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락아정 (常樂我淨) / 청화 스님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 내 마음 뭐 내가 충분히 알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인간은 인간
마음을 잘 모릅니다. 인간의 그런 生覺 煩惱 妄想, 是非 分別 비교 판단 해석하는 그런 마음으로는 우리
들 마음의 본바탕이 무엇인지를 결코 모릅니다.
우리 마음은 분명히 체[體]와 용[用]이 있습니다. 체體는 무엇인고 하면 인간이 살아가면서 쓰는 마음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인간이 사용하는 마음의 本來 性稟 자리란 말입니다. 용用은 무엇인고 하면 인간이
쓰는 마음의 본래 성품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現象的인 명상名相 즉, 하나의 허망한 이름과 하나의
허망한 상相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쉽게 因緣法, 인연법을 들먹이고 합니다만 사실 인연법이란 이 세상 어느 것도 우리 눈에 보이는
어떠한 물질적 정신적인 현상도 전부 우주만물간의 인연因緣에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中論이라는 용수보살[龍樹菩薩], 제2의 석가[釋迦]라는 용수보살이 중론에서 말씀하시기를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이라, 우주삼라만상만물간의 인연에따라서 이루어진
모든 것은 그것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인 현상이든 바로 그대로 텅~빈 空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佛子님들 우주법계의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의 몸이 우주법계의 인에 의해서 이루어져서 그렇고, 사람의 마음 卽, 受想行識(느낌 감정, 욕망 욕구
충동 의지 의도, 분별하는 마음 분별하는 의식, 인식도 그렇고, 우주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이 모두가 다 우주법계의 인연에 따라서 잠시잠간 모양으로 나타난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우주법계의
인연에 따라서 모양을 나타내고서 그대로 고정적으로 가만히 있으면 모르겠지만 우주만물 간의 因緣에
의해서 모양을 나툰 것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조금도 머물러 있지가 않습니다. 그때그때 순간순간
변화무쌍變化無常하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에게 고통이 어째서 오는가 하면은 우주법계의 인연에 따라서 잠시 동안 이루어진 것을 보고는
인간이 그 임시적인 것을 보고는 固有한 실체가 있는 걸로 착각해서 그 가짜에 執着을 한단 말입니다.
우선 그런 執着 즉, 망상 번뇌 중에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른바 아견[我見]이라, 나 아我자,
볼 견見자. 나라는 것이 있다고 착각하는 생각에 執着하는 분별하는그 마음이 제일 무섭습니다.
왜 무서운고 하면은 나라는 존재에 집착하는 분별하는 그 마음 때문에 모든 죄악罪惡이 생긴단 말입니다.
우리가 많이 듣고 많이 알지만 佛敎는 무아[無我]의 길이라, 없을 무無자, 나 아我자, 고유한 고정된 실체
로서의 나라는 것이 없다는 그런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불교는 無我의 道理만 알면 다른 것은 쭉쭉 풀려
갑니다. 즉, 無我는 고유하고 고정된 실체로서의 내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쉽게 마음이 바로 부처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 불교인들로 해서 심즉시불[心卽是佛]
이라 마음이 직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마음을 닦으면 부처가 되겠지 이렇게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
다. 마음이 어째서 부처인가? 이렇게 우리가 또 파고 들어가면 그때는 좀 멍해진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
이 지금 어떤 모양이 있습니까? 내 마음 네 마음 그렇게 말은 하지만 마음은 모양이 없다는 말입니다.
복잡한 말로 마음을 말하면 그때는 時間性도 空間性도 없는 것이 우리 마음 아닙니까. 모양이 없으면서
내가 지금 살아 있으니까 분명히 마음은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부처님(佛)은 모양이 있는가 없는가? 우리가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을 얘기할 때 석가모니
부처님은 사람의 모양을 하고서 역사적 인물로 이 세상에 나오셨다가 이미 가버리셨기 때문에 모양이
지금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숭상하는 부처님은 어떤 부처님인가? 우리가 마음을 닦아서 깨달
아서 부처가 되려는 그 부처님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그런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이 없이 이 天地宇宙에 충만해서 언제나 어디에나 영원히 항상 계시는 이른 바 法身佛로
서의 부처님이 우리가 되고자 하는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追求하는 부처님은 법신[法身]으로서의 부처님입니다. 원효스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없이 언제 어느 때나 어느 곳에나 계시는 참 부처님 조금 더 어렵게 말하면 우주삼라만상만물 모든
生命의 根本바탕, 근본자리가 바로 법신[法身]으로서의 부처님, 법신불이라는 말입니다.
佛敎를 믿는다고 하면서 法身佛 즉, 진리의 당체로서의 부처님과 化身佛 즉, 이 세상의 모습으로 나투
신 부처님의 차이를 모르면 참 답답한 일입니다. 역사적 인물인 석가모니 부처님과 우주삼라만상만물
은 化身으로서의 부처님이고, 석가모니 부처님인 역사적인 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이 없이
우주에 언제 어디에나 계시는 우주의 생명으로서의 부처님, 우주 생명의 부처님 즉, 법신으로서의 부처
님은 항시恒時 영원하게 계시다는 말입니다.
宇宙空間은 에너지라 하는 氣로 充滿해 있습니다. 그렇게 우주에 충만한 氣에서 그 氣가 어떻게 모여지
는가, 어떻게 결합해지는가, 相互作用에 따라서 이렇게 이런 모양도 되고 저렇게 저런 모습도 된다는 말
입니다. 金이요 銀이요 다이아몬드요 라고 말은 하지만은 그것도 내내야 우주에 충만한 에너지가 이렇게
저렇게 모인 상태를 보고 잠시 동안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주삼라만상만물,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다 따지고 보면 假相 假名이란 말입니다. 즉, 허망한 모습
이고 가짜로 임시동안 붙인 허망한 이름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육신도 그와 똑같습니다. 몸뚱이
를 사람이 아무리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이 몸도 역시 가상가명[假相假名]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4大, 산소 수소 탄소 질소 그런 原素들이 잠시동안 우주법계의 인연에
따라서 이 몸뚱이를 구성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또 무엇인가? 마음이 원래 부처라고 말은 하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쓰는 마음의 본래
성품은 본래부터 法身으로서의 부처이지만 凡夫心 衆生心이란 내내야 感受하고 想像하고 意慾하고 分別
是非하고 하는 그런 부스러기 마음이 모여서 우리 범부의 마음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뚱
이나 내 마음을 분석해 놓고 본다고 할 때는 이런 육신과 마음은 고유한 고정된 실체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사실은 둘 다 텅~비어서 虛妄하단 말입니다. 우주법계의 因緣에 의해서 이루어진 몸과 마음이기 때문에
이것도 역시 따지고 보면 공[空]입니다.
몸과 마음이 텅~비어 空하기 때문에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오온개공이라 하는
말 오온[五蘊: 色受想行識]은 우리 마음과 우리 몸을 合한 이 존재가 오온 아닙니까. 우리 사람을 구성하는
것은 색수상행식 오온인데 오온 이것도 역시 결국은 다 텅~빈 것이란 말입니다. 空이란 말입니다.
인간의 고통은 무엇인고 하면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五蘊 이것이 다만 우주법계의 因緣에 따라서
잠시간 모습을 나툰 하나의 假相에 불과하고 김 아무개 박 아무개는 하나의 假名에 불과한데 인간이 이것
이 고유하게 존재한다 이것이 내 것이다 하는 그런 생각 때문에 인간의 여러 가지 煩惱 妄想이 생기고 苦痛
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佛子님들 따라서 인간의 人生苦의 가장 큰 原因은 무엇인고 하면은 아견[我見]이
라 나 我자, 볼 見자 나라는 존재가 고유하게 고정된 실체로서 있다고 착각하는 생각에 고집하는 그런 분별
하는 마음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공부하려고 애써도 나라는 것이 원래 텅~비어 있다
고 생각하는 그러한 이론적인 체계가 서야 그래야 우리 공부가 진척이 빠르단 말입니다.
금강경에도 나라는 상[我相], 너라는 상[人相] 또는 중생이라는 상[衆生相] 또는 시간이 짧다 길다하는
그런 수자상[壽者相] 이런 相을 다 없애면 그때는 바로 성인이고 부처고 이런 相이 있으면 그때는 범부
고 중생이란 말입니다. 금강경 道理 어렵다고 여러분들이 생각하시지요. 그러나 따지고 보면 사실을 사
실대로 말씀한 경전이기 때문에 굉장히 쉬운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외면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안보고
우리 중생이 煩惱妄想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지 사실대로만 우리가 볼라고 생각하고 우리
가 그것을 念頭에 두고서 사실에 입각하면 그때는 쉽단 말입니다. 그 반야심경도 짤막한 그런 경이지만
그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우리 중생이 보는 모든 존재는 본래부터 다 텅~비어서 空한 것이다.
色도 텅~비어있고, 色은 눈에 보이는 物質이 色 아닙니까? 色도 텅~비어 있고, 생각도 텅~비어있고, 느낌
감정도 다 텅~비어있고, 욕망 의지 의도도 다 텅~비어있고, 분별심 분별의식도 다 텅~비어닜고, 諸法 즉,
이 세상 모든 것들, 우주삼라만상만물이 전부 다 텅~비어서 空이라, 모두가 다, 제법은 모두를 말합니다.
모두가 다 텅~비어서 空이란 말입니다.
諸法이 다 텅~비어 있는 그 텅~빈 空의 바탕, 근본자리, 그 자리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로 道요
眞理요 法性이고 또는 佛性 이라고 부르는 말입니다. 도, 진리, 법성, 불성 그렇게 말을 해서 우리가 이
론적으로 봐서 아,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이렇게는 납득이 된다 하더라도 도 진리 법성 불성 그것이 뭣허
는 것인가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허망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헌데 도 진리 법성 불성은 이름으로만 있는 그런 허망한 것이 아니라 도 진리 법성 불성은 전우주적인
오지 단 하나뿐인 한 生命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잘 깊이 생각하십시오. 道 眞理 法性, 佛性은 우주적인
한 생명이고 그 한 생명 속에는 萬德이 갖춰져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고 말
씀은 들으셨습니까? 涅槃은 영원불멸하는 불생불멸하는 永生의 眞理, 영원히 살아있는 진리, 도, 법성,
불성를 의미하는 말인데 열반은 어째서 영생의 진리, 도, 법성, 불성, 본성인가 하면 모든 헤아릴 수 없는
그런 덕德이나 그런 진리를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하도 많고 끝도 갓도 없이 많은 공덕인지라 일일이 헤아릴 수는 없고 다만 간단히
간추리면 그때는 4가지라 말입니다. 4가지는 우리가 외어두면은 좋습니다. 간단하니까 말입니다. 그래
야 내 마음의 本性에는 이런 功德이 있구나, 내 마음의 본성, 본래성품에는 이런 不可思議한 힘이 있구나.
이렇게 마음의 본성을 느낄 수 있고 우리가 깨달을려고 또 보다 더 용맹정진하고 그러겠지요.
우리들 마음의 本性이 갖추고 있는 4가지 德은 어떤 것인고 하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항상 常자,
어째서 항상 常 자를 써서 常이라고 했는고 하면은 우리들 생명과 우주법계의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
은 그때그때 있다가 인연이 다하면 없어지고 또 인연이 생기면 없다가도 생기고 하지만. 그러나 우리들
생명의 본체인 佛性자리는 불성 그 자리는 있다 없다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永遠히 存在하는 生命
의 實相입니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불성자리는 생명의 實存이란 말입니다. 상락아정 이것은 영생불멸
[永生不滅]하니까 常자를 항상 常자를 써서 常 그러는 것입니다. 因緣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그때그때
인연이 다하면 소멸되고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있어지고 하지만은 眞如佛性 우리들 생명의 본바탕에
있는 그러한 공덕은 그렇지가 않고서 항시 존재한단 말입니다 영원히. 생명도 마찬가지고 우리 생명은
죽음이 없습니다.
예수님만 부활復活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 생명은 본래로 누구나가 다 부활합니다. 인연 따라서 생겨난
것만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변화가 되는 것이지 變化의 근본바탕 진여불성자리는 변화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보고 항상 常자 常이라고 하는 것이고, 樂은 안락할 樂자 말입니다. 생명이 있는 존재
는 어느 것이나 安樂을 다 구합니다. 개나 소나 돼지나 더구나 우리 사람은 또 意識이 있어놔서 더욱 더
우리가 의식적으로 안락을 구한단 말입니다. 幸福을 구한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적으로 행복을
구하는 존재입니다. 행복도 그냥 행복이 아니라 완벽한 행복을 求한단 말입니다. 사람들을 가리켜서 인간
이라고 하는 말이 인간 존재가 欲心이 너무나 많지 않은가?
허나 욕심이 많다는 것은 우리 인간 마음의 本來性品이 본래부터 부처[Buddha, 佛, 覺者 ]이기 때문에
부처가 되려는 그런 마음이 본래부터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 존재가 부처가 못되면 항시 마음
이 不安합니다. 본래부터 부처(本來成佛)인데 부처가 되어버려야 그래야 마음이 흐뭇하고 행복스러울 것
인데 본래부터 부처인데 부처[佛]가 못되어 놓으니까 그때는 마음이 부족을 느끼고 불안스럽지 않습니까.
그렇게 뭐 지금의 시대를 가르켜서 위기의 시대라 또는 불안의 시대라 그런 말들을 많이 하지요. 그러나
어쩔 수가 없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사람들이 지금 옳게 살지를 않고 있단 말입니다. 虛妄한 것이 세상을
실제로 있다고 錯覺해서 감투나 또는 財産이나 그런 것도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다 變動하는 것인데 거기다가 마음을 붙여서는 항시 불안스러워 하고 걱정 근심을 합니다. 그 감투
도 높은 감투나 쓰려고 하면 얼마나 많은 것이 괴롭습니까? 참 정말로 중상모략하고 별별 짓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黨을 괜히 또 만들고 말입니다. 그걸 보면 인간이 굉장히 미련하단 말입니다. 참 미련해요, 그
렇지 않고 생긴대로 살면 참 좋은 것인데....부처님 法은 아까 말씀마따나 如法하게 우주삼라만상만물 이
세상모두를 다 宇宙의 眞理대로 한단 말입니다. 허나 당장에는 그것이 안 되겠지요.
왜 그런고 하면 우리 사람들이 業을 너무나 많이 지었단 말입니다. 허망한 이 세상 모든 것들 때문에 業
을 너무 많이 잔뜩 지어놔서 그런 業을 消滅 시키려면 그냥 몇 년 동안에 소멸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러
나 끝긑내 가서는 앞으로 몇 백년 몇 천년 가서는 業이 다 그렇게 소멸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
가 하면 우리가 本來로 부처님 같은 마음 그 부처[Buddha]의 마음이 우리 마음의 본래마음이기 때문에
누구나 다 고생도 하고 또는 넘어지고 자빠지고 그 가지가지 그런 고초를 겪은 다음에는 우리가 부처 쪽
으로 부처가 되기 위해서 온 힘을 그리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씀드리다 말았습니다만 우리 불자들은 근원적으로 행복을 구하는 존재들이란 말입니다. 樂 안락
樂자, 그 다음에 나 아我자. 그 나는[我] 4 가지 덕德에 있는 나 아我 字 나 이것은 그냥 허망무상한 我가
아니라 허망무상한 아가 텅~비었다는 소식을 사무치게 알고서 하는 말입니다.
참나, 죽지 않는 나, 불생불명의 나, 상주불멸의 나, 영원불멸의 나, 모든 존재의 근원은 우주법계의 인연
따라서 생기고 인연 따라서 없어지는 그러 나가 아니라 因緣을 超越한 참나가 이른바 涅槃의 네 가지 德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참다운 나 이것은 그냥 우리 같이 보통 그런 現象的인 허망무상한 그런 것만을
아는 내가 아니라 정말로 모든 그런 신통지혜神通智慧를 다 할 수가 있는 나란 말입니다.
불경에 보면 팔대자재아[八大自在我]라. 팔대자재아 그 我는, 깨달아버린 그런 大道人에 갖추어진 我라는
것 이것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 몸도 나툴 수가 있단 말입니다. 비행자재[飛行自在]라 공중으로 비행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있고 자기 몸을 우주에 가득 차게 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우리 佛子님들 이런 말씀을 들
으실 때 그냥 건성으로 생각을 말으십시오. 참말로 우리한테는 그런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롯 今生
에 福을 못 짓고 전생에 우리가 業障을 많이 지어서 제대로 부처님한테 갖춰져 있는, 부처님은 바로 우리들
마음의 본래 성품과 똑같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의 본래성품에 갖추고 있는 그런 功德을 본래로 다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래로 다 할
수가 있도록 우리가 지금 여기에 태어난 것입니다. 마음이 없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음은 아
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주 神妙해서 잘못 쓰면 참 옹졸하고 정말로 바늘귀 하나도 안 들어갈 만치 좁
지만 마음의 본래바탕은 끝도 갓도[邊]없이 대허무공으로 우주를 다 감싸고 있단 말입니다.
김가 마음이나 박가 마음이나 지금 사형수 마음이나 또는 도둑놈 마음이나 그 마음의 본바탕은 다 우주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마음에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락아[常樂我]라 항상 永生, 사람
마음도 똑같이 永生하고 또 사람 마음도 똑같이 한도 끝도 없는 幸福, 樂을 추구하고 있단 말입니다. 또 구
할 수가 있는 것이고 그런가 하면 신통묘지神通妙智를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부처님의
法門을 보지 못했으면 아.. 뭐..그렁저렁 어떻게 살아도 되겠구나. 그렇게 마음 먹었을 것인데 그런 것을
분명히 다 인제 봐노니까 밀입니다. 지금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도 닦으면 부처[Buddha]가 되겠구나!
부처가 되면 만 공덕을 충분히 할 수가 있구나! 그런 가능성이 나한테 있는데 그것을 무시無視할 수가 있겠
습니까?
우리는 나이 적고 많고 또는 世間的인 知識이 많고 없고 하는 그런 것에 구애될 필요는 아무 것도 없습
니다. 얼굴이 못난 것도 그런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아무리 못났다 하더라도 역시 마음자리는
다 똑같습니다. 마음이란 것이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자리는 김가 마음 박가 마음 또는
석가모니 마음 예수 마음 똑 같습니다. 聖人들은 보다 더 마음을 잘 쓴 분들이고 우리는 마음을 잘 못
써서 지금 범부중생凡夫衆生으로 머물러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맑을 정[淨]자, 맑을 淨, 청정淸淨이란 정淨자 말입니다. 그 淨은 무엇인고 하면은 淨은
生覺 煩惱 妄想이라는 분별심 분별의식이 조금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 본래마음자리는 본래 번뇌 망
상 분별심 분별의식이 조금도 없이 청정무구[淸淨無垢]한데 우리가 괜시리 자꾸 시비 分別 비교 판단
해석하는 분별심을 내어 가지고서 妄想을 한단 말입니다. 본래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망상할 건덕지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 내 몸뚱이도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그런 것이 잠시간 모여서 시시각각으로 변화가 돼 있고 내가 쓰고
있는 지금 내 마음도 마찬가지고 마음도 이것 배우고 저것 배우고 모두 군더더기가 잔뜩 많이 들어서 좋
다 굳다 밉다 사랑한다 모두 그러지 않습니까. 이런 것도 허망한 것이고 그래서 우리 중생의 마음은 청정
할 정[淨]자 청정하지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본래성품, 佛性을 깨달아서 불성자리에 우리가
들어가면 그때는 그러한 번뇌망상이 조금도 없단 말입니다. 거꾸로 뒤바꿔 보고 그러는 전도몽상[顚倒
夢想]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때는 마음이 훤히 트여버리리 때문에 우주를 다 내다본단 말입니다.
과거도 끊임없이 보고[宿命通], 미래도 끊임없이 본단 말입니다[天眼通]. 일념보관무량겁[一念普觀無
量劫]하니 한 생각에 무량겁을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다 우리가 通해서 보니,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
來亦無住]라,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것을 아까 말씀 마따나 우리 중생들이 잘못 생각하고 잘못 봐 서 자꾸만 막히고 꺼끄럽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항상 상常자, 그 영생불멸한 것이 우리 佛性자리 불성을
깨달은 끄 자리의 마음인 것이고, 또 락樂이라 안락 락[樂]자 말입니다. 즐거울 락樂자 모든 행복을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 몸뚱이 때문에 우리 나쁜 생각 마음 때문에 우리가 安樂하지 못하고 스스로 苦痛을 사서 하는 것
이지 우리가 바로 보고 바로 느낀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고통스럽게 느낄 필요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와 똑 같이 우리가 병들어서 아프다 하더라도 아, 이 병든 이것이 어디가 무슨 근거가 있는 것인가?
마음으로 아프다 하는 것도 이것이 마음이 괜히 그러는 것이지 마음이란 것은 원래 모양도 없고 자취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플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해서 아프다 하는 것이지 말입니다.
따라서 그 가장 원만한 그런 행복, 樂은 또 우리가 갖추고 있는 것이고 그리고 나 我자, 我라.. 이것도
역시 잘못 생각하기가 싶습니다만 모든 신통자재[神通自在]를 갖추어 있는 그런 이른바 대아大我 큰
나 또는 참 진眞자 나 아我자 眞我라 이런 단계란 말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한테 우리 이것이 본래면
목[本來面目]인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이것은 본래면목이 아니라 과거 전생에 업을 지어서 금생에 받은데다가 금생 나와서도
아, 부모한테 이렇게 저렇게 배우고 학교 가서도 그 세속적世俗的인 지혜를 이것저것 배우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잡탕되어서 느끼는 이런 것은 사실은 허망虛妄한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모든 것을 다 알고자 할 수가 있고 그러한 것이 참다운 내 본래면목이고 또 번뇌도 조금도
없고 훤히 트여서 천지우주 어디에도 다 막힘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참 신묘[神妙]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분 좋을 때나 부처님 법문을 듣고서 마음이 그 쾌적할 때 도인道人의 마음은 미처 못되었다 하
더라도 그런 마음은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마음이 툭 트여서 과거에 막힘이 없고[宿命通]미래에 막힘이 없고[天眼通] 현재에 막힘이 없고
산이나 벽이나 아무 것도 걸림 없이 훤히 내다 볼 수 있는 그런 지혜[漏盡通] 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지혜가 본래로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자聖者가 미처 못된다 하더라도 우리 범부의 지금 신분이라 하더라도 정말 순간 사무치면 순간
사무치는 그런 신심信心으로 해서 모든 그런 신장[神將]이 돕고 부처님 께서 호념護念한단 말입니다. 보
호할 호護자 생각할 념念자 부처님께서 호념하신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불경[佛經]을 외우면 불경을 외우는 그것이 그냥 뭐 조금 기분 좋고 그런 정도가 아니라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외우는 그 즉시 바로 모든 신장神將들이 다 듣고 계십니다. 감동 안 받을 것입니까.
우리는 눈에 불을 쓰고서 공부工夫를 하셔야 됩니다. 우리는 어떠한 비참悲慘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사업
에 실패한다든가 슬픈 이별을 했다든가 그런 것도 다 이것은 허망虛妄한 일입니다. 만나면 어쨌든 헤어져
야 되겠지요. 또 난 사람은 어차피 죽어야 되겠지요.
우리가 그 소중한 우리의 생명의 본바탕, 영원한 고향故鄕으로 가는 그런 길로 가기 위해서 중국에서 인도
로 가서 그 20년 동안이나, 가는데 3년 오는데 3년 거기 머물러서 10년 말입니다. 우리가 자기 집에서도
배가 고프다 뭣이 맛이 없다 다 그런 불평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허나 20년 세월동안 그도 나이가 먹어서가 아니라 한창 젊은 동안, 한창 꽃다운 젊을 동안 20년을 몽땅
바친단 말입니다. 그러고도 아무런 후회도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다 도道를 구했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어떻게 해서 도道를 구합니까?
우리 그 불성佛性, 불성에 대해서 정말로 보다 더 깊이 느끼셔야 합니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
佛性] 이것은 나의 마음인 동시에 모든 인간 존재, 존재의 본래 이것은 생명[生命]입니다. 또는 만유萬有
의 근본根本 생명입니다.
어느 것도 부처 佛자 성품 性자 불성[佛性]으로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불성을 꺠달으면 바로 성인이요
부처요, 불성을 깨닫지 못하면 중생이요 범부고 합니다. 우리 인간이 갈 길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다
우리가 부처[Buddha]가 되는 길입니다.
본래 우리가 부처님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가 부처가 안 되고 그대로 마는 것이 아닙니다.
금생에 못되면 내생에 되고 몇 만생 지내가도 본래가 부처[佛]인지라 부처가 꼭 되고 만단 말입니다.
부처가 못 되면 어떠는 것인가? 그떄는 윤회輪廻합니다. 뱅뱅 돕니다.
우리 업식業識 따라서. 하루 밤 하루 낮에 팔억사천만념[八億四千萬念]이나 생각이 오락가락하는 그런
생각 그런 생각을 망상妄想으로 지새워 버리면 우리는 천년만년 또 개가 되고 소가 되고 사람되고 무엇
되고 다 그러는 것입니다.
금생에 부처님 법 만났을 적에 우리는 기왕이면은 본래 내 생명[生命]의 실존자리 본래 내 생명의 본체
자리 그 자리로 가는 것이 우리 생명을 가장 효과적이고 우리 생명을 가장 최고도로 살리는 길입니다.
부처님 되는 그 길 외에 다른 부처님 되는 길 그 반대 길은 이것은 우리 생명을 낭비浪費하는 것입니다.
자기한테도 해害롭고 집안사람한테도 해롭고 이 사회에도 그때는 해害를 끼칩니다. 부처님한테 가는 길은
어느 누구한테나 가장 훌륭한 이른바 보살菩薩의 길이고 보시布施의 길입니다. 아까 말씀 드린 상락아정
[常樂我淨]분명히 잘 외우시기 바랍니다.
우리 불성[佛性] 가운데는 정말로 불성은 죽지 않는 것이고 허망한 인연 따라서 잠시간 헤어졌다가 또
만나고 만났다가 헤어지고 이런 단계에서는 즉 다시 말하면 현상적인 그런 것은 변하고 없어지고 죽고
만나고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 불성[佛性]은 영생한단 말입니다.
영생불멸[永生不滅]한 생명자체[生命自體]입니다. 또는 모든 행복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영원히 滅치
않는 참다운 행복이 불성 가운데는 갖추고 있습니다. 또는 우리 불성, 우리 본래 생명자리인 불성은 일
체의 신통묘지[神通妙智]를 다 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70세 먹으나 80세 먹으나 또는 어린이나 우리 마음이 순수하고 부처님 가르
침 따르면 다 신통묘지를 다 할 수가 있습니다. 7살에 아라한[Arhan]도道를 성취하고 16살에 阿羅漢 道
를 성취한 분들도 다 있지 않습니까. 본래가 우리 불성은 청정미묘[淸淨微妙]해놔서 우리가 불성을 따르
면 정말로 번뇌煩惱나 그러한 뒤바뀐 생각은 일어 날라야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성에 들어있는 무한공덕無限功德 자리인 상락아정[常樂我淨], 상락아정 이것이 涅槃四德]그럽
니다. 열반 이것은 영생 행복한 생활이 열반인데 열반에 갖추고 있는 그런 공덕이 무량무변[無量無邊]
하지만 간추리면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덕四德 상락아정常樂我淨이란 말입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정말로 한시도 잊지 마시고 조금 조금 괴로우시더라도 아, 나한테는 만능萬能이
원래 갖추고 있는데 만능을 끄집어낸다는 것이 그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참선[參禪]하고
염불[念佛]하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또는 화두[話頭]하는 사람은
화두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부처님, 부처님을 믿을 때는 역시 부처님 이름을 외우는 것이 가장 이것이 가장 쉽습
니다. 본래 부처인데 본래 부처인 부처님의 대명사가 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고 관세음보살[觀世音
菩薩]이니까 부처님 외우는 것이 제일 속 빠릅니다.
내가 나를 부르는 것이 됩니다. 그것이 내가 나를 부르고 또는 우주의 이름도 내내야 아미타불입니다, 우
주의 이름도. 우주가 모두가 다 불성으로 되어 있거니 불성의 대명사가 아미타불인 것이니까 불성佛性
한테는 우주 역시 아미타불입니다.
또 극락세계[極樂世界]는 무엇인가? 극락세계도 내내야 불성[佛性]으로 되있거니 극락세계의 교주도
역시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여기나 저기나 내 몸이나 내 마음이나 본래는 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인 것
이고 우주도 마찬가지이고 말입니다. 따라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천지
우주의 바로 생명의 이름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려운 것은 또 어렵게 한다 하더라도 가장 쉽고 누구나 하기 쉽고 또 공[功]도 제일 많은
그런 것이 염불念佛공부입니다. 부지런히 공부하셔서 꼭 금생에 열반사덕[涅槃四德]을 성취하시기를 간
절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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