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受想行識蘊의 괴로움 - 오온(10)

장백산-1 2015. 4. 19. 19:29

 

 

 

 

受想行識蘊의 괴로움 - 오온(10)  |불교기본 교리강좌

 

 

 

 

受蘊의 괴로움

 

그런가하면 肉體的으로는 괴롭지 않으면서 마음만 괴로울 수도 있다. 受想行識 卽, 精神的인 괴로움이다.

感情的인 상처를 받았거나, 싫은 느낌을 계속해서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受蘊의 괴로움’이다. 함께 있는

것조차 싫은 사람과 함께 지내야 한다면 그것은 괴로움이다. 그것은 肉體가 괴로운 것이 아니라 精神이

그 중에도 受蘊이 괴로운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격멸하거나, 욕하거나, 수치심을 주었을 때 우리 마음은

感情的으로 상처받아 괴롭다.

 

受蘊은 苦受와 樂受, 不苦不樂受가 있다고 했다. 좋은 느낌과 싫은 느낌, 그저 그런 느낌이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고수, 즉 싫은 느낌이 올 때 우리는 괴로움을 느낀다. 그렇다면 이 괴로운 느낌은 恒常 實體的

이거나 固定된 것일까? 싫은 느낌이라고 定해져 있는 感情이 있어서, 그런 느낌이 오면 언제나 괴로워해

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싫은 느낌을 받는다고 치자. 그 사람만

만나면 괴로운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實體的으로 ‘싫은 느낌’을 주는 사람일까? 만약 그렇다면 세상

모든 사람이 누구나 그 사람을 만나면 싫은 느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에게는 싫은 사람일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좋은 느낌을 주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 사람에게 固定 不變하는 獨立的인 實體的인 ‘싫은 느낌’이 定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랑했던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 대해 크게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끼고 헤어졌다면, 그 사람은

‘좋은 느낌’에서 ‘싫은 느낌’으로 일순간 바뀌고 만다.

 

모든 狀況도 마찬가지다. 무덥고 땀이 나는 狀況은 ‘싫은 느낌’ ‘찝찝한 느낌’이겠지만, 사우나에 있거나,

운동을 통해 땀을 빼 다이어트를 하거나, 땀복을 입고 체중 감량하는 운동선수들에게 땀나는 狀況은

오히려 좋은 느낌일 수도 있다.

 

조금 비위 상하는 비유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평소 방귀를 뀌는 사람을 더럽고, 지저분하다고 생각하며

방귀 냄새를 맡는 것을 싫은 느낌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病院에 가 보았더니, 맹장수술이나 대장암 수술 등

開腹手術을 한 뒤에는 간절히 너무나도 간절히 가족 전체가 모여 앉아 방귀 나오기만을 기다리게 된다.

방귀가 나오기 시작하면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며, 가족 모두가 기뻐하고, 축하해준다. 방귀라는 자체에

固定된 實體로써 싫은 느낌이 딱허니 定해져 있다면, 방귀는 언제나 싫은 느낌이어야 하겠지만 방귀네에

 대한 느낌은 非實體的인 것이기에 좋은 느낌일 때도 있는 것이다.

 

‘健康美가 넘친다’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사람은 속으로 ‘뚱뚱하다는 말인가’ 싶어 싫어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글래머하다는 말인가’ 싶어 좋아하기도 한다. 말 그 自體에는 좋거나 나쁜 固定된 意味가 담겨 있지

않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에 따라 그 말은 좋은 느낌이 되기도 하고 싫은 느낌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사관학교 생도들은 여름 방학이 되면 하계군사훈련을 한두 달 정도 나간다. 무더운 여름 날 뙤약볕 아래에서

훈련을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분명히 ‘싫은 느낌’일 것이다. 학년별로 서로 다른 훈련을 받으며

다른 부대에서 훈련을 하는데, 신기하게도 더 힘든 훈련을 받는 학년들일수록 얼굴 표정도 더욱 밝고 성취감

과 뿌듯함이 고스란히 느껴지곤 한다. 오히려 학기 중에 학교에서 수업을 받을 때보다도 더욱 살아있음과

열정을 느끼게 된다.

 

힘들고 고된 훈련을 끝마치고 와서 실시하는 法會는 학기 중에 실시하는 法會에 비해서 큰 차이를 느낄

정도로 집중력도 높고, 호응도도 높으며, 목소리에서도 자신감과 성취감이 넘친다. 이렇게 힘들게 훈련을

모두 마치는 날이 되면 그야말로 그 에너지는 하늘을 찌를 듯 높다. 그런 생도들 중에도 가장 힘이 넘치는

생도는 하는 훈련마다 좋은 성적을 받고, 남들 보다 뛰어난 체력과 정신력으로 앞서가는 생도일 것이다.

그런 成就感을 느끼게 될 경우는 뒤처지는 사람들에 비해 훨씬 강한 힘과 넘치는 에너지가 생겨난다.

이처럼 아무리 힘든 느낌을 받게 되는 狀況일지라도, 성취력이나 도전정신을 일깨우거나 할 경우에는

그 狀況이 싫은 느낌이 아닌 좋은 느낌으로 다가오곤 하는 것이다.

 

스스로 그 험한 히말라야를 오르는 등반가들이나, 오지여행을 떠나는 사람들 또한 그 도전정신으로

인해 남들이라면 싫어 할 狀況들 속에서 ‘幸福한 느낌’을 느끼게 된다.

 

어떤 사람은 번지점프를 할 때 그 스릴감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에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번지점프대 앞에 서 있을 때 죽고 싶을 만큼 공포스럽고 괴로울 것이다. 번지점프를 한다는 그

상황은 좋은 상황도 아니고 나쁜 상황도 아닌 中立이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그것에서 좋은

느낌을 느끼기도 하고, 싫은 느낌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90분 정도를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달리며 축구를 하는 것은 그리 좋은 느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월드컵 경기에 나간 선수의 입장이라면, 가만히 벤치에서 쉬며 구경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무덥고 많이 뛰어야 할지라도 나가서 경기에 임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무더운 여름날 뛰고 달리는 것 자체에 ‘싫은 느낌’이 정해져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무더운 더위 속에서 뛰고 달리는 것은 싫어 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기에 상황 따라 그 힘든 상황도

 ‘좋은 느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느끼는 느낌이나 감정 또한 固定된 實體的인 것이 아니다. 마음에 따라서 좋은 느낌이

될 수도 싫은 느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생각 하나만 바꾸면 싫은 느낌이 좋은 느낌으로 바뀌기도 한다.

 

친구들과의 바닷가 여행에서 친구들은 바다에 몸을 적시며 뛰어 놀고 있는데, 나는 화장 지워지는 것도

싫고, 여벌옷도 없고 해서 물에 안 들어가려고 하다가 친구들이 갑자기 뛰어와 번쩍 들고 바닷가로 집어

던졌다고 해 보자. 만약 마음에서 ‘나는 절대 바다에 들어가지 않을 거야’라고 정해 놓았고, 그 生覺을

포기할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狀況이 화가 나고,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 기왕에 그렇게

된 것, 한 生覺 돌이켜 ‘그래 이렇게 된 거, 친구들과 함께 재미있게 놀며 좋은 추억을 쌓아 보자’라고

生覺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면 그 狀況은 오히려 잘 된 ‘즐거운 느낌’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 生覺

한 마음 差異에 따라 괴로움과 즐거움, 좋은 느낌과 싫은 느낌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生覺에

固執하고 執着하게 되면 괴로움이 될 일도, 生覺 마음에 대한 固執 執着만 내려놓게 된다면 좋은

느낌으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좋은 느낌을 느낄 것인지, 싫은 느낌을 느낄 것인지는 外的인 바깥 狀況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自身의 마음 生覺에 달려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수많은 感情과 느낌들은

固定 不變하는 獨立的인 實體性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던 괴로움의 原因이 ‘受蘊의 괴로움’으로 판명 났다면, 이제 受蘊無我의

思惟를 通해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 괴로움을 實體的인 것으로 錯覺하기 때문에

受蘊의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니, 그 괴로움의 原因인 느낌, 感情이 固定된 實體가 아니며 언제든

마음을 바꿈으로써 싫은 느낌을 좋은 느낌으로 바꿀 수 있음을 깨닫는다면 그 괴로움에서 언제든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두루뭉실하게 막연히 괴롭다고 느끼지만 말고, 그 ‘괴로운 나’를 五蘊으로 解體하여

思惟해 보면 조금 더 쉽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와 같이 受蘊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올라오는 느낌 感情을 解釋하거나 分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느낌 感情을 알아차리는 受念處의 修行이 必要하다. 쉽게 말하면 受念處란

 ‘느낌 觀察’이다. 올라오는 느낌을 있는 그대로 觀察하기만 하여도 그 느낌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想蘊의 괴로움

 

또한 ‘想蘊의 괴로움’도 있다. 生覺, 思惟, 思考, 槪念, 觀念的인 괴로움이다. 受蘊의 괴로움이 感情的,

情緖的인 괴로움이라면, 想蘊의 괴로움은 知性的, 觀念的인 괴로움이다. 對相에 대해서 過去에 어떤

表象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對相이 過去의 經驗된 情報를 通해 어떤 記憶으로 마음 속 潛在意識

속에 자리잡고 있느냐에 따라 그 對相은 괴롭게도 즐겁게도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過去에 미인을 사귀다가 그녀가 바람을 피워 헤어진 經驗이 있거나, 그런 經驗이 두 세 번

계속되었다면 그 사람의 表象, 記憶 속에는 ‘예쁜 사람은 바람을 피운다’는 生覺이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러면 훗날 다시 예쁜 여인을 사귀게 되더라도 마음은 不安하고, 바람 피우거나, 떠나가게 될까봐

근심 걱정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심지어 過度한 執着으로 相對方을 스토킹처럼 따라붙거나, 結婚을

하게되더라도 疑妻症에 걸리게 될 수도 있다. 스스로도 스토킹을 하거나 疑妻症인 自身이 싫어지고

괴롭지만, 過去 表象 記憶의 觀念 때문에 自身도 어쩔 수 없다. 이것이 바로 想蘊의 괴로움이다.

 

비슷하게 어릴적에 버림 받은 記憶이 있는 사람은 社會生活을 하면서도, 結婚生活을 하면서도 마음

속에는 恒常 ‘버림받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운  마음이 觀念 속에 자리잡게 된다. 버림받을까봐 두렵고

괴로운 마음 生覺 때문에 사람 사귀는 것을 어려워하고, 심지어 對人關係 기피증에 걸릴 수도 있다.

이 또한 想蘊의 괴로움이다. 어릴적 상처나 트라우마로 인한 괴로움도 ‘想蘊의 괴로움’의 일종이다.

 

예를 들어 ‘나는 運動神經이 없어’, ‘나는 美術에는 素質이 없어’,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만 서면 떨려’,

 ‘나는 축구는 못해’, ‘나는 영어를 못해’, ‘나는 능력이 없어’ 등의 生覺들 또한 스스로 過去의 經驗을

通해 만들어 놓은 觀念 妄想 煩惱 分別心일 뿐이다. 많은 사람 앞에서 발표를 하다가 망신을 당했던

經驗이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나는 사람들 앞에서는 말을 잘 못한다’는 生覺의 굴레, 觀念에 사로

잡힐 것이고, 그런 機會가 생기면 괴로울 것이다. 大衆 앞에 나서는 직업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을지

모른다. 이게 다 想蘊 때문이다. 그러나 想蘊은 固定된 實體가 아니다. 언제든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실제 불교 수련회에서 사람들 앞에만 서면 떨려서 말을 할 수 없다는 학생에게 소그룹 토의와 발표를

시키고 모두 함께 매우 크게 칭찬해 주었더니, 스스로 매우 뿌듯해 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발표

이후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을 서슴 없이 잘 하더니, 마지막날 회향 마음나누기를

하는데, 자신은 이번 수련대회를 통해 사람들 앞에 나서는데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런 想蘊의 生覺 觀念들은 언제든 바꾸고 變化해 가는 것이지, 固定된 實體가 아닌 것이다.

 

필자는 어릴적 외할머님께서 침을 잘 놓기로 유명한 분이셨다. 조금만 아프거나 삐고 다치면 어김없이

외할머님께 끌려가듯 가서는 엄청 큰 침을 맞아야 했다. 그 어린 아이가 얼마나 아팠는지 그 이후로는

침을 맞거나 주사를 맞는 것에 대한 공포가 계속 상온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심지어 초등학교 때 한

번은 손가락을 스스로 찔러 피를 내는 무슨 실험을 한 적이 있었는데, 다른 아이들은 다 잘 했지만,

나는 겨우 찔러 피를 내고 나서는 온몸에 식은 땀이 흐르고, 쓰러질 것만 같은 오한을 느낀 적도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다 잘도 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두려워하는지에 대해 그 때만 해도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바로 이것이 表象作用 卽, 想蘊의 괴로움이다.

 

그러면 이러한 想蘊의 괴로움은 固定된 實體的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한번 記憶의 表象 속에 담겨

있으면 그것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記憶의 聯想作用을 일으켜 持續的으로 괴로움을 가져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어느 날 침을 맞는 것에 대해 깊이 사유해 보았고, 그것이 내 생각 속에서, 표상과 기억

속에서 그렇게 만들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 이후부터는 스스로 외할머님을 찾아가 아주 큰 동침도

가만히 관찰하며 곧잘 맞게 되었다. 침이나 주사만 보면 깜짝 놀라던 기억의 표상이 뒤바뀐 것이다.

초등학교 때는 침이나 주사가 아프다는 생각이 있다보니, 주사 맞는 날은 학교도 가기 싫을 정도였지만,

그런 생각이 변하고 났더니 침 맞는 것이 아프기는커녕 요즘에는 스스로도 간단한 침을 놓기도 할 정도가

되었다.

 

이처럼 想蘊, 즉 生覺과 表象은 固定된 것이 아니기에 늘 바뀐다.

實體的인 觀念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고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당신이 괴롭다고 했을 때, 그 괴로움의 原因을 色受想行識 중 어떤 것인지 解體해서 살펴보았고,

그 결과 想蘊 때문에, 觀念 때문에, 生覺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면, 그 想蘊이 절대적으로

결코 바뀔 수 없는 固定된 實體인지를 思惟해 보라. 그렇지 않음을 발견할 것이다. 내 意識 안에서 스스로

그렇다고 生覺하고, 觀念지은 채, 그 生覺 觀念 속에 사로잡혀 점점 더 그 生覺 觀念을 强化시켜왔음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眞實은 그 어떤 固定된 것 같은 生覺이나 觀念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固定化된 生覺, 觀念, 偏見, 價値觀 등이 절대로 바뀔 수 없다고 生覺하거나, 자신의 生覺을 유연하게

變化시킬 生覺은 못한 채 어떤 한 가지 生覺 價値觀, 先入見, 觀念, 見解에 사로잡혀 있게 된다면 점점 더

想蘊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질 것이다. 想蘊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가슴을 활짝 열고, 固定化되

觀念 生覺 價値觀 正體性 偏見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思考를 유연하게 열어 두고, 그 어떤 生覺이나

觀念도 열린 마음으로 受容할 準備가 되어 있다면 想蘊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가 한결 수월해 질 것이다.

 

想蘊의 괴로움에 쉽게 빠지거나,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나는 옳다’는 生覺에 대한 固執이 센 사람이다.

‘나는 옳다’는 生覺이 곧 固定된 觀念, 先入見, 偏見, 固執에 사로잡힌 虛妄한 妄想이며, 이런 사람일수록

‘想蘊의 괴로움’에 많이 露出되기 쉽다.

 

그러나 想蘊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의 種類와 强度는 훨씬 가벼워질 것이고,

괴로움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想蘊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方法은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이는 것과, ‘나는 옳다’는 生覺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 固定化된 生覺, 觀念, 先入見, 偏見, 固執, 妄想을 내려 놓는 것, 生覺 妄想이

올라올 때는 잘 觀察하는 것, 過去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治癒하는 것 등이 있을 수 있다.

 

 

 

 

行蘊의 괴로움

 

‘행온의 괴로움’은 特定한 意圖를 固執하게 될 때 그로 因해 괴로운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적어도

서울대 정도를 가야 한다고 執着하는 사람이라면 그보다 못한 대학에 갔을 때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스스로 만들어 낸 行蘊의 괴로움일 뿐이다. 즉 내가 스스로 ‘서울대’라는 生覺과 目標에

執着하고 있었기 때문에 괴로운 것일 뿐이다. 그러나 서울대가 아닌 다른 수많은 대학에 간 사람들이

다 괴로워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내 意識 스스로 만들어 놓은 ‘意圖’에 내 生覺 마음 意識이 固執

하고 執着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일 뿐이다. 이처럼 行蘊, 卽, 어떤 意圖에 대한 마음의 執着과 固執이

있을 때 괴롭다. 이것이 바로 行蘊의 괴로움이다.

 

반드시 진급해야 한다는 意圖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이라면, 진급에서 떨어졌을 때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크게 괴로울 것이다. 어떤 특정한 여인과 반드시 결혼해야 겠다는 意圖에 대한 집착이

크면 클수록 그 여인과 결혼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마음의 괴로움도 커지기 마련이다.

 

이처럼 무엇이든 特定한 意圖에 執着하거나, 어떤 바람에 대해 欲望하게 된다면

그것이 成事되지 않았을 때 괴롭다. 이러한 괴로움이 바로 ‘行蘊의 괴로움’이다.

 

그러나 行蘊 또한 다른 蘊들과 마찬가지로 固定 不變하는 獨立的인 實體性이 있는 괴로움이 아니다.

單純히 意圖에 대해 집착했기 때문에 괴롭다면, 그 意圖를 내려놓음으로써 行蘊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공무원 시험에서 떨어졌다면 그것은 단지 둘 중 하나의 可能性을 의미할 뿐이다. 공무원이 되거나,

다른 직업을 찾거나 하는 두 가지 可能性 중에 ‘다른 직업을 찾는 것’으로 선명해졌음을 의미한다.

分別없이 바라보면 그렇게 單純한 事實이지만, 사람들은 공무원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意圖에 執着

함으로써 공무원 시험에서 떨어졌다는 그 單純한 사실에 ‘실패한 인생’이라거나, ‘난 능력이 없다’거나,

‘나는 패배자’라거나 하는 등의 온갖 解釋을 갖다 붙인다. 공무원 시험에 떨어졌거나, 승진에서 탈락

했다는 것은 單純한 하나의 中立的인 事實을 의미할 뿐, 그것이 ‘능력이 없다’거나, ‘실패한 인생’임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幻想 같은 내 生覺 妄想 分別心이 내린 解釋일 뿐, 眞實이 아니다.

 

이처럼 한 가지 意圖에 過度하게 執着하게 되면, 그것 以外의 다른 意圖나 可能性은 價値를 喪失하게

된다. 意圖 卽, 行蘊에서 自由로운 사람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이 회사에 취직해도 좋고 저 회사에

취직해도 좋다. 공무원도 좋고 군인도 좋으며 회사원도 좋고 자영업도 좋다. 모든 직업에 대해 활짝 열린

가슴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기에, 그 사람 앞에는 宇宙法界의 無限한 能力의 可能性이 펼쳐진다.

 

그러나 한 가지 特定한 意圖에만 집착하고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그것 아니면 절대 안 되는 줄 알고,

그것을 못 하면 실패한 인생으로 낙인찍기를 서슴치 않는다. 이것이 바로 行蘊의 괴로움이며, 行蘊에

집착하는데서 오는 어리석음이다.

 

行蘊은 無我, 空이다. 어떤 意圖일지라도 내 意識 스스로 그 意圖에 집착함으로써 괴로워질 뿐이지,

本來부터 이것만이 절대적으로 옳은 意圖는 없다.

 

휴가를 산으로 가도 좋고 바다로 가도 좋은 사람은 어느 곳으로 가든 상관이 없다.

그로 인해 괴로울 일이 없다. 그러나 절대 나는 산은 싫고 바다만 좋다고 고집하게 되면,

산으로 가게 되었을 때 괴롭다.

 

만약 당신이 괴로움에 빠져 있다면, 그것이 色受想行識 중 어느 要素로 因해 괴로운 것인지를 살펴보라.

만약 그 괴로움이 당신의 特定한 意圖에 대한 고집에서 온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行蘊의 괴로움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行蘊은 곧 無我, 空임을 思惟해 볼 수 있다. 내 意圖에 내 스스로 얼마나 집착하고

있었으며, 그 집착은 과연 절대 버릴 수 없는 것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意圖가 아닌 다른 意圖를 選擇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 대학이 아닌 다른 대학, 이 회사가 아닌 다른

회사, 이런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 이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는 것에 대해 마음을 열어 볼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다. 우리는 수없이 다양한 무수한 방식을 향해 마음을 열어 둘 수도 있다. 이 길이 아니면

다른 길을 찾을 수도 있고, 이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에 도전해 볼 수도 있으며, 이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없는데, 절대적으로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고집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識蘊의 괴로움

 

識蘊의 괴로움은 分別과 認識에서 생겨나는 괴로움이다. 있는 그대로의 對相을 있는 그대로 認識하면

괴로울 일이 없다. 그러나 지금 여기 있는 對相을 굳이 다른 것과 比較하고 分別해서 差別心으로 認識해서

알게되면 그 認識 알음알이 識에는 좋고 싫음, 열등 우월이라는 나누고 分別하는 마음이 생겨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괴로움이 생겨난다.

 

스님들의 법문에 ‘分別하지 말라’,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고 하는 것은, 分別하고  認識해서 알게 될 때

괴로운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對相을 分別한다는 것은 곧 지금 여기 있는 對相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生覺의 틀 굴레에 걸러서 歪曲해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識蘊은 受蘊과 想蘊의

도움으로 行蘊이 지어 만들어낸 世上을 歪曲하고 分別해서 識蘊의 識대로 認識한다.

 

그런데 受蘊, 想蘊, 行蘊 自體가 無我, 空으로써 固定不變하는 獨立的인 實體가 없는 것이고, 歪曲되기

쉬운 데이터이기 때문에, 當然히 識蘊 또한 歪曲 分別하여 對想을 認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눈귀코혀몸뜻이 接觸하는 色聲香味觸法, 모든 對相을 識이 分別하여 認識한다. 예를 들면 눈으로

장미꽃을 볼 때 강렬한 아름다움으로 分別하여 認識한다. 물론 거기에는 想蘊의 도움을 받아 過去에

보았던 다양한 꽃들과 比較, 對照해 본 뒤에 이 정도면 다른 꽃들에 비해 강렬한 색감을 띈 꽃이라고

분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빠알간 장미꽃에 비해 진달래꽃은 덜 아름답다고 인식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인식은 진실일까? 어떤 사람은 진달래꽃을 장미꽃보다 덜 아름답다고 인식할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사람은 너무 강렬한 색감을 가진 장미꽃보다 오히려 자연 속에서 은은하게

피어난 진달래꽃을 더욱 아름답게 認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떻게 認識하느냐는 이처럼 사람에 따라 다를 수가 있는 것이다. 어떤 分別心이 더 옳거나 틀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分別하여 認識하는 것만이 옳다고 집착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의

認識과 달라 意見 對立이 생겨날 수도 있다.

 

불교신자는 불교나 사찰에 대해 좋은 느낌과 좋은 생각을 가지기에 불교라는 종교를 ‘지혜로운 종교’로

자신의 마음 속에 造作해 만들어낸다. 그 사람의 行蘊은 마음 속에서 불교를 지혜로운 종교로 만들어

내었고, 그렇게 내 안에서 만들어진 불교라는 지혜로운 종교를 識蘊은 ‘불교’라는 이름으로 認識하거나,

혹은 사찰, 불상, 대웅전, 팔만대장경 등의 形態를 부여하여 認識하게 된다. 名色으로 認識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 매우 배타적인 타종교 신자라면, 불교를 ‘어리석은 종교’, ‘쓸모없는 종교’로 인식할 수도

있다. 그 두 사람의 불교에 대한 인식은 전혀 다른 것이다. 수온과 상온과 행온 모두가 다를 수밖에 없다.

불교를 좋은 느낌으로 느끼고 좋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싫은 느낌으로 느끼고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좋게 느끼고 생각해서 절에 자주 가는 업행을 일으킬 수도 있고, 나쁘게 느끼고 생각해서 절

근처에도 가지 않기도 할 것이다.

 

만약 불교를 나쁘게 인식하거나, 심지어 마귀의 종교라고 여기고, 근처에 가까이도 가기 싫어하면서,

절에 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죄를 짓는다고 인식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회사에서 야유회를 사찰로

갈 때 이 사람은 불편함을 넘어 괴로운 마음을 느낄 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식온의 괴로움이다.

 

즉 내가 어떻게 분별하여 인식하느냐에 따라 ‘있는 그대로의 중립적 대상’이 싫게 느껴지거나,

좋게 느껴지고, 그 대상이 즐거움을 주거나, 불행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識蘊을 보통 ‘마음’이라고 한다고 했는데, 그야말로 어떻게 마음 쓰느냐에 따라, 어떻게 認識하느냐에

따라 동일한 상황, 동일한 대상, 동일한 사람, 동일한 행동이 괴로울 수도 있고, 즐거울 수도 있는 것이다.

 

직장에서 어떤 어려운 일을 시킬 때, 어떤 사람은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이 일을 통해

나의 능력을 발휘하고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길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은 그 일이

너무 싫고 괴로워서 몇 날 며칠이고 괴로워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차라리 퇴사를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군에서는 전 세계 곳곳의 준 전시 상황인 나라에 파병을 많이 나간다. 美軍 軍宗牧使와 대화를 나누어

보았는데, 미군 장교들은 전시 상황의 나라에 파병을 가면 자칫 죽을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기회로 삼고 스스로 선택해 전시인 곳에 자원해 가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그것을 통해 명예를

드높이고 진급도 할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고, 사랑하는

가족과 절대 헤어지기 싫거나, 전시 상황이라면 끔찍이도 싫어하는 사람일 경우라면, 파병을 간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죽을 것처럼 괴롭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狀況, 條件에 대해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分別하며, 어떻게 認識하느냐에 따라

이처럼 同一한 狀況도 幸福의 조건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不幸의 조건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만약에 내가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 단순히 나의 分別心으로 인한 것이라면, 우리는 무조건 그 상황에서

절망에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나의 認識과 分別을 바꿈으로써 새로운 可能性으로 轉換될 수 있음을

열린 마음으로 사유해 볼 수 있어야 한다. 分別心을 내려 놓으면, 혹은 그 대상에 대한 認識을 바꾸면

最惡의 狀況이 오히려 最善의 機會가 될 수도 있고, 不幸한 狀況이 幸福으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世上은 생각 마음에 따라 地獄이 되기도 하고 極樂이 되기도 한다. 分別心과 認識에 따라

同一한 狀況 條件도 다르게 느껴진다. 이러한 理致를 바르게 볼 수 있다면, 世上을 탓하기 보다는

內面으로 들어가 나의 分別心과 認識을 바꿈으로써 不幸을 幸福으로 變化시킬 수 있을 것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五蘊冥想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가 괴롭다고 느낄 때, 그 괴로움을 가만히 五蘊으로 解體하여

思惟해 보게 되면 五蘊 중 어느 要素 때문에 괴로운지가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보통 괴로울 때,

‘아! 괴롭다’라고만 느끼지, 五蘊 中에 어느 要素가 괴로운지에 대해, 그 原因을 解體하여 살펴

보려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五蘊을 工夫한 修行者라면 이제부터 ‘괴로움에서 해탈하는

五蘊冥想’을 통해 괴로움의 要素를 解體해서 分析해 보고, 그 하나 하나의 괴로움의 要素들이

固定不變하는 獨立的인 實體가 아닌 空한 無我임을 思惟함으로써 五蘊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괴로울 때, 五蘊 중 어떤 要素가 괴로운 것인가를 解體해서 살펴보고, 그것이 텅~빈 空, 無我임을

알게 된다면, 지금 내가 느끼는 괴로움도 固定된 實體가 아니며, 반드시 괴로워해야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괴로움이 올 때마다, 五蘊 中 어느 要素가 괴로운지를 살펴,

그것이 無我, 空함을 사유해 보라. 이것이 바로 ‘苦(괴로음)을 消滅하는 五蘊冥想’이다.

 

예를 들어 보자.

직장 상사가 그런 일 하나 제대로 못 하느냐고 부하직원들 보는 앞에서 나에게 화를 내고 갔다.

부하직원들 앞에서 상사에게 辱을 얻어 먹고 괴롭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괴로워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 괴로움을 解決해야 한다. 五蘊冥想으로 解決해 보자.

이것은 五蘊 중 어떤 要素가 괴로운 것일까? 물론 이런 경우에 受蘊도 괴롭고, 想蘊도 괴롭고,

行蘊도 괴롭고, 識蘊도 괴롭다. 그런데 가장 크고 강하게 괴로워 하는 것은 아마도 行蘊일 것이다.

보통 行蘊이 原因인 경우가 가장 크고, 그 다음으로 受蘊, 想蘊이 뒤따르며, 識蘊은 다만 總體的인

認識論的 괴로움으로 바탕에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 意志的 괴로움이 가장 크고, 感情的 괴로움과

思惟的 괴로움이 意圖的 괴로움의 基盤 土臺를 提供하며, 總體的으로 認識論的 괴로움이 배경에

깔리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삶을 造作해서 만들어내는 것은

行蘊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어떤 意持가 있을까? 남들 앞에서 그것도 부하직원 앞에서 상사에게 욕을 얻어 먹고 싶지

않은 欲求가 있다. 稱讚받고 싶고 認定받고 싶은 欲求와 意圖가 있는 것이다. 그 意志와 欲求가 깨어

지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行蘊의 괴로움이다. 그 行蘊의 괴로움으로 因해 感情的으로도 마음이

傷하고, 生覺하면 生覺할수록 직장상사가 밉고 怨望스럽다. 이런 方式으로 行蘊이‘인정받지 못한 나’,

‘부하들 앞에서 창피한 나’, ‘일도 제대로 못하는 나’, ‘욕 얻어 먹어 괴로운 나’를 造作해 내고,

識蘊은 축 쳐져 있고 부끄럽고 창피한 나를 認識하게 된다. 이 때 受蘊과 想蘊은 함께 循環的으로

괴로움을 增幅시키는 되먹임 作用을 한다. 이때 想蘊은 온갖 것들을 想像해낸다.두 번째 화살, 세 번째

화살을 계속 맞는 것이다. ‘그 상사는 나를 근본적으로 싫어하나봐’, ‘나를 미워하는게 틀림없어’,

 ‘그 상사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상사들이 다 나를 싫어하는게 아닐까?’, ‘이번 승진시험에서 떨어질게

분명해’, ‘부하직원들은 속으로 나를 능력없는 상사라고 욕하겠지’, ‘이러다 회사에서 짤리면 뭐해 먹고

살지’, ‘자식 학비 벌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차라리 죽는게 낫겠어’ 이런 식으로 상온은 끊임없이

괴로움을 양산해 내는 것이다.

 

事實 現實은 單純히 직장 상사가 나에게 일을 못 한다고 한 마디 한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괴로운’

狀況이 아니라, 어느 회사에서든 ‘그럴 수도 있는’ 普遍的인 狀況이다. 그 狀況을 가지고 괴로워할

것인지, 그저 가볍게 넘길 것인지는 전적으로 내가 選擇하는 것일 뿐이다. 어느 회사에도 이런 일은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큰 괴로운 일이 되는 이유는 바로 五蘊을 ‘나’로 錯覺했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 상처받은 나, 능력도 없는 나, 인정도 못 받는 나 등 감정적인 受蘊의 괴로움, 생각이

만들어낸 想蘊의 괴로움, 특정 의도와 욕구를 나라고 생각하는 行蘊의 괴로움 등을 느끼는 존재를

‘나’로 錯覺한데서 오는 것이다. 즉 五蘊無我, 五蘊皆空을 모르고, 五蘊이 바로 ‘나’라고 生覺하면

受想行識이 만들어내는 心理的인 모든 것이 ‘나의 괴로움’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 하나 살펴보면 모두 空하고 텅~비어 固定不變하는 獨立的인 實體가

없는 것이다. 칭찬 받고, 인정 받고자 하는 意圖를 내려 놓고, 살다보면 辱도 얻어 먹을 수 있고,

非判 받을 수도 있음을 겸허히 인정하고 수용하게 된다면, 意志와 欲求에서 오는 行蘊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큰 사람일수록 行蘊의 괴로움이 크지만, 그 욕구를

내려 놓을수록 行蘊의 괴로움은 가벼워지는 것이다. 욕을 얻어 먹을 때의 마음 상한 느낌 또한 그

느낌이 ‘나’라고 同一視하지 않은 채, 그 瞬間 있는 그대로 올라오는 느낌과 感情을 가만히 觀察하고

알아차려 보게 된다면 그 느낌으로 인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끊임없이 올라오는 生覺들을

있는 그대로 觀察하면서, 그 生覺에 힘을 실어 주지 않고, 그 生覺을 계속해서 增幅시키지 않게 된다면,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을뿐더러, 그 生覺은 實體가 없이 그저 올라오는 에너지일 뿐임을 觀察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思念處 혹은 위빠사나라고 알려진 佛敎 冥想의 核心, 觀 修行이다.

五蘊을 觀察하는 것이 바로 五蘊冥想이다.

 

이처럼 어떤 괴로운 狀況 自體를 五蘊의 各各 要素로 解體하고 分釋해서 思惟해 보게 되면,

五蘊의 괴로움에서 점차 벗어나기 쉬워진다.

 

다른 比喩를 하나 더 들어보자.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이제 그만 만나자고, 사랑하는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離別을 고했다. 몇 날 며칠이고 괴로움에 아무리 전화를 걸어 봐도, 전화도 받지 않고,

집도 이사를 가 버렸다. 이 괴로움은 五蘊 中 어떤 要素가 괴로운 것일까? 

가장 크게 괴로워하는  것은 行蘊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고, 사귀고 싶은 意圖, 意志가

꺾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瞬間, 우리는 그 意志를 절대 포기할 수 없을거라는 마음에 사로잡히게

된다. 절대 이 여자 아니면 안 될 것 같다. 결코 이 여자를 포기할 수 없다. 그것은 行蘊이 텅~빈 空,

無我인 줄 모르고, 固定不變하는 獨立的인 實體가 아닌 行蘊에 사로잡혀 執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여자와 사귀어야 한다, 내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허망한 意圖 欲求 意志를 固執하는 것이다.

 

그러나 行蘊無我, 行蘊卽空의 가르침에 의한다면, 意志作用은 언제고 변하고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이 여인을 사랑하다가도 다른 여인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다. 지금은 내가 이 여자 아니면 절대 안

될 것 같은 行蘊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것이 絶對的인 마음이 아님을 사유해 보라. 意圖 意志 欲求는

내 意識 스스로 만들어 낸 固定不變하는 獨者的인 實體가 없는 意志作用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여인 가운데, 어떤 특정한 여인이 결정코, 절대적으로 내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결정론은 없지 않은가? 그런 生覺 意圖는 내 意識 스스로 그렇게 意志로써 만들어낸 虛妄한 生覺,

幻想일 뿐이다. 내 意識 스스로 만들어 내어 내 意識 스스로 幻想 거기에 빠지게 된 것일 뿐이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그 여인이 나를 버리고 바람이 났기 때문에 그 여인이 가장 큰 문제라고 여기겠지만,

事實은 그것 보다 더 큰 이유는, 내가 그 여인은 바람 나면 절대로 안 된다고 生覺했고, 그 여인이 내 사랑이

되어야 한다고 고집했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사랑이란 이처럼 언제나 變할 수 있다. 이 世上에 變하지

않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이 세상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크게 본다면 사랑하다 헤어지는 것은 普遍的인

일이지, 特別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바로 그 普遍的이고 自然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普遍的이라고 보지 않고, 그럴 수도 있다고 보지 않고, 남들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만, 결코 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스스로 生覺하고 그 生覺으로

인한 固執때문에 狀況이 지금 나에게 특별히 괴로운 상황이 된 것은 아닌지 사유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과거에 그녀와 사랑했고 달콤했던 느낌들을 떠올리며 지금의 괴로운 느낌으로 인해 괴롭다.

또한 生覺은 ‘예전에도 나를 속이고 계속 그놈과 만났던 건 아닐까’, ‘지금 둘이 동거를 하는 건 아닐까’,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는 사람인가’, ‘나를 완전히 무시하는군’,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나’ 등등

끊임없이 生覺을 만들어냄으로써 더욱 더 괴로움은 증폭되어져 간다.

 

여기에서 바로 五蘊觀察의 冥想 修行이 必要해 지는 지점이다. 그런 괴로운 느낌 感情을 있는 그대로

觀察하고, 끊임없이 올라오는 生覺을 觀察하고, 意圖를 觀察하며, 分別心을 觀察하는 것이다. 또한

肉身, 몸에서 어떤 反應이 일어나는지를 觀察하는 것이다. 色受想行識, 卽 몸과 마음(精神 意識)을

全切的으로 아무런 判斷 없이 알아차리고 觀察하는 것만으로도 五蘊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바라보면 사라진다’는 가르침이야말로 불교 명상의 가장 偉大한 智慧다. 五蘊의 괴로움이 일어날 때,

그 일어나는 地點을 分明하게 보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五蘊의 괴로움은 消滅될 수 있다. 

 

[붓다수업] 중에서

 


붓다 수업

저자
법상 지음
출판사
민족사 | 2013-12-13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지금은 붓다 시대. 웰빙, 힐링, 뉴에이지, 영성, 치유,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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