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오매일여(寤寐一如)라는 잘못된 妄想

장백산-1 2015. 10. 21. 13:48

 

오매일여(寤寐一如)라는 잘못된 妄想

 

오매일여의 경전상의 근거는 수능엄경(首楞儼經) 10권 상음변마장(想陰變魔障)의

“아난(阿難)아, 저 선남자는 삼매(三摩提)를 닦아서 상온(想蘊)이 다 消滅한 者이다.

이 사람은 平常時에 꿈과 生覺이 消滅하여 자나 깨나 늘 한결같다.

阿難, 彼善男子 修三摩提 想陰盡者. 是人平常 夢想銷滅 寤寐恒一.”라는 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꿈과 生覺이 消滅했다는 말은, 바로 錯覺과 妄想과 生覺으로 헤아리는 是非分別이 사라졌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나 깨나 늘 한결같다는 말은,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똑 같은 상태라는 말이 아니라,

一切가 한 法이어서 자나 깨나 이 한 法의 일일 뿐이라는 事實을 알아, 자느니 깨느니 하는 是非가 없다

는 말이다.

 

간화선(看話禪)을 창시하고 서장(書狀)을 지은 대혜종고(大慧宗杲)스님이

향시랑 백공에게 답하여 쓴 편지가 서장에 기록 되어 있는데

 

“보내신 편지에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 꿈과 깨어 있음이 하나인가?’하셨는데 이것은 한 조각의 因緣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攀緣하는 마음(緣心)으로 法을 들으니 이 法도 반연(攀緣)하는 마음이다.’

고 하시며 ‘至極한 境地에 到達한 사람(至人)은 꿈이 없다.’고 하시니 (이 꿈이 없다는 것은) ‘있다’의 反對의

뜻인 ‘없다’가 아니니, 말하자면 꿈과 꿈 아님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示諭에 悟與未悟와 夢與覺이 一인가 하온데 一段因緣입니다 黃面老子가 云하되

汝以緣心으로 聽法하니 此法도 緣心이니라 하시고 謂至人은 無夢이니라 하시니

非有無之無니 謂夢與非夢이 一입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부처님께서

“너는 반연하는 마음(緣心)으로 법을 들으니 이 法도 반연(攀緣)하는 마음이다.”

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是非 分別하는 네 마음이 짓고 있다는 말이다.

 


본문에 나오는 연심(緣心)은 因緣을 따라다니는 마음으로, 반연(攀緣)하는 마음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攀緣의 本來 뜻은 ‘客觀의 事物에 依持함.’ 또는 ‘原因을 도와서 結果를 맺게 함.’이고,

사전적인 뜻은 ‘어떤 사물을 끌어 잡고 의지하여 기어 올라감.’ 또는 ‘세력 있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거나

연줄로 삼음. 또는 그 연줄.’이라는 뜻이다. 이 뜻들을 합쳐 보면, 結局은 사람이 ‘因緣되는 바깥 對相에

依持한다.’는 뜻이며, 또, 천목중봉(天目中峰)선사가 지은 산방야화(山房夜話)에 보면

 

“달마스님이 제자 신광(神光)스님을 가르칠 때에,

‘밖으로는 모든 반연을 끊고, 안으로는 마음의 헐떡임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올바른

방법을 찾은 것이니라.’라고 했을 뿐, 그 밖에 다른 말을 하셨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라고 한 말이 있는데  여기서 달마조사(達摩祖師)가 신광(神光)에게

‘밖으로는 모든 반연을 끊고, 안으로는 마음의 헐떡임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올바른

방법을 찾은 것이니라.’한 말의 뜻을 보면, 結局 攀緣이란 對相과 境界에 끌려다니는 것을 뜻한다.

(* 신광은 제 2조 혜가선사(慧可祖師)가 달마조사의 제자가 되기 전의 이름)

 

事實은 유정(有情)으로 生覺을 가진 存在를 除外한 萬法은 어떤 것도 이 한 法의 性稟을 여의지

않아서 是非와 分別이 없다. 유정(有情)의 존재 중에서도, 特히 人間의 生覺은 ‘나’라는 한 生覺

때문에 ‘너’라는 相對를 만들고는 相對的인 二分法으로 是非와 分別하는 마음에 물들어 있다.

그래서 對相 境界는 우리에 대해서 어떤 是非도 걸지 않는데, 사람의 生覺이 스스로 是非를 하며

對相 境界가 自身을 어떻게 하려 한다고 錯覺을 하고는, 대상과 경계 때문에 좋은 일이 생기거나

나쁜 일이 생긴다는 虛妄한 妄想을 지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대상과 경계는 인연에 따라 거기에 있을 뿐, 어떤 시비도 하지 않는다. 오직 人間의 生覺이

잣대를 만들어 世上, 對相 境界를 自己 마음에 들게 하려 하니, 그저 因緣에 따라서 있는 것이, 因緣

따라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건드린다고 錯覺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錯覺과 妄想이 바로 攀緣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너는 반연하는 마음(緣心)으로 法을 들으니 이 法도 반연(攀緣)하는 마음이다.”

라는 말도, 사람이 스스로 自己 生覺의 잣대를 가지고 世上을 보니, 法이 本來 法이 아니라,

사람의 시비 분별하는 마음처럼 世上이 나에게 시비와 분별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하지만, 대혜종고 스님의 편지에 있는 ‘지극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至人)은 꿈이 없다.’고 한, 부처님의

말씀에서 지인(至人)은 境地에 오른 사람으로 이 한 法을 깨달아 이 자리가 분명한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사람은 시비와 분별이 떨어진 사람이니, 一切를 오직 한 法으로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극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至人)은 꿈이 없다.’는 말은, 대혜종고 스님의 그 다음 말인

"(꿈이 없다는 것은) ‘있다’의 반대의 뜻인 ‘없다’가 아니니, 말하자면 꿈과 꿈 아님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는 말과 수능엄경에서 "이 사람은 평상시에 꿈과 생각이 소멸하여 자나 깨나 늘 한결같다." 고 하는 것

처럼,

 

즉, 대혜종고 스님의 ‘없다’는 것은, ‘있다’의 相對的인 槪念인 ‘없다’가 아니라,

一切가 오직 이 한 法이고 萬法이 이 한 法에 依해서 생기고 變하고 흘러가기 때문에,

‘있어도 이 한 法’이고, ‘없어도 이 한 法’이어서 ‘있고 없음’이 모두 이 한 法이니,

 ‘있다 없다’하는 것 그 自體가 없다는 뜻이고, 그러니 수능엄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깨달음을 이뤄 ‘지극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일체를 한 법으로 보고 시비 분별이 사라져,

實相을 보는 부처의 눈(佛眼)을 가졌기 때문에 ‘꿈이니 꿈이 아니니’, ‘자느니 깨어 있느니’

하는 시비 분별하는 마음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꿈이 없다.’다시 말하지만, 그리고

앞으로 모든 사람들이 이 法을 깨달을 때까지 끊임없이 말하겠지만, 이 世上 萬法이 이렇게

각양각색으로 흐드러지게 펼쳐져 있어도, 이 모든 것이 오직 이 한 法이 건립(建立)하여 運用하니,

一切가 모두 오직 이 한 法뿐이요, 이 한 法의 일일 뿐이다. 그래서 꿈이라 해도 이 한 法이요, 꿈이

아니라 해도 이 한 法이니, 꿈과 꿈 아님이 모두 이 한 法인 것이다.


선요(禪要)를 지은 남송(南宋) 말기(末期)의 고봉원묘(高峰原妙)선사는 15세에 출가하여 24세 때에,

초견성(初見性)을 하고는 천녕사(天寧寺)로 가서 설암조흠(雪巖祖欽)선사를 시봉하고 그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5년 후인 29세가 되던 어느 날 설암선사가 고봉을 불러서

“너는 날마다 일상사에서 주재(主宰)가 되느냐?”하는 말에 “네, 주재가 됩니다.” 하고 대답하고,

또 설암선사가 “잠잘 때에도 主宰가 되느냐?”하니 또, “네. 주재가 됩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설암선사가 “그럼 꿈도 없고 생각도 없고 보지도 듣지도 못할 때에도 主宰가 되느냐?”

하고 묻는 말에 콱 막혔다.

 

主宰란 日常事에 自身의 主人公이 되어 自由自在로 살아가는 것이어서, 주재자와 주재되는 대상이

있어야  주재를 할 수 있는데, 꿈도 없고 생각도 없고 보지도 듣지도 못할 때에는 주재의 대상을 알

수가 없으니 어떻게 주재를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고봉선사는 그곳을 떠나 용수사로 가서는 5년을 끙끙거리다가, 어느 날 밤, 道伴이

자다가 몸부림치며 목침을 떨어뜨리는 소리에 홀연히 가슴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는

 

사주(泗州)의 대성인(大聖人) 친견한 듯하고         如泗州見大聖

먼 길 갔던 객이 고향에 돌아온 것 같네                遠客還故鄕

다만 원래 옛날 그때의 그 사람일 뿐                    元來只是舊時人

옛날 그때 밟고 다니던 자리를 떠난 적이 없도다   不改舊時行履處 라는 오도송을 읊었다.

 

고봉선사가 설암선사의 물음에 말이 막힌 것은 主宰者가 自身이라고 生覺을 했기 때문이다. 

즉,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너는 반연하는 마음(緣心)으로 법을 들으니 이 법도 攀緣하는 마음이다.”

하는 그 마음으로 설암선사의 말에 답을 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도반이 잠자는 중에도 몸부림을

치면서 목침을 떨어뜨리는 소리에 주재자(主宰者)가 自身이 아니라, 이 한 法임을 홀연히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깨어 있는 것은 自身이 아니라, 이 한 法임을 깨닫고 나니, 지금까지 수행도하고, 번민도 하고,

막히기도 하고, 끙끙거리기도 하고, 마음이 활짝 열리기도 한 것도 모두 이 한 法이 하고 있었음을 알고,

그동안, 이미 森羅萬象의 모든 일을 이 한 法이 하고 있는 것을, 공연히 自身이 이리저리 生覺으로 헤아

리면서 엉뚱한 짓을 하려 했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래서 그의 오도송에서 “원래 옛날 그때의 그 사람일 뿐 옛날 그때 밟고 다니던 자리를 떠난 적이 없도다.”

라고 하였다. 옛날 그때의 그 사람이나, 옛날 그때 밟고 다니던 자리나 모두 사주(泗州)의 대성인(大聖人),

즉 이 한 法을 말한 것이며,

 

이 한 법 그 자리를 떠난 적이 없는 것처럼 이 한 法, 지금 여기 이 자리가 이 森羅萬象을 내고 움직이고

있으며 同時에 森羅萬象 그 自體이니, 어찌 단 한 瞬間이라도 깨어있지 않으랴? 이 사실을 모를 때의

고봉선사는 ‘내가 있다’는 生覺에 自身도 모르게 계속 속아서, 아니, 자신이 ‘내가 있다’는 生覺에 속는 것

조차도 모르게 속아서, 自身이 삼라만상을 主宰하려고 하였으니, 어찌 그럴 수가 있었겠는가?

 

지금에 이 공부를 하는 사람의 거의 대부분이 고봉선사처럼, 自身이 하는 工夫가 ‘내가 있다’는 한 生覺에

속아, 生覺이 지은 工夫를 하면서도, 그것이 스스로에게 스스로 속고 있음을 눈치도 못 채고는, 自身이 하

고 있는 工夫가 정말로 이 한 法을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의심치 않고 있는 것이다.

 

속는 것을 알면 그나마 났지만, 속는 것조차 모르고 있으니 어찌 진짜 꿈(망상, 실제의 잠에서 꾸는 꿈은 法의

作用이요 일이지만, 妄想은 生覺이 지은 허깨비 같은 幻想이니 진짜 헛된 꿈이다.)에서 깨어날 수 있겠는가?

 

몇 십 년 전에 오매 일여니 숙면 일여니 하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었다.

그 여파로 아직도 꿈과 生時가 똑 같은 意識狀態가 되어야 제대로 된 修行을 한다고 錯覺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는 그 사람도 自身이 스스로에게 속고 있다는 事實을 모르고 또 주위의 뭇 사람들을 현혹하여 아직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우기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는 이 한 法의 本來 자리를 알지 못하고 生覺으로 헤아

려서 만든 修行이기 때문에, 生覺을 따라 가는 修行이라 그런 수행은 我相을 더욱 堅固하게 할 뿐이고,

물론 그 行爲가 주는 滿足感은 生覺으로 지은 이 자리의 느낌에서는 充滿할지는 몰라도, 實相인 이 자리를

이 한 法을 아는 데는 티끌만한 利益이 없을 것이요, 오히려 我相만 높아갈 뿐인 꿈속에서도 꿈속의 일이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한 瞬間에 번쩍 精神이 들어 ‘아! 모든 것이 이 한 法이 하는데 내가 하려 하는구나!’

하고 알아차려버리면, 더 以上 自身의 生覺으로 世上을 헤아리거나, 또 自身이 하려는 것을 멈출 수가 있을

텐데, 잘못된 修行에 물든 사람이 어찌 그리 쉽게 스스로 修行을 놓을 수가 있겠는가? 참으로 至難하고 至難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꿈을 꾼다, 꿈을 꾸지 않는다. 또는 꿈이다 생시다 하고 是非 分別하는 生覺 마음은 모두 부처님께서 말씀

하신 攀緣하는 생각 마음에서 보이는, 그야말로 꿈(妄想), 幻想, 물거품 그림자 일 뿐, 우리가 꿈을 꾸고 있

으나 생시에 있으나, 泗州의 大聖人(이 한 法)에게는 아무런 差異가 없는 똑같은 일이요, 하나의 일일 뿐이다.

그러니 오매일여(寤寐一如)니, 숙면일여(熟眠一如)니 하는 헛된 妄想 幻想 꿈에서 얼른 깨어나라. 

 

- 적천 윤기붕


가져온 곳 :  카페 >무진장 - 행운의 집|글쓴이 : 유당|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