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만법귀일 일귀하처

장백산-1 2017. 6. 5. 02:34


 철학자 이진경 선어록을 읽다
19. 만법귀일 일귀하처 - 상    모든 것의 근본인 ‘하나’ 추구 동서양 다르지 않아



 

▲ ‘무명적삼 일곱근’ 고윤숙 화가


어느 스님이 조주에게 물었다.

현상 · 사물을 하나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서양에선 형이상학이라 말하지만
하나의 원리를 찾아내려는 노력은 신학과 철학 · 과학이 다르지 않아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萬法歸一  一歸何處)?”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무명적삼을 한 벌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근이더군.”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러나 이를 묻기 전에, 저 스님이 던진 질문에 대해 자세히 천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동양과 서양, 불가와 도가, 불학과 도학 등이 만나고 흩어지는 중요한 교차로요 분기점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멋진 질문이기 때문이다.

禪이 모든 것이 응축된 ‘하나’를 추구하는 것은 분명하다. 알다시피 禪은 다른 어떤 불교보다도 ‘한 마디’의 간명한 것을 추구한다. 운문 스님은 학인들의 질문에 종종 단 한 자로 답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원오 또한 말한다. “불법의 핵심은 번잡스러운 언어에 있지 않다.” 도가도 하나를 말한다.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하나, 모든 것을 감싸안는 하나. ‘道’가 그것 아닌가. 주자 또한 하나의 이치를 추구한다.

모든 것의 기원이 되는 '하나', 혹은 모든 것이 귀착되는 ‘하나’를 추구하는 것은 서양 또한 다르지 않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이유를 최초의 존재 하나로 설명해주려는 시도는 ‘창조자’의 역할을 하는 하나의 神으로 사람들을 인도했다. 이 하나는 스스로는 운동하지 않지만 다른 것을 운동하게 시동을 걸어준 어떤 것(‘不動의 始動者’라고 한다)으로 모든 운동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했던 아리스토텔레스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이처럼 모든 것의 근거가 되는 하나, 모든 것을 통합해주는 하나로 모든 사물, 모든 현상을 통일적으로 설명하려는 태도를 서양에선 ‘형이상학(metaphysics)’이라고 부른다. 그리스 이래 모든 학문의 왕좌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언젠가 부터는 세상사와 무관한 공허한 주장을 뜻하는 ‘욕’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게 ‘형이상학’이다. 신이나 이데아처럼 증명할 수 없는 어떤 가정으로 세상을 설명하려드는 사변적인 철학이나 종교 같은 비과학적 주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 유일하게 참된 지식이라 믿는 과학자들이 다른 종류의 지식들에 퍼붓는 이런 비난은 형이상학이 무언지 모르는 소리일 뿐 아니라, 과학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로 통합하거나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려는 태도가 형이상학이라고 한다면, 현대 과학만큼 형이상학적인 분야도 없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뉴턴 이래의 현대과학은 모든 것을, 그게 안 되면 최대한 많은 것을 하나의 원리나 법칙으로 통합하여 설명하려는 태도를 강박적일 정도로 강하게 견지하고 있다. 그것은 근대 이래 과학의 성공요인이기도 했다. 가령 뉴턴은 갈릴레오가 정리한 지상에서의 운동법칙과 케플러가 발견한 하늘에서의 운동법칙을 하나로 통합해 설명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뉴턴은 ‘중력(重力)’이라는, 마술사들 사이에 사용되던 개념을 끌어들였다. 이른바 ‘만유인력의 법칙(萬有引力의 法則, 이 세상 모든 것은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법칙)’을 통해 그는 지상에서의 운동과 하늘에서의 운동을 하나로 통합하는 이론을 제시했고, 이는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잘 알다시피 뉴턴의 고전역학은 일상적인 거시세계에서의 운동을 서술할 때만 타당하다. 미시적인 입자들이 운동하는 미시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설명하기 위해선, 고전역학과 아주 다른 양자역학(量子力學)에 따른다. 또 우주와 별들이라는 거시적인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서술하기 위해선 앞의 두 이론과 모두 다른 상대성이론에 따른다. 아주 다른 법칙을 갖는 세 이론이 우리가 사는 물리적 세계를 나누어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다른 법칙에 따르는 세 이론이 병존한다는 사실은 과학자들을 몹시 불편하게 하는 듯하다. 하여 이 세 이론을 하나의 이론으로, 하나의 법칙 아래 통합하려는 시도들이 반복적으로 행해져왔고,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현대과학은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나 법칙으로 통합하려는 저 형이상학적인 태도를 아주 강하게 견지하고 있다. 다른 형이상학도 그렇지만 과학 안에 있는 이 형이상학에도 명확한 하나의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 진리는 하나이고, 또한 진리는 하나여야 한다는 믿음이. 그런데 ‘진리는 하나다’라는 이 말은 진리일까? 내가 아는 한, 이 말이 진리임을 증명한 사람은 아직 없다. 그것은 ‘신은 하나다’라는 말처럼 하나의 믿음일 뿐이다. 그렇다면 모든 걸 하나로 통합하려는 현대과학의 시도는 증명된 적 없는 믿음 위에 서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세상만사(‘萬法’)를 ‘하나’로 묶어내려는 시도에 반드시 이러한 것만 있는 건 아니다. 모든 것에 공통된 법칙이나 형식을 찾으려는 이런 시도와 달리, 萬法이 ‘하나’가 아니면 발생하는 논리적 난점 때문에 ‘하나’임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과학보다는 哲學이나 神學에서 발견된다. 처음 등장하는 것은 플라톤 말년의 저작인 ‘파르메니데스’에서인데, 실질적인 문제로 등장한 것은 신학에서였다. 알다시피 기독교의 신학적 세계는 신과 피조물로 분리 분할되어 있다. 전자는 無限者이고 후자는 有限者이니, 양자는 본성상 다르다는 게 통설이었다. 그러나 신과 피조물이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라면 서로 만날 수 없고, 알 수 없고, 영향을 주고받을 수 없다. 돌이 꽃향기의 존재를 알 수 없고, 꽃 또한 돌에 영향을 미칠 수 없듯이. 따라서 본질이 다른 존재라면 신은 인간이 사는 피조물의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없고(따라서 창조할 수 없고), 인간은 신을 인식할 수 없다. 이런 난점 때문에 중세 신학자인 둔스 스코투스는 ‘존재는 오직 하나’일 뿐이라고, 다시 말해 신과 피조물의 세계는 오직 하나의 동일한 존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존재의 일의성(univocity of Being , 存在의 一義性)’이라고 말한다.

기묘하게도 앞서 과학과 달리 여기서 존재의 일의성, 즉 ‘존재는 하나다’라는 명제는 논리적 증명의 형식을 통해 등장한다. 미적인 의미보다는 논리적 의미가 크다는 말이다. 증명되었지만 대부분의 이들이 믿지 않는 명제란 점도 과학의 경우와 정반대다. 이때 ‘하나’란 말은 법칙이나 원리의 단일성이 아니라 ‘質料的’ 單一性을 표현한다. 신이나 피조물이나 서로 섞이고 충돌할 수 있는 동일한 질료로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하나’는 현상들의 양상을 설명해주는 원리는 아니다. 그저 질료상 하나이기에 변화하고 섞일 수 있는 연속성을 가짐을 말해줄 뿐이다. 가령 우리의 신체는 죽어서 분해되어 어떤 것은 흙으로, 어떤 것은 물로, 어떤 것은 공기 중으로 섞여 들어간다. 흙 속에 섞여 들어간 분자들은 물과 섞여 식물의 뿌리로 흡수되고, 식물을 먹은 동물의 세포 속으로 흡수되어 녹아들어가 동물의 신체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이런 신체에서 저런 신체로 이렇듯 옮겨가고 바뀌어가는 것을 ‘질료적 연속성’이라 한다. 이는 모든 것이 ‘하나’의 질료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나의 원리로 통합하려는 시도와 하나의 질료로 통합하려는 시도는, ‘하나임’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실은 아주 다른 것이다. 어떤 원리 같은 것을 상정하지 않기에 후자는 ‘하나’로 모든 걸 통합하려 하지만 형이상학이라고 하긴 어렵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93호 / 2017년 5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