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세 사회의 해체 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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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를 지배했던 담론들의 쇠퇴와 새로 등장하는 이론가들
서구 사회에서 이른바 중세라 불리우는 시기가 14세기가 되면 전성기가 지나고 중세 사회에 해체의 징후들이 등장하죠. 이때에 나온 유명한 철학자들이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하고 윌리엄 오캄(Willian of Ockham)예요.
스코투스는 13세기 말 사람이고 윌리엄오컴은 14세기 전반에 활동한 사람이고. 이 두 사람에게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구축되었던 거대한 체계가 해체되면서 중세의 황혼이 도래하게 됩니다.
둔스 스코투스는 스코틀랜드 태생의 철학자인데, 이 사람이 너무 꼬치꼬치 따지고 든다, 트집잡는다는 뜻의 ‘둔스’라는 말을 비꽈서 했죠. 그래서 지금도 영어의 ‘dunce'라는 말도 우둔함이란 뜻이지요. 이 사람 이름에서 나온 말인데요. 원래의 뜻은 우둔하다기보다 까다롭다 뭐 이런 겁니다.
이 둔스 스코투스는 철학사에서 뭘로 유명하냐면 ’Univocity of Being' = ‘存在의 一義性’ 으로 유명한 사람이예요. 이 개념은 어떤 맥락에서 나왔냐면 아리스토텔레스의 Kategoria란 개념이 있죠? 범주! 아마 여러분들이 아리스토텔레스 기억나실 거예요.
아리스토텔레스에선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것과 다른 것에 부대해서 존재하는 것! 정확히 말하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과 바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 그것에 부대해서 존재하는 것! 그래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실체(ousia)고, 그 우시아에 부대해서 존재하는 게 질량이라든가 관계, 장소 등등 이런 것들이죠.
소크라테스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체고 거기에 비해서 소크라테스의 생김새라든가 소크라테스의 키라든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관계같은 것은 뭡니까? 그 소크라테스의 부대하는 것들이죠.
그래서 그것을 전부 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른바 10개의 범주를 만들죠. 10개의 범주를 만드는데 범주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일반성으로 사물들을 통합한 것들인데, 예를 들어서 빨강, 파랑, 노랑, 이런 것들은 뭡니까? 색으로 통합되죠.
그리고 까칠까칠하다, 맨들맨들하다, 딱딱하다 등은 촉감으로 통합되고, 이런 것들이 또 뭡니까? 또 통합이 되면 뭐예요? quality, 質이죠. 가장 추상화해 올라가다보면 맨 끝에 質로 표현이 되죠.
그 다음에 1,2,3 자연수, 두배, 절반, 루트 할 거 없이 이 모든 게 전부 다 quantity로. 딱 본질화되는 거죠. 아버지와 아들, 부부관계, 딸과 엄마, 선생과 제자, 회사원, 군대 이런 무수한 모든 것들이 전부 합해서 다 관계들이 되는 거죠.
이렇게 어떤 존재들을 일반적으로 추상화시켰을 적에 가장 추상적으로 도달하는 게 이런 범주들이에요. 그런데 어떤 문제가 생기냐. 이 범주들은 과연 통합이 안 되느냐란 문제예요. 실체가 있고 질이 있고 양, 관계. 이렇게 10가지의 범주가 있죠?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물어볼 수 있냐면 이렇게 통합되어 왔듯이 이것 전체를 또 완전히 통합한 어떤 마지막 범주가 있냐 이거지요. 만약에 있다면 뭐가 될까요? 최종적으로 통합된 범주가 있다면 그게 뭐가 될까요? 존재가 되겠죠.
그런데 이렇게 존재로 통합이 된다고 보는 입장이 있고, 아니라고 보는 입장이 있지요. 예컨대 우리가 “오늘 날씨 좋죠? 어때요?” 라고 質로 물어봤는데 “다섯 개입니다.”이렇게 대답해 버리면 완전히 엉뚱한 거 아니예요. 저 사람과 당신의 관계가 뭐냐? 이럴 적에 빨갛다고 하면 물론 문학적 의미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일반적인 보통의 의미로선 말도 안 되죠.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완전히 불연속이다. 그래서 이걸 이론적인 용어로 뭐라고 표현하냐 하면 Incommensurability! 여러분 수학에서 찾을 수 있는 말이죠? ‘통약불가능성’이라 그러지요.
6분의 4는 3분의 2로 통약되죠. 그런데 ‘3분의 2는 더 이상 통약불가능하다.’ 그런 말 쓰지요?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같은 지평에 놓고서 생각할 수가 없는 겁니다. 같은 지평에 놓고서 비교할 수 없어요. 삶하고 빨간색, 부자관계와 부드러움. 이런 걸 어떻게 통합을 할까요?
Incommensurability. 이런 두 가지 생각이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전체를 통합해서 보는 입장을 뭐라고 하냐면 Univocity of Being, 존재의 一義性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Incommensurability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Equvocity of Being, 존재의 多義性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중요한 논쟁이 되죠.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중세철학이라는 그 맥락으로 건너가면 어떤 이야기가 되냐면 “존재한다”는 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맥락에서는 범주들을 가지고 얘기하는데 중세 철학에 가면 범주들 외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중세 철학에 가면 저런 범주들 외에 전혀 별도의 또 하나의 범주가 있잖아. 저 범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 신神이죠. 그럼 어떤 문제가 생기냐 하면 관계가 있고, 양, 질, 실체, 그 위에 다시 또 신이 있거든요? 그러면 신까지 포함한 이 전체의 통약불가능성이냐? 아니면 일의성이냐란 문제가 생겨요.
사실 이 문제가 우리가 지중해 세계의 중세 철학을 얘기하면서 내내 만나는 거죠. 어떤 문제입니까? 신과 세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문제죠. 그렇죠? 정통 기독교 입장을 보면 불연속성을 주장하지요. 거기에 비해서 플로티누스의 신비주의를 이어받는 입장에서 본다면 연속적인 거죠.
접신! 신과의 접속! 자~ 그래서 저렇게 일의성의 입장을 취하면 어떤 문제가 생기냐 하면 신과 세계가 다 통약 가능한 게 되어 가지고 신과 세계의 건널 수 없는 거리가 메워져요. 그런데 또 역으로 다의성의 입장을 취하면 분명히 신의 섭리에 따라 만들어진 세계인데, 그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이 전혀 소통 불가능한 그런 상황이 도래해요.
전자의 경우에는 일의성 때문에 신과 세계의 불연속성이 메워져 버린다면 후자의 경우는 다의성 때문에 이 세계가 파편화되는 거죠. 세계가 파편화된다는 것은 신학적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거죠.
이 세계는 일관된 신의 섭리의 산물이어야 하니까. 여기에서 사람들이 일종의 미봉책이라고 그럴까? 일종의 타협안을 제시하기 되는데 그 타협안이 뭐냐 하면 ‘Analogy of Being’= ‘존재의 유비성’. Analogy라는 말은 서구 철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죠. 서구철학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개념인데 Analogy라는 말은 기하학적 맥락에서 사용될 적에는 닮은꼴을 생각하면 되요. (닮은꼴의 삼각형을 그리면서 이 때의 로고스는 비율이라고 설명)
그러니까 세 개의 삼각형은 분명히 다른 삼각형이지만, 그러나 뭡니까? 원점 0를 공유하는 닮은꼴들이죠. 이런 관계가 Analogia관계예요. 그런데 이 문제가 중세의 신학으로 건너가면 어떤 문제가 되냐면 존재의 유비!
다시 말해서 실체, 신은 물론이고, 양, 질 등등 모든 존재들이 그 간격이 완전히 메워져 가지고 유비적이진 않지만 존재라고 하는 것! 존재라고 하는 것을 마치 기하학의 원점처럼 어떤 존재로 소급되듯이 저렇게 공통의 어떤 준거점으로써의 존재를 기준으로 해서 유비의 관계를 맺는다. 일의적이진 않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일의성과 다의성의 타협안을 제시하게 되죠. 그런데 이것도 어떤 입장이냐 하면 존재에 신과 세계가 이렇게 있는 것으로 보는 경우가 있고(존재 아래에 신과 세계가 나란히) 그러면서 일의적으로 보는 입장이 있고, 이게 아니라 신을 차라리 이렇게 놓고 존재, 또는 실존 이렇게 놓은 입장이 있고(신 아래에 존재와 실존이). 다른 입장이죠.
전자의 경우는 상당히 철학적 입장을 가진 사람의 입장이고 후자는 신학적 입장이죠. 그래서 존재 자체가 아예 신으로부터 나오는 후자의 입장. 어찌 되었든 이런 식의 구도가 있는데 서양 중세사회를 떠받치는 어떤 기본 논리, 서양 중세사회를 근거짓는 존재론적 입장은 저 Analogia예요. 존재의 유비입니다.
그런데 둔스 스코투스는 존재의 일의성을 얘기하죠.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신과 세계, 세계의 모든 범주는 기본적으로 다 통약 가능하다는 얘기죠. 이 생각 자체가 이미 중세 사회에 결코 건너뛸 수 없는 선저를 지우고 있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둔스 스코투스가 전혀 중세 자체를 벗어나지는 않았죠. 어차피 이 사람은 중세 사람이니까.
그래서 이성과 계시를 구분하고 또 계시나 신앙은 완전히 또 다른 방식으로 파악을 해야 한다는 그런 점에서 어찌 보면 저런 식의 사고의 씨앗을 뿌리긴 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중세 자체를 벗어난 사람은 물론 아닙니다.
아니지만 이런 대목, 저런 사고를 전개하는 대목에서 이 사람이 중세라는 시대의 어떤 쇠퇴를 알리는, 중세적 위계, 중세적 체제의 해체를 고지하는 그런 인물이다고 얘기를 해도 과언이 아니죠.
▲ 오캄, 중세 철학 전체를 논박하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이 윌리엄 오캄인데, 이 오캄이란 사람은 둔스 스코투스를 이어서 중세 아퀴나스주의를 해체시킨 사람입니다. 이 오캄도 마찬가지로 이성과 신앙을 날카롭게 구분했어요. 그리고 이성적, 철학적으로는 유명론을 얘기했지만 신앙적으로는 여전히 중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죠.
전에 한번 얘기했죠? 오히려 경험주의자들이 더 반신학적일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사실은 경험론자들이 어찌 보면 신앙과 더 쉽게 이어진다. 왜냐하면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을 날카롭게 나누어 버리니까. 합리주의자들은 끝까지 모든 것을 다 합리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선 부담스럽지만 차라리 경험주의자들은 경험은 경험이고 아예 다른 것은 신앙으로 가 버리니까, 어찌 보면 편리한 양분법이라고 하죠.
오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캄은 유명론을 주장하게 되는데 이 윌리암 오브 오컴은 ‘중세적인 실재들, 형상들, 보편자들은 개별자들에 대한 흐릿한 일반화일 뿐이다. 정말로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개별자에 대한 경험에 근거한 그런 서술들이고 일반적인 것, 보편자의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들은 흐릿한 일반화일 뿐’이라고 얘기하죠.
그래서 이 사람은 이른바 ‘오캄의 면도날’로 유명한 사람이에요. 'Ockham's rasor'! 오캄의 면도날이 뭐냐 하면 ‘우리가 어떤 사실을 설명하는데 그 설명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도저히 뺄 수 없는 그런 개념들만 가지고 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상의 개념이 들어가면 마치 우리가 얼굴에 수염이 나면 면도날로 깎아내듯이 , 플라톤의 이데아라든가 이렇게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제거해야 한다’라는 말로 유명해서 이 사람의 생각은 이른바 ‘오캄의 면도날’로 불리우죠.
오캄에 이르러서 중세 철학이 종말에 이르는 대목이 나오는데. 경험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명제가 있다. 아니다. 우리한테 어떤 특정한 경험을 주는 게 아니고 순전히 개념적인 추론에 관계되는 명제가 있다. 구분해야 한다. 이렇게 나뉘는 거죠.
가령 먹구름이 끼면 비가 내린다든가 충청도에 가면 어떤 호수가 있다든가 물과 소금을 섞으면 소금물이 된다. 이런 것들은 경험적 지식이죠. 경험적 지식을 적어 놓은 명제죠. 훗날의 용어로 하면 종합명제죠.
거기에 비해서 예컨대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라든가 a가 b보다 크고 b가 c보다 크면 a는 c보다 크다. 이런 명제는 어떤 경험을 토대로 한 종합명제가 아니라 어떤 로지컬한 관계들을 적어 놓은 그런 명제들이죠. 두 명제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요.
예를 들어서 ‘인간은 죽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고로 소크라테스는 죽지 않는다.’ 이 추론이 지금 맞는 추론입니까? 틀린 추론입니까? 이건 맞는 추론이에요.
인간은 죽지 않는다는 명제는 틀린 명제지요. 경험적으로 틀린 명제죠. 그런데 그 명제의 진위가 아니라 추론은 맞는 거예요. 맞는 추론인 거지요. 무슨 얘기냐 하면 논리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명제가 맞냐, 틀리냐를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경험을 해 봐야 해요. 실제 인간이 죽는지, 죽지 않는지는 경험을 해 봐야 하죠. 논리학이라고 하는 것은 그 명제가 맞냐, 틀리냐의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뭡니까? 그 추론 형식이, 추론의 타당성이 문제가 되는 거죠.
그런데 오캄의 이런 주장으로부터 논리학을 가지고서 ‘우리가 이 세계에 대해서 무언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일침을 가하죠. 자, 이것은 엄청 중요한 거예요. 정말로 중요한 거죠. 왜 중요하냐?
내가 이번 학기 맨 처음 시작할 적에 중세적인 철학의 일반적 성격을 얘기했잖아요. 기억나세요? 중세 철학은 이 세계에 대해서 어떤 실질적인 인식을 하기보다는 이미 있는 텍스트를 코멘타리하는 겁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리고 이미 있는 텍스트들을 가지고서 논리적으로 분석을 하는 거죠.
‘이 대목은 이것을 함축한다’, ‘아니다’. 막 분석하는 겁니다. 실제 새로운 경험을 해 보는 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기독교 교리,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누스의 텍스트를 놓고서 순전히 로지컬한 추론만 일삼는 거예요.
그런데 오캄이 논리학이라고 하는 것은 추론의 타당성만을 알려줄 뿐 실제적 지식을 가져다 주지 않으며 실질적인 지식은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강조함으로써 어찌 보면 오컴은 어떤 한 생각을 제시했다거나 어떤 한 이론을 논박한 게 아니라 중세 학문 성격 자체를 논박한 거예요. 이건 엄청난 거죠. 여기에서 한 발자국만 나가면 프란시스 베이컨 같은 사람이 나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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