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두 개로 나눠지지 않는다.
의상조사 법성게의 첫 번째 게송은 法性圓融無二相(법성원융무이상)입니다. 법성은 원융해서 무이상이다.
즉, 법성은 원융하고 원융해서, 아주 둥글고 원만해서 아주 융합 융통자재해서 ‘두 개의 相으로 나눌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圓’ 하면 ‘가득하고, 크고, 圓滿하다, 모나지 않고 평등하고 모순이 없다’ 그런 뜻이고, ‘融’은 ‘융합하다,
화합하다, 통하다, 걸림 없고, 장애 없이 화합하여 통한다’ 이런 의미라고 그래요. 원융하다, 융통자재하
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단 말이에요. 어디 하나 모난 데 없고, 평등하지 않은 것이 없고, 융섭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圓融한 모습이 어떤 것이냐 하면 無二相 즉, 두 개의 相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 얘기입니다.
이 법성게를 보고 선사스님들은 의상스님이 이렇게 210자로엑기스만을 뽑아놓았지만, 이것도 번잡하다.
그냥 法性圓融無二相 이렇게 한 마디 하면 딱! 끝나는데 뭐 이렇게까지 풀어놓아 설명할 필요가 뭐가 있
겠느냐 할 정도로, 이 한 마디에 모든 眞理가 딱! 함축되어있다고 얘기합니다. 왜 그럴까요? 法의 性稟은
원융해서 두 개의 모양이 아니다라는 이 말에 중생과 깨달은 자, 부처가 나뉘는 길목이 바로 여기 있습니
다. 衆生들은 世上을 볼 때 對相 境界를 보고서 언제나 둘로 나누어서 봅니다. 그렇게 세상을 나눠서 分別
해서 보는 생각 의식 마음 그걸 分別心 分別意識 自我意識이라고 그래요. 근데 깨닫고 나면 이 세상이 두
가지 相으로 보이지 않는단 말이지요. 원융하게 본단 말이죠. 세상을 대상을 경계를 둘로 나누어서 보는
分別法을 二法이라 말하는데, 二法 그게 어리석은 衆生들이 世上을 보는 方式입니다.
긴 것이 있게 되면 그 긴 것을 因緣으로 해서 짧은 게 있게 된단 말이에요. 예를 들어 죽비를 보면 이게
긴지 짧은지를 금방 압니다. 이게 바로 둘로 나누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짧은 게 있어야 긴 게 있지 않습
니까? 죽비가 전봇대 옆에 있으면 짧고 이쑤시개 옆에 있으면 긴데,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한 이 죽비를 가
지고 길다라고도 할 수 없고 짧다고도 할 수 없는데 사람이 죽비를 길다라고 말을 했다는 그 자체가 벌써
둘로 나누는 比較 判斷 分別 妄想에 속아서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절에 오니까 좋고, 교회 가니까 별로다라는 그것도 둘로 나누고 分別하는 마음입니다. 뭔가 槪念이 지어
졌다 하면 그 槪念은 둘로 나누고 分別한 마음입니다. 둘로, 셋으로, 넷으로, 다 쪼개진단 말이죠. 이걸
보고 컵이다! 이 안에 물이 담겼다! 그렇게 하면 여기 물이 담겼다라고 알려면 알음알이(識, 意識), 分別
心, 認識으로, 意識으로 알려면 물과 물 아닌 것을 보고 分別해서 認識하는 마음이 있어야 되잖아요.
分別이 뭡니까? 나눌 ‘分’자, ‘나누어서 區別, 區紛한다’ 이게 分別 아닙니까? 이 世上, 對相 境界를 둘로
나누는 마음, 이렇게 모든 것을 둘로 나누는 마음이 바로 分別心 分별意識입니다. 그래서 人間에게는 좋
은 게 나쁜 게 分別되어 있어요. 옳고 그른 是非가 있고, 善惡이 있고, 大小가 있고, 길고 짧음이 있고, 잘
난 게 있고, 못난 게 있고, 모든 對相 境界 世上를 볼 때,이렇게 둘로 나누고 分別해서 對相 경계 세상을
본단 말입니다. 分析하고 解釋해서 본단 말입니다. 둘로 나누어서 世上을 볼 수밖에 없는 分別心 分別意
識 , 그것이 人間의 깨달음을 가로막는 唯一한 하나, 唯一한 是非 分別하기를 좋아하는 生覺 妄想 惱惱
意識 마음입니다.
이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 분석 계산 이해타산 하기를 좋아하고 즐기는 생각 망상 번뇌 의식 마음 즉,
分別心 分別意識 自我意識만에 사로잡혀 얽매이지 않고 벗어나면 그 자리에서 부처(佛), 眞我, 진짜 나,
본래의 나, 宇宙大光明을 볼 수 있단 말입니다. 뭘 보든 그것을 부처로 보고, 무슨 소릴 듣던 그 소리에서
부처를 들을 수 있고, 언제나 부처를 볼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理由는 아주 오랜 세월, 오랜 億劫을 이
어오면서 가지고 왔던 이 世上을 相對로 그 둘로 나누고 分別하는 마음, 分別心 分別意識 때문입니다. 그
러니 이 世上을 둘로 나누기만하면 이미 그즉시 벌써 眞理와는 어긋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처럼 어리석은 衆生들은 이 세상의 무엇이든 둘로 나눠서 分別해서 받아들이는데 反해 法(진리)의 本來
性稟은 圓融하여 절대로 둘로 나눠지지 않는 法이라는 의미가 法性圓融無二相입니다. 둘로 나눠지지 않는
法 즉, 眞理가 바로 깨달음이라고 부르는 말입니다. 법성원융무이상이라는 이 말은 分別心 分別意識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그즉시 바로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참된 自性, 부처, 佛性, 法性, 眞我, 진짜 나, 본래의 나,
本來面目, 如來가 드러나고, 眞理 즉, 法 , 깨달음이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법상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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