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12연기-③ 行, 생각 · 인식 以前에 삶을 위해 作動하는 意志

장백산-1 2015. 10. 21. 22:52

 

 

 

           12연기-③ 行, 생각 · 인식 以前에 삶을 위해 作動하는 意志

           이진경 교수  |  solaris0@daum.net
승인 2015.10.19  12:24:27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無明을 條件으로 發生하는 행(行)이란 무엇인가? 行이란 무언가를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려는 意志를 發動시키는 것이다. 무엇이 意志를 發動시키는가? 일단 살아있는 것이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것만 그런 것은 아니다. 物理的인 物體들도 일종의 ‘意志’가 있다. 慣性이라고 불리는 게 그것이다. 가려던 方向으로 계속 가려는 性向, 그게 慣性이다. 그런 慣性은 有機體나 人間에게도 마찬가지로 있다. 人間의 경우엔 ‘他性’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담배 피우던 이가 몸이 안 좋아도 계속 피우려 하는 것도, 먹지 않던 종류의 음식에 대해 맛없다고 느끼며 먹던 종류의 음식을 계속 먹으려는 것도, 남들에게 상처주고 괴롭히는 말을 어느새 다시 입 밖으로 내게 되는 것도 모두 이런 종류의 慣性이다. 공부하려던 이가 계속 공부하려는 것도, 선방에 앉아 참선하던 이가 그걸 계속 하려는 것도 다르지 않다. 이런 慣性을 佛敎에선 ‘習’이나 ‘業’이란 말로 표현한다. 어떤 行을 지속하게 만드는 것, 그게 習이고 業이다. 좋은 行의 지속은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이고, 나쁜 行의 지속은 나쁜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이처럼 業을 통해 行을 지속하여 어떤 結果를 얻는 것을 잘 알다시피 ‘自業自得’이라고 한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아기가 엄마의 젖을 찾듯 行은 無明의 世界 속에서
어떤 判斷에 앞서 作動하는 살기 위한 本能的 意志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이런 行動은, 혹은 그런 行動을 낳는 이런 意志는 生覺이나 認識 以前에 存在하고 發動한다. 생명체로 돌려서 살펴봐도 그렇다. 아이가 엄마 젖을 찾는 것은 살기 위한 본능적 행동이다. 먹고 살기 위한 그 意志는 생각이나 인식 이전에 작동한다. 성인이라고 다르지 않다. 배고플 때만은 아니다. 짝을 얻고자 하는 행동이나 생식을 위한 행동처럼 번식과 관련된 行動의 意志 또한 생각이나 인식 以前에 작동한다. 그렇게 생각 以前에 작동하는 意志를 보통 ‘衝動’이라 한다. 衝動이란 생존과 번식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기 위해 一次的으로 作動하는 性稟이다. 그것은 ‘識’이라고 명명된 識의 作用 以前에 存在하고 作動한다. 그렇기에 충동은 흔히 ‘盲目的’이라고 간주된다. 생각 없이, 인식 없이 行動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 것은 사실 그 衝動이 비록 ‘생각이 없다’고 해도 明確한 目的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生存의 持續, 그게 바로 衝動의 目的이다.

意志 또는 衝動이라 불리는 이 ‘行’은 無明을 條件으로 作動한다. 이때 無明이란 條件은 行을 적극적으로 규정하는 요인이라기보다는 行 즉, 生命體의 衝動이 헤쳐가야 할 條件이다. 하이데거 風으로 말하면, 살아 있는 어떤 것도 이 無明의 世界 속으로 ‘던져지며’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도 無明은 行을 規定하는 條件이다. 無明의 세계란 모든 것이 생존을 지속하기 위한 조건이고 적응해야 할 조건이다. 살려는 意志인 ‘行’은 이 무명의 세계, 알 수 없고 아직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 어떤 識보다 먼저, 어떤 判斷보다 먼저 작동하기에, 일단 작동하며 시작한다. 그래서일까? 괴테는 파우스트의 손을 빌어 “太初에 말씀이 있었느니라”라는 성경의 문장을 이렇게 고친다. “태초에 行動이 있었으니라.” 生命의 ‘原初的’ 힘인 이런 意志나 衝動을 ‘맹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무명의 세계와 直接 對面하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고 충분히 알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여기저기를 더듬고 이리저리 몸을 옮기며 생존을 위한 길을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自身의 存在를 持續하려는 것은 生命의 ‘本性’에 속한다. 生命의 存在에 理由는 없다. 예전에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말로, 合目的的 本質에 따라 만들어진 道具와 달리 人間의 存在(實存)는 그런 本質이나 目的 없이 태어났음을 강조했지만, 그건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모든 生命體는 태어났기에 存在하는 것이고 살아가는 것이다. 生命이란 그런 點에서 自身의 生存을 持續하는 문제에 관한 한 ‘盲目的’이다. 存在하기에 存在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無明의 세계 앞에서 합리적 이유 없이 존재하며, 세상을 통찰하는 어떤 생각 없이도 그 존재를 지속하려 한다. 生命을 持續하려는 이런 意志나 衝動을 ‘生命力’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存在를 持續하려는 이러한 性向이나 ‘努力’, 혹은 그러기 위한 充動이나 意志를 ‘코나투스’라고 정의하는데, 그는 이것이 생명체뿐 아니라 모든 존재의 본성이라고 본다. 현재의 상태를 지속하려는 사물의 관성조차 이런 코나투스의 일종인 것이다. 생명이 있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과 다른 점은 존재를 지속하려는 의지가 생존할 수 있는 능력 자체의 고양을 지향한다는 것일 게다. 주어진 條件에서 生存할 수 있는 能力을 增加시키고, 다른 環境에서 生存을 持續하기 위해 自身을 變化시켜 가는 것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 생명체는 자신이 處한 條件에 대해 ‘알고자’ 하게 된다. 끝없이 요동치는 바다 속에서 지푸라기든 나무조각이든 찾듯이, 알 수 없이 빠르게 變化하는 無常의 世界 속에서 삶을 지속할 단서를 찾고자 한다. 世上에 대해 알고자 한다. 動物이 먹을 것을 찾아 움직이려 한 것도, 移動이나 運動을 위해 有用한 細胞를 發展시킨 것도 이런 理由에서일 테고, 植物이 빛을 感知하는 能力을 섬세하게 발전시킨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터이다. 살고자 하는 衝動에서 비롯된 ‘行’이, 알고자 하는 意志를 發動시켜 ‘識’ 즉, 知覺하고 認知하는 能力을 發動시키는 것이다. 이 行는 識을 發動시키는 前提지 識에 依해 作用하는 意志가 아니다. 識은 살고자 하는 意志즉, 行을 條件으로 存在하게 된다.

모든 生命體는 無限速度로 變하는 이 無常한 世界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생명의 역사를 시작했던 박테리아나 아메바 같은 원생생물에서부터 작금의 인간에 이르기까지 이點에선 어느 것도 다르지 않다. 無明의 어둠 속에 위족을 내밀어 살 길을 찾아야 하고, 인근에 있는 것을 더듬으며 判斷하길 反復하며 ‘識’을 形成해야 한다. 變化하는 大氣의 흐름 속에서 自身이 살 居處를 찾아야 하고, 變化하는 빛의 흐름 속으로 가지를 뻗어야 하며, 變化하는 물의 흐름 속에 신체의 일부를 담가야 한다. 變化하는 온도를 포착하여 꽃을 피워야 할지 잎을 떨구어야 할지를 判斷해야 하고, 그 變化의 뒤에 무엇이 올 지를 豫想해야 한다. 눈앞에 있는 것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敵인지 먹이인지를 判斷해야 하며, 달리는 놈의 속도와 방향을 포착하며 쫓든 도망치든 달려야 살아남을 수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識 以前에 作動하는 이런 意志, 行를 갖고 있다. 그것이 12緣起에서 識 以前에 있으며 識을 條件 짓는 行이다. 意識 없는 生命體는 있지만, 이런 衝動 없는 生命體는 없다. 이衝動, 意志, 行이 없다면 어떤 行動도, 살아가는 것도 不可能할 것이다. 그런 行, 意志가 作動하면서, 살기 위해 무엇을 먹어야 할지, 그걸 찾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할지, 저기 있는 것을 먹어도 좋은지 아닌지를 判斷하려 할 때, ‘識’이라고 부른 作用이 發動되며, 그런 意志가 識의 作用을 規定하고 方向 짓는다. 識이란 生存을 위해 發動하는 이 行에 기대어 발생하고 작동한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15호 / 2015년 10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