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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의 法性偈 강의 제9강<끝>

장백산-1 2015. 4. 17. 03:03

 

 

 


법상스님의 法性偈 강의 제9강<끝>|영상법문 녹취록
 

무위행 | 2015.04.16. 17:59 http://cafe.daum.net/truenature/N0Zv/254   
 

 

  
1.

오늘 이제 그 法界圖, 法性偈 마지막 강의를 이제 오늘 하도록 하겠습니다.

 

시고행자환본제 是故行者還本際   파식망상필부득 叵息妄想必不得 

무연선교착여의 無緣善巧捉如意   귀가수분득자량 歸家隨分得資糧  


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는 고로 ‘行자還本際’, 수행자가 本際로 되돌아가면

이게 뭐 ‘本際’ 이러면 ‘본래자리’, ‘본래성품’, ‘우리가 本來 처음부터 나왔던 그 자리’

뭐 이게 ‘際’ 자가 이렇게 사이 ‘際’ 이러는데 어~ 어찌 보면 그 두 개 중간 정도 이 말인데

中道의 자리, 本來의 자리,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行者, 修行者가 本來의 자리로 되돌아간단 말이죠.

되돌아가면 ‘叵息妄想必不得’ 이 우리가 이렇게 修行을 하고 工夫하는 理由는

本來 나온 자리, 本際로 되돌아가기 위한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왜 本來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와 있느냐?

그 理由는 바로 妄想 煩惱 分別心 때문이라고 그랬습니다.

妄想 煩惱 分別을 일으킴으로서 本來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런데 本來의 자리로 되돌아가려면, 修行者가 本來의 자리로 돌아가려면 ‘파식망상필부득’이다.

妄想 分別 煩惱를 쉬지 않고서는 本來의 자리, 本際로 돌아가는 그게 가능하지가 않다. 얻을 수가 없다.

그니까 다시 말하면 이 妄想 分別 煩惱 生覺을 쉬었을 때만이

本來자리로 完全하게 수행자가 되돌아 갈 수가 있다. 그런 이야깁니다.

 

그러니까 뭐 누차, 누차 끊임없이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괴로움은 괴로움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내가 괴롭다라고 生覺하고 있는 그 괴로움  또한 事實은

괴로움이라고 生覺하는 나의 解釋 判斷일 뿐이지 實際 그것 生覺 自體가 괴로움인 것은 아니다.

絶對的인 괴로움의 狀況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죠. 그 상황에 대한 나의 解釋만이 언제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이제 내가 이건 괴롭고 저건 즐겁고 이렇게 하면 좋고 저렇게 하면 싫고

이렇게 하면 좋겠고 저렇게 하면 싫고 하면서 끊임없이 내 人生을 틀에 글레에 맞춰놓고서

그런 生覺의 틀 굴레 그리로 자꾸 맞춰가려고 하는 노력하는 마음, 그 마음이 바로 妄想 分別 煩惱입니다.


2.

보통 生覺의 틀 굴레인 妄想 煩惱 分別하는 마음 이것을 그 ‘無繩自縛(무승자박)’ 이란 表現을 하는데요,

이 포승줄이 없는데, ‘無繩’ 포승줄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自縛’ 自身을 스스를 묶고 있다.

스스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데 스스로 自身을 포승줄도 없이 꽁꽁 동여매서 묶어놓은 다음에

없는 포승줄인 生覺의 틀 굴레인 妄想 煩惱 分別하는 마음 이런 마음 때문에 괴롭다고 스스로 막

어리석게 묵어놓고선 이런 妄想 煩惱 分別하는 마음 이 마음을 좀 풀어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自身이 스스로 그런 마음으로 自身을 묶었으니까 내 스스로가 아니면 풀 수가 없는데도

누구한테 풀어달라고 애원하는 이런 虛妄한 일들을 우리가 지금까지 벌이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幸福지고자 하신다면 方法은 딱 하나입니다.

事實은 이미 完全하게 幸福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生覺과 妄想 煩惱 分別心으로

自己 自身을 스스로 不幸하게 자꾸 묶어서 가둬 놓는 役割을 하니까 괴로운 겁니다.

이런 포승줄 아닌 없는 끈인 虛妄한 生覺의 틀 굴레인 煩惱 妄想 分別心 觀念만 바꾸면,

마음만 바꾸면, 바로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지금 이 瞬間 이 자리에서 幸福해질 수가 있고

바로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서 마음工夫를 끝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法會 때 說法을 하고 法門을 할 때에 여러분들이 인제 고개를 끄덕이면서 잘 들으시거든요

근데 인제 이 私的으로나 또는 이런저런 뭐 茶를 마신다거나 밥을 먹는다거나 할 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 分明히 저런 얘기는 法會 때 했던 法門이라서

저 얘기를 法門과 탁 連結해서 이미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 아 저기 또 빠지고 계시는구나,

이런 狀況을 보면서, 제가 이만큼 말씀을 드릴까말까 하고 마음이 올라오다가, 쯧쯧하면서

뭐 法門 할 때 한 時間이나 얘기를 하는데,  밥 먹고 차 마시는 시간까지 法門을 하면 되겠나

싶어서 그냥 얘기를 안 하는데 어~ 그때마다 제가 이렇게 올라온다는 것이 뭐냐면,

아 이분들께서 고민하고 계시는 많은 部分들이 어찌 보면 簡單하게 끝나는 問題입니다.

내가 내 問題에 대해서는 그렇게 쉽게 맘을 탁 돌이키지 못하니까 어려운 問題라고 生覺하지만서도...

 

그래서요 마음을 觀할 때도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보라고 하잖습니까?

그럼 觀客이 되어서 내 마음을 볼 수 있거든요. 그럼 智慧로운 答이 나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힘든 일이 생기거나 괴로운 일이 생길 때 친구들한테 막 얘기하잖아요.

야 이게 힘들고 저게 힘들고 막 이것 때문에 죽겠고 저것 때문에 죽겠다고 얘기하잖습니까?

그런 얘기하는 自身의 마음을 觀客이 되어서 가만히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보면 答이 나와요

내가 그런 이야기 하는 마음 안에 빠져있을 땐 答이 안 나오지만 한 발짝 떨어져서 관객이 되어서

지켜볼 때는 모든 문제에 대한 答이 나옵니다.

 

길거리에서 어른 두 분이서 남들이 쳐다보는 것도 신경도 안 쓰고  막 自尊心이 상해서

서로 막욕을 하면서 길거리에서 엄청 싸우는 분들 가끔 계시잖아요.

저~ 어디 홍문 쪽에 어디 갔더니 어떤 보살 아주머니하고 아저씨하고

뭐 아주 뭐 저 대로변에 드러누우면서 까지 대판 싸우시더라구요.

사람들이 다 구경을 하고 차가 빵빵거리고 하는데 뭐 안중에도 없어요, 그냥. 싸우느라고.

그분들은 이제 그 狀況 속으로 빨려 들어가 있기 때문에 남들 시선은 뭐 生覺도 못하고

일단 싸우고 이러지 않습니까? 그것과 똑같단 말이죠.

 

그러나 第3者가 돼서 觀客이 돼서 그 광경을 바라보면 저 사람들 왜 저러고 있을까?

이 많은 사람들 쳐다보는데 왜 저러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똑같습니다!

부처님 입장에서 우리를 본다면 自己 스스로 아침부터 내~내 自신을 없는 포승줄인

허망한 망상 번뇌 분별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꽁꽁 묶고 동여매서 가두어 둔 다음에

괴롭다고, 괴롭다고 부처님한테 풀어달라고. 그런데 부처님이 풀어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은 法은 설해줄 수 있을지언정 그건 너가 스스로 묶은 거라고 法을 설해줄 수는 있을지언정.

석가모니 부처님도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을 만났던 모든 第子들이 다 깨달음을 얻은 건 아닙니다.

깨달음은 스스로 풀어야 되니까. 無繩自縛을 스스로 풀어야 되니까...

 

3.

그니까 스스로 無繩自縛인 虛妄한 生覺의 틀 굴레인 煩惱 妄想 分別하는 마음을 풀만한 因緣이 되려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계속해서 法會를 나오셔서 法門을 꾸준히 듣고 그래야 됩니다.

이 가장 重要한 核心은, 이 마음工夫에 있어서 第一 重要한 核心은 法門 듣는 것이 最高의 修行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80세 涅槃하실 때까지 하신 일이 뭡니까?

다 法을 說한 거 밖에 없어요. 다 法을 說한 것 밖에 없습니다. 法門을 듣는 거 以外에는 할 것이 없습니다.

修行이란 걸 따로 할 必要가 없다는 말입니다. 法門 듣는 것이 修行이지, 별도의 수행이 필요없습니다 

 

그런데 法門을 해도 너무 잘 理解를 못하니까. 法門은 뭐냐하면, 妄想 煩惱 分別心만 딱 그치면 된다.

‘叵息妄想必不得(파식망상필부득)’ 이다.

妄想 煩惱 分別하는 마음만 그치고 쉬면 바로 그 자리에서 바로 眞理, 法이 드러난다고

그렇게 주구장창 계속 얘기했슴에도 불구하고  人間들이 妄想 煩惱 分別心을 못 쉬는 거예요.

固定不變하는 獨立的인 實體가 없는 텅~비어 空한 虛妄한 妄想 分別心을 어떻게 쉬는 겁니까?

저는 妄想 煩惱 分別心을 피운 적이 없는데 왜 자꾸 妄想 煩惱 分別心을 부렸다고 그러죠?

제자들이 그렇게 얘기하니까, 부처님이 하도 답답해서, 뭐랄까 慈悲心으로 얘기를 해준 겁니다.

근데 아무리 妄想 煩惱 分別心을 깨라고 말을 해줘도 못알아듣고 못깨니까,

이제 하나의 修行法인 것처럼 方便을 써서 說明을 한 거예요.

 

그런데 人間들은 그 方便에다가 修行法이다라고 이름을 붙여놓고

그 修行이라는 方便이라는 걸 꽉 붙잡고 살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修行의 方便이 뭐냐하면  오직 딱 하나 뿐입니다.

지관(止觀)해라. 위빠사나해라, 사념처(四念處)해라 이랬단 말이죠.

思念處가 곧 八正道를 수행해 가는 方法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思念處에다가 唯一한 修行方法이라는 表現을 붙였습니다.

그러니까 思念處만 修行하면 저절로 八正道가 닦여진다는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씀하신 修行法은 오직 四念處 하나 뿐이거든요.

四念處 修行이 뭐냐하면 보라는 겁니다. 보라. 觀하라는 것입니다.

 

근데 뭘 도대체 어떻게 보느냐? 妄想 分別 煩惱를 介入시키지 말고 봐라. 이겁니다.

이게 修行法입니까? 이거는 修行法이 아닙니다, 그래서 禪師스님들도 그렇고

뭐 임제스님이며 뭐 큰스님들은 다들 하는 얘기가 별도로 修行할 必要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佛敎는 修行하는 宗敎가 아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뒤늦게 나온 그 方便에 執着해서 붙잡고 있는

修行法을 붙잡고 살아오다보니까 별도의 修行을 해야한다고 錯覺을 하지만

조계종을 얘기하시는 六祖 혜능스님도 수행 할게, 수행하는 게 아니다, 불교는.

마음工夫는 修行하는 것이 아니다. 닦아갈 필요가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했단 말이죠.

우리는 本來 이미 完全하게 完成돼있고 깨달아 있는 부처(佛)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修行한다고 하면 아직 完成이 안되어 있고 그래서 完成된 자리가 저기 있으니까

그 길로 가는 修行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 本來 이미 完全하게 드러나 있는 眞理, 諸法의 實相을 無視하고,

이렇게 지금 여기 生生하게 드러나 있는 眞理는 완전히 無視한 채, 또 다른 眞理가 있는 것처럼,

또 다른 별다른 法(眞理)가 있는 것처럼, 그래서 다른 그 法, 眞理를 나는 아직 얻지를 못해서

그 法을, 眞理를 얻어야 되는 것처럼 對相化 시켜놓고, 있지도 않은 眞理, 法을 찾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法, 眞理가 어떤 하나의 境界가 돼버립니다. 眞理, 法은 둘로 나뉘는 게 아닙니다.

眞理, 法은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 完全히 나와 하나가 되어서 그냥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 한 瞬間 刹那之間에도 깨달음을 부처를 쓰지 않고 있는 적이 없단 말입니다.

지금 여기 드러나 있는 모든 것이 있는 이대로 眞理, 法이다(諸法實相)라고 이렇게

표현을 하지 않습니까?  이 표현이 이제 ‘觀하라’는 얘기도 이것과 인제 비슷해요.


4.

‘觀하라’는 표현을 두고 우리는 修行하라는 얘기로 알아듣고서는

‘觀 修行, 보는 修行’을 한 시간 하고, 두 시간 하고, 세 시간 하면 修行을 아주 잘 하는 사람으로

錯覺을 하고 삽니다. 그러나 그게 修行이 아니고 ‘觀하라’ 하는 말은, 부처님께서 ‘觀하라’ 는

修行法을 별도로 만들어서 설명해줄려고 한 게 아니고. 언제나 우리는 觀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보고 있잖습니까? 눈으로 보고 있잖아요. 世上을 보고.

여러분들이 지금 저를 보는데 힘드십니까? 꼭 修行을 通해서만 어렵게, 어렵게 저를 보고 계시나요?

누구나 눈만 있으면 자연스럽게 보는 거죠.

 

그런데 이 본다는 것이 눈, 귀, 코, 혀, 몸, 뜻이 전부다 보는 겁니다.

눈으로 본다. 귀로 들어 본다. 코로 냄새맡아 본다. 혀로 맛 본다. 몸으로 촉감을 느껴 본다.

마음으로 생각해 본다 이러지 않습니까? 생각해 본다. 이러잖아요?

눈, 귀, 코, 혀, 몸, 뜻이, 色聲香味觸法과 接觸을 하는 것은 全部 다 본다는 겁니다.

우리는 힘들여서 어렵게 보지 않습니다. 소리 들리면 그냥 쉽게 듣습니다.

이 소리(죽비를 침)를 그냥 귀가 있으면 쉽게 다 듣는 거예요. 들어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보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런데 부처의 마음(佛心)과 중생의 마음(衆生心) 差異가 뭐냐하면

그냥 보면 되는데 衆生心은 生覺의 틀 굴레인 虛妄한 妄想 煩惱 分別心 觀念으로 보는 겁니다.

이걸(죽비를 들어 보임) 딱 보면 그냥 보면 되는데, 아 죽비구나, 길고, 이 죽비는 좀 비싼 것 같네.

뭐 이런 式으로 分別해서 본단 말이죠. 사람을 볼 때도 이 사람은 잘 생겼다 못 생겼다,

호감형이다 비호감형이다, 능력이 있다 능력이 없다, 돈이 많다 돈이 없다, 백을 좀 비싼 걸 들었다,

차를 좀 좋은 걸 타고 왔다, 탁 보자마자 그런 分別 妄想 煩惱가 일어나서 相對를 是非 分別 比較

判斷 解釋해서 본다는 말입니다. 妄想 煩惱 觀念 槪念 分別로 解釋해서 보는데 익숙해있습니다.

이런 行爲  業은 아주 오래된 묵은 習慣, 習性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있는 그대로를 그냥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십니다. 그게 正見입니다.

바르게 봐라. 八正道의 正見, 바르게 보면 모든 問題가 다 圓滿하게 解決된다는 겁니다.

근데 우리는 바르게 보지 못하고 妄想으로 解釋하고 分別해서 分別 妄想으로 자꾸 걸러서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를 봐라 하는 말씀은 修行法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보고 있습니다.

다만 妄想 煩惱 分別心이라는 生覺의 틀 굴레에 일단 걸러서 보니까 스스로 사서 괴로워하는 겁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觀하라 하는 것은, 이게 止觀 아니겠습니까?

止는 멈출 지(止)자 입니다. 멈춰라. 分別 妄想 煩惱를 멈추고 관(觀)해라, 그냥 봐라. 멈추고 보는 거예요.

혜민스님도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이란 책에서 멈추면 보인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分別 妄想 번뇌를 쉬면, 멈추면 眞理, 法이 本來자리가 그냥 드러나는데, 모든 眞實이 드러나는데

우리는 그렇게 해서 본 적이 없는 겁니다. 그동안. 分別 妄想으로 解釋해서, 걸러서만 보아왔던 것이죠.

그래서 보라는 것, 觀하라는 말은 따로, 별다른 修行法이 아닙니다.

위빠사나라는 특별한 수행법이 아닙니다.

 

그냥 언제나 우린 보고 살거든요. 언제나 보는 作用은 누구나 하고 삽니다.

근데 뭐 본다는 별도로 觀 修行 이라고 修行法이라고 이름을 붙일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언제나 보는데. 다만 우리는 그동안 힘들게 生覺, 解釋, 分別, 妄想해가지고 한 사람을 봐도

그 사람이 나한테 도움이 될까, 안될까 온갖 것들의 妄想 分別心으로 걸러서 보니까 힘이 듭니다. 

즉각적으로 간단하게 보는 건 단순하고 쉽잖습니까?  근데 妄想 分別로 보는 건 힘들어요.

衆生心은 쉽게 보지 않고 어렵게 보는데 習慣이 되어서 익숙해있습니다.

 

그래서 쉽고 단순한 걸 얘기하면 되게 힘들어해요. 어렵게 꼬고 꼬아서 얘기해줘야 좋아한단 말이죠.

그럼 쉬운 거 쉽게 얘기하면 아예 眞理, 法이 아닌 것처럼 錯覺들을 합니다.

結論的으로 觀하는 것, 이것은 特別한 修行이 아닙니다. 그냥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習慣的으로 익숙하게 하던 分別 妄想에 걸러서 보던 習慣을 싹 빼주기만 하면 된다.

그것만 하면 우리가 할 건 그것밖에 없습니다.

禪에서도 初期佛敎 부처님말씀에서도 大乘, 小乘, 禪 할 것 없이

오직 그냥 있는 그대로 본는 거예요. 그건 수행이 아닙니다.

단지 ‘파식망상필부득’ 妄想만 걷어낸다면 그 자리가 바로 돌아가는 本來자리다.

시고행자(是故行者)가 환본제(還本際)하는 本來 그 자리입니다.

 

이 구절을 이렇게 이제 妄想을 쉬지 않으면 ‘必不得’, 얻을 수가 없다

이렇게 解釋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또 이렇게 解釋을 하기도 합니다.

이 華嚴의 자리, 本來자리는 뭐 妄想 煩惱 分別心을 쉬어야지만 따로 얻는 이런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妄想 煩惱 分別心을 내는 것 自體가 이미 不可能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妄想을 내는 것은 이 ‘파’를 ‘불가’ 할 수밖에 없다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妄想을 내는 것 自體가 깨달음의 자리, 華嚴의 자리, 本來자리에서는 不可能하고,

이미 ‘還本際’ 돌아간 本來자리에서는 妄想을 내는 것 자체가 不可能하고

다시 그렇게 ‘환본제’ 했으면, 本來性稟을 깨달았으면 더 이상 妄想을 내는 게,

妄想을 피운다다는 건 不可能하다. 더 이상 妄想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의미로도 해석을 할 수도 있겠죠. 근데 이건 이미 本來자리로 돌아간 사람에게 하는 法門이냐

아니면 돌아갈 사람에게 하는 法門이냐에 따라서 이제 뭐 다르게 해석을 할 수도 있겠죠.


5.

그 다음에 ‘無緣善巧捉如意’, ‘무연선교’ 이랬는데, ‘무연’은 뭐냐면요, ‘緣이 없다’ 이러지 않습니까

우리가 인제 慈悲心을 無緣慈悲 이런 표현을 씁니다. 이제 ‘연이 없다’라는 건 뭐냐면 條件이 없다,

條件 지어진 게 없다. 그저 慈悲心을 낼 뿐이지 뭐 補償心理나 뭐 이렇게 하면 저렇게 도움이 되겠지

이러지 않는다. 그래서 ‘무연선교착여의’는 뭐냐면요, ‘무연’ 즉 조건 없이 무한한 자비심을 가지고

‘善巧’, 우리 ‘선교방편’ 이런 얘길 하잖습니까? 착한 方便,

‘巧’는 아주 뭐 이렇게 뭐 ‘공교하다’, ‘예쁘다’, 기교가 뛰어나다 이런 뜻인데

아주 좋은 方便을 가지고 아무 條件 없이 좋은 方便으로써, 善巧方便으로써

‘捉如意’, ‘착’은 ‘잡는다’ 이 소리죠. ‘如意’ 뜻대로 잡아와진다.

그니까 아무런 條件 없이 無限한 方便을 가지고 뜻대로, 뜻대로 무한한 방편을 잡아가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 本來자리 딱 가 있는 사람들은 무한한 선교방편을 아무런 그~ 보상심리, 보답을바라고

이런 것 없이 그저 언제나 받아 잡고 있기 때문에 뜻대로 法을 설하게 되는 것이고 뜻대로 方便을

펴는 것이죠. 그래서 ‘歸家隨分得資糧’, ‘귀가’ 집으로 돌아갈 때에

‘수분’ 자기의 分을 따라서 ‘득자량’ 자량을 얻는다.

지난 시간에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 했던 표현처럼

이 宇宙 法界의 法雨는, 眞理는 언제나 항상 드러나 있고

언제나 우리에게 그 眞理의 비는 흩날리고 있고 뿌려지고 있습니다.

다만 내가 妄想을 피움으로써 그 法, 眞理 自體를 보지 못하고

妄想 煩惱 分別의 世界를 보면서 人生을 사는 거죠.

생생한 현실을 살아야 되는데, 나에게 주어진 生生한 삶을 살아야 되는데 妄想의 삶을 사는 겁니다.

 

요즘에 여러분 하늘을 보십니까? 여러분 날씨 춥다고 房에만 들어있지만

저는 이렇게, 이렇게 습관적으로 여러분들 인제 뭐 이렇게 한참 이렇게 계시다 갈 때

요렇게 배웅나간다고 나가보면 하늘을 이래 바라보면 어제도 이렇게 하늘을 보는데

정말 파~~란 하늘에 낙엽 다~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가 하늘을 향해서 탁 뻗어있는 그 모습이

서울의 하늘이 이렇게 정말 청명하게 가을, 겨울이 가져다주는 우리에게 주는 놀라운 선물이거든요.

그 모습을 보면요, 정말 이건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어요. 말로 표현하면 벌써 그것을 전달할

수가 없어요. 정말 아~! 엄청난 선물입니다. 우리에게는....

 

여러분이 삶을 살면서 정말 그 어떤 선물을 받고 싶다면 이 선물을 받으세요.

돈으로 만들어진 선물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돈이 있으면 좋지만 없으면 그 선물은 없어지는 거잖아요.

근데 지금 여기 이 瞬間에 分別 妄想을 하지 않고 싹 걷어내고

지금 여기 이 자리를 그냥 생생한 이 자리를 보기만 할 수 있으면

아무런 是非分別을 탁 떠나서 그냥 파란하늘을 바라 볼 수만 있다면

앙상한 나뭇가지에 시선을 딱 둘 수만 있다면.

 

근데 파란 하늘을 이렇게 바라보더라도 그 하늘이 언제나 열려있지만

우리는 妄想을 가지고 보니까 눈이 그냥 쓱 스쳐지나가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래 보면서 하아~! 내 자식이 大學 잘 갈 수 있을까, 男便이 돈을 잘 벌어올까,

이번에 진급을 할 수 있을까, 오늘 저녁은 뭘 할까 뭐 온갖 이런 시비분별, 분별망상을 가지고 보니까

이 생생한 살아있는 이 놀라운 神秘 그 自體인 每 瞬間의 現實, 삶을 우리는 전혀 생생하지 않은,

왜냐하면 生覺 속에서 再生되는 分別 妄想 煩惱 觀念들 이것들은 전혀 생생하지 않거든요.

항상 깝깝하고, 煩惱 妄想에 시달리거든요.

그러니까 眞理가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생생한 眞理가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眞理를 보지 않습니다. 가끔 보죠, 가끔.


6.

여행을 떠나서 여행지에서 놀라운 풍경을 볼 때

와~아 하는 그 瞬間. 그 瞬間은 是非 分別 比較 煩惱 妄想이 없어요.

여행을 떠나면 깨달음의 半은 成就하는 것이다 라고 밀라레빠가 얘기를 했었는데,

그 밀라레빠의 말은요 旅行을 떠나면 하루하루 쳇바퀴 도는 日常에서는

아침에는 점심을 生覺하고 점심에는 저녁을 生覺하고 저녁에는 그 다음 날을 生覺하고

그 다음날 있을 일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자꾸 이렇게 여행을 떠나고 싶은 이유는 그겁니다.

여행을 떠나 있으면 쳇바퀴 도는 日常을 일단 옆으로 제쳐놓게 되요.

끊임 없는 妄想 生覺 煩惱 分別 判斷 解釋이 잠시 옆으로 제쳐놓이게 됩니다.

어차피 여행 끝나고 나서 다시 생각하지뭐~ 하고 딱 제쳐놓는단 말이죠.

生覺과 妄想이 잠시 제쳐놓아지니까 그냥 있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감동하기가 쉬워지는 겁니다.

 

그럼 그렇게 꼭 旅行을 떠나야지만 그게 가능하냐? 그렇지가 않습니다.

제가 이 日常이라는 놀라운 日常의 旅行地를 깨닫고 보니까

아! 旅行이라는 것은 肉身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狀態구나!

마음은 언제나 旅行地에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意識은 妄想을 쉬고 이 생생한 지금 여기 이 자리를 들여다봄과 同時에

풀 한 포기 속에서도 여행지였던 놀라운 히말라야의 꽃 한 송이를 볼 수 있고

이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서 그 히말라야에서의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게 아닙니다. 제가 장병들에게 이런 法門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했었을 때

제가 마지막 떠나오면서 장병들이 이렇게 줬던 인제 뭐~ 글들을 제가 읽어보면서

깜짝 놀랐던 점이 뭐냐면요,

 

저는 이것이 어느 정도 공부가 되고 뭐 저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생각했으니까

공부가 좀 되고 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이게 感動일까 이런 錯覺을 했었는데

그 장병들이 저한테 써준 편지에 상당히 많은 장병들이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강원도 고성 양구에서요, 이 친구들이 뭐라 그랬냐면 처음에 法門 들을 때는

뭐 이 양구의 이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막 찬탄을 하는데 속으론 辱했답니다.

헛! 참! 스님이나 그게 좋지 우리는 깝깝해 죽을지경인데 이게 뭐가 좋다고 그러느냐고.

근데 이 法門을 듣고, 듣고 듣다보니까 어느 날 봄에 꽃이 피는데 이게 정말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하더라는 겁니다. 自然에 자꾸 눈이 가게 되고 귀가 가게 되고 그리고 自然의 아름다움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내가 군생활 하면서 깨달았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큰 선물을 받았다.

그런 얘기를 장병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 아 이것은 누구나 가능한 이 공부구나.

누구나 가능한 겁니다. 是非 妄想 分別을 잠시 妄想을 쉴 수만 있다면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언제나 생생하게 드러나 있는 眞理를 볼 수 있고 正見이 可能하다.


7.

그래서 누구나 ‘歸家隨分得資糧’ 이래서 자기 分守에 따라서 資糧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法雨는 단 한 瞬間도 없을 때가 없어요. 자기 분에 따라서니까. 뭡니까? 자기가 마음만 내면 됩니다.

여러분들 뭐~ 스승이 없다? 이건 거짓말입니다. 스승이 있어도 마음을 내지 않으면 發心하지 않으면

그 사람 눈에는 스승이 보이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옆에 있어도 부처님의 법문 듣고 깨닫지 못한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깨달음은 어디서 옵니까? 스승 앞에서 오는 게 아니고, 스승 앞에서 오는 게 물론

가장 많지만 예를 들어 어떤 스님은요 뭣, 뭐 하나 뭐 도토리 같은 게 똑 떨어져가지고

기왓장에다 딱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단 말이에요. 自然의 바람소리를 듣고 깨달을 수도 있고,

어린 아이가 깔깔거리고 웃는 모습을 통해 깨달을 수도 있고,, 누가 나를 뒤에서 누구야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깨달을 수도 있다.

 

깨달음은 언제나 있으니까 내가 마음이 완전히 열리는 演習이 되고, 分別 煩惱 

妄想만 쉬어지는 마음의 演習이 되다보면 어느 瞬間 탁 깨달음과 契合을 할 수가 있는 것이란 거죠.

그러려면 딱 하나 自己가 이 資糧을 無限히 받으려면 發心을 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내가 한 번 이 마음工夫 해봐야겠다. 이 眞理를 내가 工夫해봐야 되겠다라는 發心, 그게 全部입니다.

마음工夫의 全部입니다. 發心을 하고 法, 眞理을 찾아 듣는 것 이게 다입니다.

 

그러니까요 이 마음工夫를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엄청난 錯覺 속에 빠져왔던 게,

불교는 根機 높은 사람만 하고 삼천 배, 만 배를 매일같이 하는 사람만 공부하고

한 시간, 두 시간, 열 시간씩 앉아가지고 장좌불와 하는 사람에게만 빨리 오는 것이 工夫다.라는

이렇게 엄청난 錯覺속에 여러분들이 뻐져서 하우적거리고 있었던 겁니다. 

제가 이런 얘기하면 여러분들 안 믿어도 되는데 六祖혜능스님이 이렇게 얘기 했다니까요.

앉아있는다고 부처가 되냐? 앉아있는다고 부처되는 게 아니다. 修行이 必要한 게 아니다.

다만 마음이 물들지만 않으면 된다. 수많은 선사스님들의 가르침에 구구절절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뭐만 하면 되는가? 發心을 하고 내가 工夫 한 번 끝내 봐야 되겠다 라는 發心.

그러고 또 하나는 發心을 했으면 發心만 하고 가만있으면 안 되죠.

發心하고서 찾아, 法門을 찾아 듣는 겁니다. 인터넷을 통해 들어도 좋고, 뭐 찾아가서 들어도 좋고,

뭐 어떤 法門이 되었든. 근데 法門을 듣다보면 내가 인제 아무 절이나 찾아가 보는 거예요.

아무 因緣 닿는 곳이나 찾아가서 法門을 들어보는 겁니다. 근데 자기 분에 맞는 法門이 딱 들리면

저절로 가게 돼있습니다. 가지 말라고 해도. 자기 근기에 딱 맞는, 자기 근기보다 조금 높은 法門을

해 주신다 그럼 그게 자꾸 귀가 쏠리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뭐 쉽게 말해서 톡 까놓고 내 工夫보다 工夫가 안 된 스님이 많이 있습니다.

在家 신도님들보다 工夫 안 된 스님도 있어요. 있을 수 있어요. 뭐 그런데 가게 됐다.

그럼 저절로 내가 다시 안 가게 되겠죠. 그냥 이것처럼 저질러서 하는 겁니다.

冊도 마찬가지에요. 冊도 자꾸 찾아보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제가 지금까지 가만히 보면

제가 요만큼 공부가 돼 있으면 한 요정도 수준 높은 책을 봤을 때 제가 놀랍게 이 책을 좋아하게 되고

또 이 정도 공부가 됐으면 옛날에 너무 좋았다고 생각했던 책을 읽어봐도 별로 감흥이 없는데

또 이 정도 공부되면 야~ 책이 이상하게 저와 因緣이 되는 겁니다.

또 그런 스님들의 法門이 因緣이 되고. 發心만 하면 저절로 宇宙法界가 나에게

그런 因緣을 가져다주게 돼 있습니다. 發心하고 法門 듣고.

그러고 굳이 수행하고 싶다 하면 이제 坐禪을 하는 거죠.

근데 좌선을 하는데 뭐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이렇게 무슨 경쟁하듯이

뭐 무슨 이 세상일처럼 이거 잘하면 뭐 더 잘하는 사람처럼 이런 식으로 수행할 필요 없습니다.

그 선방에 저 정진의 고수들도 50분 참선하고 10분 쉬지 않습니까.

뭐 어떤 분은 보니까 열 시간을 해야지 된다. 뭐 이렇게 얘기한다고 하던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相만 높아져요. 내가 수행 잘 한다는 相.


8.

그 다음에 보면요,


이다라니무진보 以陀羅尼無盡寶

장엄법계실보전 莊嚴法界實寶殿


‘以陀羅尼無盡寶’, 다라니의 다함없는 보배로써 다라니, 뭘 다라니라고 하냐하면

여러분 그 金剛經에서 이 말하는 核心이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있잖습니까?

相이 相이 아님을 보면 바로 如來를 본다. 즉 우리가 해야 되는 건 如來를 보기 위해서,

如來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되는 건 相이 想이 아님을 보는 겁니다. 唯一하게 이거 하납니다.

相이 뭡니까? 妄想 煩惱 分別 觀念 槪念으로 지어낸 모든 걸 相이라고 그럽니다.

分別로 지어낸 모든 걸 相이라고 그럽니다. (죽비를 들어 보이며) 길다 짧다 이게 相입니다.

죽비다 이것도 相입니다. 제가 뭐 어떻다. 어떤 사람이 잘생겼다, 못생겼다, 능력 있다, 없다,

이 모두 다 相입니다. 근데 諸相非相, 相을 相이 아니게 본다는 게 正見 한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거죠. (죽비를 들어 보이며) 이게 뭡니까?

죽비로 보는 게 아니고 나무로 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본단 말입니다. 그냥.

분별, 일체 분별을 떠나 보면은 죽비를 보나 시계를 보나 저를 보나 아무런 差別이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데서 무슨 差別이 있어요. 스님을 보나 중생을 보나 아무 差別이 없죠.

諸相非相을 잘하는 사람은 마음속에서 이 世上을 살아야 되니까 方便으로 이 世上을 살아야 되니까

世上의 規則은 지켜요. 세상의 규칙이니까 지키죠. 세상의 규칙은 지키지만 그게 完全한 眞理기 때문에

지키는 게 아니라 지켜줘야 되니까 지키는 겁니다.

 

우리는 불자니까, 스님, 스님이니까 뭐 스님으로써 예를 지켜주는 건 당연하죠, 그냥.

세상 이치니까. 근데 그거는 그냥 우리가 만들어 놓은 룰일 뿐이지

스님이 진짜 실체적인 위대성이 있어서 스님을 우리가 존경하는 건 아닙니다.

그 이 껍데기 相을 가지고 스님을 존경한다면 진짜가 아니란 말이에요.

諸相非相의 자리에서는 스님, 신도 평등하게 또~옥 같습니다.

죽비를 보나 A4용지를 보나 똑같은데 사람을 보나 스님을 보나 똑같은데

諸相非相의 자리에서 뭐가 差別이 될 게 있겠습니까. 아무런 差別이 될 게 없다.

 

그렇게 槪念 觀念 生覺 妄想 分別 煩惱로 말의 뜻을 따라가면서 解釋하고 보는 것

그것은 諸相非相으로 보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경전은, 경전이 가르치는 것은요,

方便인 經典들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지마라. 이건 지키고 저건 지키지 말고 하면서

부처님께서 慈悲心을 내셔서 衆生들을 위해서 하나하나 가르쳐주신 그런 方便法이 있어요.

그런 慈悲方便의 法門이 있는데요, 工夫를 조금 더 하다보면 그런 慈悲方便의 法門은 이제

조금 關心事에서 좀 멀어집니다. 멀어지면서 진짜배기 가르쳐주려고 하는,

진짜 法, 眞理 그 自體 그것에 인제 關心이 가게 돼있어요.

근데 그 진짜 法, 眞理는 언제나 槪念 觀念 分別 妄想을 따라가지 않는 工夫입니다.

그 공부가 諸相非相의 공부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보더라도 거기서 槪念 妄想을 따라가고

生覺과 解釋을 따라가서 理解하는 그런 工夫가 아니란 말이에요.

理解가 됐다 하면 그것은 진짜배기 工夫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진짜 法, 眞理는 絶對로 理解하는 게 아니거든요 이 工夫는. 이해의 유무를 떠나는 겁니다.

論理를 떠나는 거예요. 槪念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진짜 工夫는 말이 있을 때, 法門이 있을 때 그 法門의 뜻을 따라가는 게 아닙니다.

뜻을 따라가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참선 법문이라고 하는 걸 話頭라고 하는 것이

‘法이 무엇입니까?’, ‘뜰 앞에 잣나무다.’  ‘뜰 앞에... 잣나무가... 저게 왜 법일까?’

‘아 그 소나무는 法이 아니고 잣나무가 法이면 아 저게 뭐뭐뭐...’

이렇게 生覺을 따라가고 槪念을 따라가면 그것은 그 말뜻을 모르는 겁니다.

眞理가 뭐냐고 묻는데 죽비를 내리치거나, 활하거나, 똥막대기다라고 얘기했을 때

그 말뜻을 따라가면 벌써 이 眞理와는 어긋나는 겁니다.

그 자꾸 아무리 眞理, 法을 설해줘도 말뜻을 따라가니까

어쩔 수 없이 方便으로 다라니나 眞言을 설해서 解釋하지 말라고 해놓으면 그건 말뜻을

따라갈 수가 없잖아요. 옴마니반메홈. 그래서 다라니나 진언을 때로는 설한단 말이죠.

 

근데 그 다라니나 진언만 다라니, 진언이 아니라

부처님의 本質을 드러내는 法門 慈悲方便의 法門, 直指人心 해주는 法門,

그 法을 直指해서 가르치는 법문, 그것은 말뜻을 따라가는 게 아닙니다.

槪念을 따라가는 게 아니에요. 槪念을 따라가지 말라고 설한 法門을 한마디로 다라니라고

표현을 한 겁니다. 그니까 이 法門은 全部 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어서

이 손가락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저 달을 봐야지. 근데 이 法門은 전부다 손가락일 뿐이에요.

 

그래서 이 법문을 보는 게 아닙니다. 法門이라는 것은 말뜻이잖아요, 말이잖아요.

말을 따라가면 이건 그냥 말이 되는 거고, 그런데 말을 따라가지 말고 말의 낙처를 보라고 한단 말이죠.

落處. 그 말이 의미하는 本質이 뭘까? 저 말을 하는 곳이 뭘까. 왜 저 얘기를 하는 걸까.

그 落處를 보려면 말뜻을 따라가면 안 되고 그 말을 다라니로 알아야 된단 말이죠.

다라니는 뜻 없는 겁니다. 解釋이 되지 않는 겁니다. 해석되지 않고 그 落處를 볼 수 있어야 된단 말이에요.

 

손가락이 딱 가리키면 이 손가락을 보면 안 되고, 손가락이 떨어지는 자리, 달을 봐야 된단 말이죠.

그래서 經典은 하나의 다라니 입니다. 말뜻을 따라가려고 하는 게 아니라 말뜻은 나중에는,

나중에 던져버려야 할 것입니다. 말뜻은 뗏목과도 같은 거라서 결국엔 버려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말뜻이 아닌 다라니로써 眞理를 이해해야 되죠.

그래서 이 다라니의 다함없는 보배, 이 다라니의 法門, 直指의 法門이야말로

무한한 다함없는 보배와 같습니단 말이죠.


9.

‘以陀羅尼無盡寶 莊嚴法界實寶殿’

法界를 莊嚴해서 법계를 장엄하니까 이 다라니가 그야말로 다함없는 보배로써

법계를 장엄하고 있으니 ‘실보전’ 실로 보배궁전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處해있는 이 狀況, 이 條件, 내가 살고 있는 집, 직장, 법당, 이 모든 이 世界

하나하나가 그대로가 장엄된 세계가 아니라 法界 입니다. 장엄된 法界이기 때문에

이 하나하나가 실로 보배스러운 宮殿과도 같습니다.

 

여러분의 집이 옛날에는 40평대 아파트에 살았는데 가난해져서 20평대, 30평대로

이사 가서 우리 집은 비참해졌다. 그건 生覺이 그렇게 生覺하는 거예요.

넓은 집에 있으나 좁은 집에 있으나 잘 때는 어차피 한 평밖에 안 필요하고

좁은 집에 있으면 청소 조금해서 좋고. 生覺이,그렇게 만드는 것이지 實際 그런 게 아닙니다.

‘정글의 법칙’ TV를 보니까 그 잘 살던 연예인들이 정글 속에서

그냥 풀로 이렇게 대충해가지고 비가 오는 날 풀로 된 지붕이 뚝뚝 떨어지겠지만

대충 빗방울만 막을 수 있어도 신나서 좋다고 하면서 집 잘 지었다고 하면서 기쁘게 잠이 들데요.

사실은 지금 내 집이 完全히 莊嚴된 實寶殿입니다. 보배궁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언제나 내가 處해 있는 그 자리가 實로 莊嚴된 보배궁전 입니다.(立處皆眞)

 

그래서 궁좌실제중도상 窮坐實際中道床  궁극적인 자리에 앉는단 말이죠.

궁극적인 자리에서 실제, 실로 참된 진리의 中道床, 중도의 자리에 언제나 앉아 있는 겁니다.

우리는 언제나 궁극적인 자리, 참된 중도의 자리에 우리는 언제나 앉아있습니다.

깨달아야지만 그 자리에 가는 게 아니고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언제나 우리는 ‘窮坐實際中道床’에 있다.

언제나 우리는 窮極的인 그 자리, 本來자리를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本來 그 자리는 바로 中道의 자리입니다. 중도의 자리. 왜 중도의 자리라고 하느냐?

是非 分別 妄想은 언제나 좋거나 나쁘거나 둘로 나누거든요. 그러나 中道의 자리는

맞고 틀리고, 옳고 그르고, 있고 없고, 이 둘로 나누는 그런 자리가 아니란 말이죠.

안다, 모른다. 眞理를 알겠다. 이건 中道가 아닙니다. 모르겠다. 이것도 中道가 아닙니다.

槪念으로 딱 얘기할 수 있는 것은 全部 다 中道의 자리가 아니죠.

이 眞理, 法性은 中道로 表現할 수밖에 없습니다. 굳이 表現을 한다면.

이 眞理의 자리를 不二中道, 中道의 자리다 이렇게 얘길 하는 것이죠.

언제나 우리는 ‘궁좌실제중도상’에 앉아있습니다. 마침내 중도의 자리에 앉아있으니


구래부동명위불 舊來不動名爲佛 이라.

옛적부터 不動하게 한 번도 움직임 없어 그 이름하여 부처(佛)라 이름한다.

옛적부터 단 한 瞬間 찰라도 우린 부처(佛) 아닌 적이 없었다.

옛날에는 중생이었고, 지금은 중생이다가 나중에 가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우리는 단 한 瞬間 찰라도 부처자리를 벗어난 적이 없다.

여러분들이 生覺하는 모든 괴롭다 라는 虛妄한 妄想 分別만 쉬면

바로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가 完全히 幸福한 자리입니다.


10.

이 華嚴經 法門을 통해서 여러분들은요,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법성원융무이상 法性圓融無二相, 둘로 나뉘지 않고, 分別 妄想 是非 分別을 떠나서 살게 된다면

여러분들이 지금 이 시간 이후부터 가질 수 있는 모든 괴롭다 힘들다 답답하다 라고

生覺하는 모든 것이 단지 分別 妄想일 뿐이고, 단지 生覺일 뿐이고, 텅~비어 固定不變하는

獨立的인 實體가 없는 空, 無我이고, 내내 虛妄한 妄想이 만들어 놓은 無繩自縛으로 스스로

묶어놓은 것이라는 것을  이제 思惟를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언제나 내가 무승자박에 묶여있었구나. 언제나 다른 사람이 묶고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내 虛妄한 妄想 煩惱 分別心 觀念으로 스스로 나 自身을 묶으면서 살아왔구나!

묶은 이것을 푸는 것도 나 自身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이 자리를

마음工夫에 대한 發心, 願力을 내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법상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