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輪廻 - 中, 現在 삶에 對한 否定이 아닌 肯定의 思惟

장백산-1 2015. 7. 19. 18:05

 

 

 

철학자 이진경 불교를 말하다

 

25. 輪廻 - 中,  現在 삶에 對한 否定이 아닌 肯定의 思惟

 

이진경 교수  |  solaris0@daum.net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알다시피 輪廻의 觀念(槪念)은 佛敎에서 나온 槪念이 아니라 印度의 傳統宗敎에서 나온 觀念이다. 輪廻는

카스트라는 강력한 身分制가 있는 社會에서, 많은 경우 現在의 삶을, 날 때부터 固定된 身分과 職業을 갖고

살아야 하는 理由를 설명해주고, 그것을 참고 견디며 살게 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現在의 네 삶은

過去에 네가 살아온 삶이 만들어낸 것이고, 未來의 네 삶은 지금 네가 사는 삶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 그래야 다음 生을 期約할 수 있을 것이니 말야.’ 原來 ‘意志的 活動’을 뜻하는 ‘業’

이라는 말이 自身이 行爲한 生覺, 말, 行動에 대한 處罰이나 應報처럼 이해된 것은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佛敎서 말하는 輪廻 意味는

前生을 탓하고 다음 生을 기약하며 참고 견디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번 生에서 自身의 삶을 肯定하고 바꾸라는 가르침

 

輪廻하는 生이 무엇보다 ‘苦痛’으로 表象되는 理由는, 그런 설명이 주로 겨냥하고 있는 이들이 現世의 삶을

고통스레 살아야 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苦痛을 직접 설명해주기도 하고, 브라만이나 크샤

트리아 같은 上流層 貴族들의 삶도 알고 보면 苦痛이란 점에서 마찬가지라며 위로를 해주기도 하니까.

‘너희들도 以前엔 우리처럼 이렇게 살았고 다음 生 언젠간 이렇게 살 수 있을 거야’라면서 可能性의 世界로

모든 걸 떠넘길 수 있으니까 참고 견디는 忍苦의 精神을 삶의 肯定이라도 되는 양 誤解해선 곤란하다.

 

니체라면 ‘낙타의 精神’을 가르치고 있다고 批判했을 이 敎說에 대해, 이 世上 모든 것은 緣起的 條件 卽,

因緣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으니, 現在의 삶 또한 그때그때의 緣起的 條件 속에서 自身의 삶을 어떻게

現行化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說했던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革命’이란 말에 값한다고 할 것이다.

前生을 탓하고 다음 生을 기약하며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라는 宣告(sentence, 문장)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肯定할 만한 삶을 살라는, 그런 能力을 만들어가라는 提案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니까. 이 경우에서

解脫이란 宿業에 따른 輪廻로부터의 離脫만이 아니라, 業에 예속된 삶으로부터의 ‘解放’이 된다. 삶으로부

터의 ‘解放’이 아니라 삶 안에서의 解放이 解脫이란 좋은 삶을 위한 解放인 것이다.

 

그럼에도 經典에서 읽게 되는 석가모니의 說法에는 輪廻에 대한 얘기, 그로부터의 解脫이라는 얘기가 反復

하여 等場한다. 그것은 아마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期待고 있는 緣起的 條件이 바로 輪廻와 解脫이었기 때문

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輪廻의 苦痛, 죽어도 죽지 못하는 苦痛에 대해 苦心하고 있는 條件에서, 解脫의 可能

性을 輪廻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하는 問題로 던져놓고 思惟하는 條件에서, 衆生의 물음에 應答하려는

 깨달은 자(붓다)의 對答이 어떻게 그런 生覺과 물음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붓다’란 解脫한 삶을 一般化된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주는 者가 아니라, 衆生들이 當面하고 있는 苦痛에서

벗어날 수 있는 出口를 알려주는 者라면, 그들 衆生들이 잠겨 있는 觀念이나 生覺,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물음, 그들의 삶의 條件 속에서 思惟하고 말하고 가르치는 것이 當然하다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輪廻를

벗어날 것을 說하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現世的 삶의 苦痛과 헛됨을 설파하며 그로부터 벗어날 것을 가르

치는 니힐리즘이라고 한다면 아주 큰 誤解라고 할 것이다. 털끝만치 벗어나면 天地間의 差異로 벌어진다는

말이 이런 경우일 것이다. 비슷해 보이지만 아주 다른 것에 속는 것이다.

 

물론 석가모니가 出家하게 된 過程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삶의 苦痛에 대한 自覺이 등장하고, 그로부터 떠

나기 위한 苦行談이 등장하기에 쉽사리 오해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깨달음을 얻기 前에, 解脫한 삶

을 向한 印度의 한 王族의 아들이 던졌던 質問이고, 그런 만큼 當時의 깨인 靈魂을 가진 젊은이들이라면 흔

던졌을 質問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解脫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석가모니의 旅程의 出發

點이었고, 그런 점에서 苦痛과 輪廻로부터의 解脫은 석가모니 自身이 갖고 있던 물음 그 자체였다고 해야

것이다. 석가모니 自身도 그 緣起的 條件 속에서 修行하고 깨우쳐갔던 것일 게다.

 

그런데 알다시피 깨달음을 얻은 以後 석가모니는 ‘苦痛’을 四聖諦의 첫째가는 項目으로 提示한다. 물론

四聖諦는 苦痛, 苦痛의 原因과 苦痛을 消滅하는 方法에 대한 가르침이지만, 苦痛 自體를 ‘성스런 진리’에

담았다는 것은 苦痛에 대한 以前의 통념과는 아주 다른 어떤 思考의 轉換을 表現하고 있다. 苦痛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絶對的 죽음을 通해 벗어나야 할 否定의 對相이 아니라, 聖스런 眞理에 속하는 肯定의 對相

이 된 것이다. 苦痛이 眞理라 함은 단지 그 苦痛이 否定할 수 없는 現實이라는 意味만은 아니다. 그것만으

론 참고 견디라는 忍苦의 精神을 가르치게 된다. 苦痛이 肯定의 對相이 된다 함은 肯定할 適極的 이유가

있을 때에만 可能하다. 이는 苦痛 없이는 解脫을 向한 動因을 얻을 수 없기에 깨달음 또한 얻을 수 없다는

말에서 逆으로 抽論할 수 있다. 苦痛은 깨달음을 向한 旅程의 出發點인 것이다. 苦痛은 또한 苦痛으로부터

배우려고만 한다면, 깨달음을 向한 길을 알려주는 훌륭한 스승이라는 發想, 그럴 때 그 苦痛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의 첫째 關門이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解脫이란 苦痛스런 삶의 바깥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苦痛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는 逆說的 結論을 含縮하고 있다. 알랄라 깔라마와 웃다카 라마풋다 밑에서 수행하여 空無邊處定,

識無邊處定, 無所有處定, 非想非非想處定이라는 禪定의 段階에 到達했지만, 그로부터 나와 다시 삶으로

돌아오면 苦痛과 煩惱가 되돌아옴을 알고는, 四禪定은 解脫의 方法이 될 수 없다는 生覺에서 그들을 떠날

때의 석가모니의 問題意識도 그러하다.

 

색계(色界)를 벗어나고 苦痛스런 삶을 벗어난 別度의 領域으로 들어가 얻는 平安은, 現實 속에서 살아야

하는 衆生들이 苦痛을 벗어날 수 있는 方法이 아닌 것이다. 現實을 벗어난 무색계(無色界)의 禪定은 아무리

높아진다 해도 그것은 現實의 苦痛과 煩惱를 극복하는 길이 아니라 그것을 잠시 避해있는 것일 뿐이다.

 

苦痛스런 現世의 삶을 벗어난 곳에서 平定을 찾는 게 아니라, 그 苦痛스런 삶의 한 가운데에서, 그 苦痛의

理由들이 現存하는 世界 속에서 苦痛을 벗어날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苦痛을 外面하고 苦痛으로부터

도망치는 게 아니라, 苦痛을 차분하게 直視하고 苦痛 그 안에서 그 苦痛을 넘어서는 길을 찾아야 한다. 바로

이것이 석가모니가 새로운 깨달음의 길을 다시 찾아 나선 理由였고, 이것이 佛敎의 가르침을 以前과는 根本

的으로 다른 것이 되게 해준 계기였다.

 

‘彼岸’이라는 말이 야기할 誤解를 넘어서기 위해 彼岸 없는 此岸의 삶에서 깨달음을 얻을 것을 가르치고,

輪廻의 中斷이란 말이 야기할 誤解를 깨기 위해 輪廻 없는 解脫이 아니라, 輪廻하는 삶 속에서 解脫할 것

을 가르쳤던 ‘大乘佛敎’로의 根本的인 轉換은 分明 輪廻 없는 解脫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佛敎‘로부터’ 벗어나는 轉換이 아니라 佛敎 ‘안에서의’ 轉換인 것은, 大乘이 석가모니의 이런 問題

設定 안에서 進行된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煩惱 안에서 얻는 것이며 煩惱와 함께 하는 것이라는 生覺

도, 부처란 衆生과 다른 存在가 아니라 바로 衆生 自身임을 說하는 것도 모두 이와 同一한 脈絡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空은 物質 없는 世界(無色界)에서 얻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物質的인 世界(色界) 그 自體에

恒常 存在하는 것이라는 槪念 또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일 게다.

 

어쩌면 창시자의 말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根本的 轉換을 과감하게 밀고 나갈 수 있었던 勇氣는 매우

놀라운 것이고, 창시자의 문제의식에 비추어 그가 한 말을 재검토하여 비판할 수 있었던 탁월한 능력은 실로

부러운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런 轉換을 통해 現世的 삶을 否定하는 것처럼 誤認될 수도 있던 佛敎의 가르

침은, 苦痛이나 煩惱 없는 깨달음은 없음을 說하고 輪廻하는 現世的 삶과 別個의 解脫이나 極樂 같은 것은

따로 없음을 가르치는 極的인 肯定의 思惟임이 分明해졌다는 事實이다. 여기서 輪廻하는 삶은 떠나야 할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場으로 肯定된다. 그러나 그것은 業이란 이름으로 주어진 것을 참고 견디라는 忍苦의 가르침

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삶을 肯定할 만한 삶으로 바꾸어가라는 가르침으로서 肯定된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02호 / 2015년 7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