生覺했던 것이 構體的으로 五蘊의 어떤 要素 때문에 괴로웠는지가 鮮明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色受想行識(五蘊) 다섯 가지 要消 중에 어떤 要素가 괴롭다는 結論이 나면, 그 괴로움을

解決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色受想行識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五蘊無我, 五蘊皆空이기 때문이다.

色蘊이 괴롭다는 事實을 알았는데 思惟해보면 色蘊은 實體가 없는 텅~빈 空, 無我다. 受蘊이 느낌으로

感情的으로 상처받아 괴로웠는데 思惟해보니 受蘊은 無我이며 텅~비어 空한 實體가 없다. 그 感情에

사로잡혀 싫은 그 느낌이 느껴질 때마다 괴로움을 받았었지만, 그 괴로운 느낌 感情을 가만히 思惟해

보니 그 느낌 감정은 固定不變하는 獨立된 實體가 아닌 텅~비어 空한 無我이고, 더욱이 그 感情이

나라는 것도 아닌 것이 분명해진다면, 感情的인 苦痛에서 벗어나기가 훨씬 쉬워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저 괴로움을 뭉뚱그려 막연하게 ‘나는 괴롭다’라고 生覺했던 마음을, 五蘊皆空, 五蘊無我의

洞察을 通해 다섯 要素로 解體해서 살펴보고, 五蘊의 各各의 要素도 텅~비어 固定不變하는 獨立的인

實體가 없어 空하다는 事實을 思惟하여 깨닫게 된다면  그 깨달음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五蘊無我, 五蘊皆空의 가르침을 깨달아서 막연하게 알던 괴로움을 다섯 要素로 나누어

思惟해 봄으로써 보다 構體的이고도 實質的으로 괴로움(苦)를 解決할 수 있는 智慧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構體的으로 色蘊의 괴로움, 受蘊의 괴로움 등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그것들을

어떻게 解體하여 思惟해 볼 수 있는지, 또 各各의 蘊으로 因해 마음이 괴로울 때 그 괴로움이 固定不變

하는 獨立的인 實體가 없는 非實體性 텅~빈 空이며 無我임을 洞察함으로써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하나 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色蘊의 괴로움

 

먼저 ‘色蘊의 괴로움’이 있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 맞았거나, 육체적인 고된 노동을 하거나, 몸에 상처가

나게 되었다면 色蘊의 要素가 괴로운 것이다. 五蘊 가운데 色蘊, 卽, 肉體的인 要素가 괴로운 것이다.

色蘊의 괴로움이야말로 가장 原初的인 괴로움이다. 맞아서 괴롭거나, 상처 나서 괴롭거나, 잠을 못 자

괴롭거나, 힘든 일로 괴롭거나 하는 등의 肉身의 몸이 괴로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色蘊의 괴로움, 卽 肉體的인 괴로움은 實體的인 것일까? 肉體가 괴로운 것은 절대적인 괴로움인가?

그렇지 않다. 예를 들면 축구선수가 축구시합을 할 때, 우리 팀이 이기고 있고, 그것도 내가 한 골 넣었다면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는 분명 몸은 괴롭고 힘들고 지칠 것이다. 肉體的으로는 힘들겠

지만 그렇다고 마음까지 괴로운 것은 아니다. 卽, 肉體的으로 힘들고 괴롭다는 것이 곧 實體的인 괴로움은

아니다. 肉體的으로 괴롭고 힘들더라도, 마음은 괴로울 수도 있고, 괴롭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결론으로

肉體的으로는 분명 힘든 상태이지만, 그로 인해 마음까지 괴로울지 말지는 내 스스로 選擇할 수 있는 것이다.

 

山 길을 무거운 짊을 짊어지고 며칠이고 계속해서 걷는다는 것 自體는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中立的인

狀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中立的으로 山 길을 걷는 肉體的 行爲가 어떤 경우에는 괴로움도 되고, 어떤

경우에는 즐거움도 된다. 스스로 選擇해서 히말라야 트레킹이나 지리산 종주를 한다면 이는 肉體的인

苦痛에도 불구하고 幸福한 山行이 되지만, 하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산악행군을 하거나, 마지못해 산 길을

걸어야 한다면 이는 肉體的 心理的으로 더없이 괴로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똑같이 軍服務 중에 行軍을 할지라도 스스로 肯定的인 마음으로 행군에 임하거나, 혹은 부대

전체적으로 파이팅이 넘치는 가운데, 훌륭한 리더십의 지휘관을 중심으로 단합하여 행군을 하게 된다면,

혹은 행군 끝에 있을 달콤한 휴가증이나 포상으로 인해 동기부여가 되어 열심히 임하게 된다면, 같은 군

생활 중의 행군이라 할지라도 괴롭지 않게, 혹은 다소 힘들겠지만 成就感을 가지고 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절에서 철야정진을 하며 3,000배를 할 때 보면, 많은 신도님들은 肉體的으로 고된 강행군의 절수행을

하지만, 그래서 몸은 힘들고 피곤하지만 그렇다고 마음까지 괴로운 것은 아니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행복하다. 3,000배를 끝낼 때의 그 기쁨과 성취감과 뿌듯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행복감이다.

 

直接的으로 肉體에 痛症이 느껴질 때도 마찬가지다.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께서 전교 석차가 떨어진 숫자

만큼 손바닥을 때리겠다고 공언하신 적이 있었다. 한 번 맞아 본 나로서는 얼마나 아픈지를 생생하게 기억

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움에 떨며 성적 발표날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은 그야말로 지옥 같았다.

그런데 성적 발표 날, 담임선생님께서 개인적으로 매우 기쁜 일이 있으셔서 하루 종일 싱글벙글이셨고,

결국 매의 양이 절반으로 떨어지고 체벌 강도도 약해졌다. 손바닥을 맞긴 맞았지만 얼마나 행복하고

기뻤는지 모른다. 맞으면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맞으면서 기뻤다! 生覺했던 것 보다 약하고 적어졌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맞는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언제나 괴로운 것은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이 色蘊의 괴로움은 結定論的이거나, 實體的인 것은 아니다. 몸의 괴로움이 實體的인 것이라면,

몸이 힘들고 괴로울 때 마음도 언제나 함께 힘들고 괴로워야 할 것이지만, 이와 같이 몸이 힘들더라도

마음은 괴롭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色蘊無我, 色蘊空이기 때문에, 色蘊의 괴로움 또한 텅~비어 空한

非實體적인 無我이며, 固定된 不變하는 獨立的인 實體가 아니다.

 

아무리 몸이 피곤하고 힘들고 괴로운 狀況일지라도, 우리는 몸의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다.

肉身의 괴로움은 實體的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色蘊, 卽 이 肉體가 곧 ‘나’라고 한다면,

肉體가 괴로울 때 ‘나’도 괴로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肉體는 ‘나’가 아니기 때문에,

肉體가 괴롭더라도 나는 괴롭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肉體를 ‘나’라고 여기고 生覺한다. 그렇기에 肉體가 '나'라는 固定된 觀念 안에 갇힌

制限되고 限定된 存在로써의 ‘나’라는 槪念, 妄想, 煩惱, 分別心에 사로잡혀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肉體가 나라는 것은 아니라는 생생한 事實을 깨달은 애런 롤스턴(Aron Ralston)의 실화가 있다.

 

롤스턴은 깊은 계곡에서 혼자 등반을 하다가 굴러 떨어진 큰 바위 덩어리가 오른팔을 짓누르는 事故를

당했다. 피범벅이 된 손을 아무리 빼내려 해도 빠지지 않았고, 바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손을

빼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다 닷새가 지났지만 꼼짝없이 죽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야말로

점점 죽어가고 있었다. 스스로 이제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가지고 있던 비디오카메라에 유언을

남기며 모든 것을 체념했다. 그런데 죽음을 받아들이고 났더니 恐怖心이 사라지고 오히려 平和가 찾아왔다.

肉身에 대한 모든 執着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팔이 나’라고 生覺할 때는 팔이 바위에 깔려 꼼짝 못하고

죽게 될 때 ‘나’도 꼼짝 없이 죽게 된다고 生覺했지만, 肉身의 執着을 버리고 났더니 팔이 나인 것은 아니며,

‘나는 팔 이상의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 때 비로소 팔을 잘라낼 勇氣가 생겼다. 이미 시퍼렇게 죽한

팔은 잘라내도 아프지 않았다. 한 시간에 걸쳐 팔을 자르면서도 오히려 팔을 자르는게 幸福했다고 말한다.

이 팔만 잘라내면 죽지 않고 다시 세상으로 내려갈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롤스턴은 이 事件을 통해 ‘肉身이 곧 나’인 것은 아니며, 나는 肉身 그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色蘊은 나가 아니다. 이처럼 物質的인 肉體는 나가 아니지만, 平常時에 人間은 이 肉身을 이루는 팔, 다리

등을 ‘나’라고 여기고 生覺하며 산다. 롤스턴 또한 닷새 동안이나, 팔을 자르고 自由人이 될 生覺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고 生覺했다. 팔이 곧 나라고 生覺하니, 팔이 바위에 눌려 죽어가는 것을 곧

내가 죽게 되는 것으로 錯覺한 것이다. 그러나 팔이 곧 내가 아니라는, 卽 色蘊은 無我, 空이라는 단순한

事實을 自覺함으로써 팔을 잘라내고 죽지 않는 길을 選擇할 수 있었다. 죽을 때까지 ‘팔이 나’라는 生覺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롤스턴은 아마도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色蘊은 無我, 空이다. 色蘊은 절대로 내가 아니다. 人間은 色蘊 그 以上의 無限한 能力의 可能性의 存在다.

色蘊이 아프고 지치고 피곤하고 괴롭고 썩어 없어지는 瞬間조차, 人間은 幸福해 질 수 있다. 롤스턴도 팔을

자르면서도 幸福했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처럼 人間은 色蘊(肉身)이 괴로워 할 때, 어쩔 수 없이 肉身과 함께 괴로워해야 하는 存在가 아니다.

色蘊의 괴로움은 텅~비어 固定不變하는 獨立的인 實體가 아닌 無我이고 空이기 때문에, 人間은 肉體的인

괴로움을 뛰어넘어 있는 그 이상의 더 큰 存在인 것이다. 色蘊의 괴로움이 텅~비어 非實體的이며 空하다는

事實을 깨닫는 瞬間, 人間이 物質的인 肉身 그 以上의 存在라는 事實을 깨닫는 瞬間, ‘肉體가 바로 나’라고

自己 同一視하는 錯覺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色蘊을 나와 同一視하는 錯覺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人間은 肉體的인 괴로움, 卽 色蘊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붓다수업] 중에서

 


붓다 수업

저자
법상 지음
출판사
민족사 | 2013-12-13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지금은 붓다 시대. 웰빙, 힐링, 뉴에이지, 영성, 치유, 명상...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