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으로 읽는 복음] 08. 빛과 소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소금을 짜게 만들겠느냐? 그런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어 밖에 내버려서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 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받침 위
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환하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
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복음, 5:13~16]
예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등불을 가져다가 됫박 아래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나 등받침 위에 얹어 놓지 않느냐? 감추어 둔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또 말씀하셨다. "내 말을 마음에 새겨들어라. 너희가 남에게 달아
주면 달아 주는 만큼 받을뿐만 아니라 덤까지 얹어 받을 것이다.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가복음, 4:21~25]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그 소금을 짜게 하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
[마가복음, 9:50]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나 등받침 위에 얹어 놓아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할 것이다.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져
서 세상에 드러나게 마련이다. 내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누가복음, 8: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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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의 소금됨은 소금이 지닌 짠맛에 있습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는다면 소금은 자신의 정체성, 소금됨을
잃어버리는 셈입니다. 마찬가지로 人間 자신의 참된 正體性은 내가 나임[I am that I am]에 있습니다.
내가 나임, 나됨을 잃는 순간 우리들 人間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나 아닌 것을 나로 삼는
어리석음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참된 나, 본래의 나의 정체성, 나의 나임, 나됨은 나-아님, 나-없음입니다. 나-아님, 나-없음이 진정한
나임, 나됨입니다. 소금에서 소금의 짠맛을 분리(分離)할 수 없는 것처럼 나로부터 나임, 나됨을 분리(
分離)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진정한 나, 나임, 나됨은 이제까지 나라고 여겨왔기고 생각해서 믿어왔
던 내가 내가 아님, 나라고 할 만한 것 없음입니다. 이 역설을 잘 살펴보십시오. (잠시 묵상)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따 먹은 선악과(善惡果)의 다른 이름은 곧 知識의 나무(the tree of knowle
dge)입니다. 知識은 곧 分別이고 지식, 분별은 바로 우리가 다른 개체적인 ‘나’들과 구별되는 또 다른 육체
적 정신적 개체라는 생각입니다. 즉 ‘내가 다른 것들과 별개로 있다’고 느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원죄
(原罪), 즉 根本 無明입니다.
내가 다른 것과 분리 분별되어 따로 있게 되는 순간 인간은 나 아닌 것들과의 對立, 差別, 갈등, 불화, 전쟁
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낙원 추방, 실낙원의 신화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어리석음, 무
지 탓입니다. 眞正한 ‘나’, 본래의 나라고 하는 것은 ‘나’라고 할 만한 특정된 대상이 아닙니다. 소금에서 짠
맛이 분리될 수 없듯이, ‘나’로부터 ‘나임’, ‘나됨’이 떨어질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나'라고 여기는 ‘나’가 알고 있는 ‘나’는 진정한 ‘나’가 아니란 말입니다. 무엇보다 ‘나’가
‘나’를 안다는 말부터가 어불성설입니다. ‘나’는 결코 둘이 아닙니다. 주관과 객관으로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나’는 ‘나’라고 할 것이 없음, ‘나’가 아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동일한 ‘나’, 똑같
은 ‘나임’입니다. 우주만물, 에 세상 모든 것, 우리는 本來 하나임[the oneness, 一者, 하나님]입니다.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지만,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이것이 바로 진정한 ‘나’입니다. ‘무엇’이라 할 것
이 없고, ‘무엇’이 아니지만 분명 존재는 하고 있는 이것이 본래의 나입니다. 존재는 하고 있지만, ‘어떤’ 존
재는 아닙니다. 그저 존재하고 있음[beingness]입니다. 존재는 앎의 대상이 아닙니다. 존재가 그대로 앎 그
자체, 根本知, 本來知 입니다. 존재 그대로 生命 자체입니다. ‘나’는 존재-근본적인 앎-생명입니다.
(잠시 묵상)
同時에 ‘나’는 빛입니다. 제 스스로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을 두루 환하게 밝혀주고 있는 빛입니다. 이 빛
은 본래부터 이미 환하게 드러나 있기에 마치 감추어져 있는 것 같이 보이지 않고, 감추어져 있는 것 같지만
이미 훤히 드러나 있는 빛입니다. 다만 겉으로 現示되어 드러난 現象의 모습에 눈이 멀어 自己로부터 放射
되는 자기 빛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
련입니다.
볼 눈이 있는 사람은 보고,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십시오!
우리 내면과 외면의 어떤 것도 우리 자신의 빛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자기 자신과 別個로 분리(分離)되어 떨어져 있는 事物을 하나만이라도 지적할 수 있다면 제 목숨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와 별개로 떨어져 있다’고 지적하는 순간, 그것과 나는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와
모든 대상 경계, 이 현실세상 모든 것들은 本來부터 하나임 입니다.
오직 분리 없는 하나의 빛(온전한 하나임, 하느님)이 이 세상 모든 모든 것으로 現示되어 드러나있을 뿐입
니다. 하나인 빛의 존재를 다시 비춰줄 수 있는 다른 빛은 이 우주,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둘이 아니
지만 하나조차 아닌 이 빛, 이 나, 이 존재, 이 앎, 이 생명, 이 영(靈), 이것을 이미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
이지만, 이것을 갖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잠시 묵상)
禪의 공안(公案) 중에 ‘너에게 주장자가 있으면 주장자를 줄 것이고, 너에게 주장자가 없다면 주장자를 빼앗
겠다’라는 화두가 있습니다. 제아무리 줄려고 애를 써도 줄 수 없고, 빼앗으려고 기를 써도 결코 빼앗을 수
없는 이것이 분명하게 있다면, 있는 사람에게는 주고, 없는 사람에게서는 빼앗는다는 이 말의 낙처(落處),
귀착점 즉, 눈앞 바로 지근 여기 이 순간 이 자리를 알 것입니다. ‘나’가 있다면 ‘나’가 없는 것이고, ‘나’가 없
다면 ‘나’가 있는 것입니다.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져서 세상에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잠시 침묵)
그러나 이미 드러나있는 이것을 어찌 다시 감출 수 있겠습니까?
- 몽지 심성일님(몽지와 릴라 밴드에서), 가져온 곳 : 카페 >무진장 - 행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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