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만법귀일 일귀하처-중

장백산-1 2017. 6. 10. 23:27



만법귀일 일귀하처-중
만법에 공통된 하나의 원리는 바로 공(空)
2017년 06월 05일 (월) 17:08:11이진경 교수  solaris0@daum.net

  
▲ ‘비유비무(非有非無)’고윤숙 화가





‘형이상학’이란 말은 주자학이나 양명학의 모태가 된 중국의 도학자들이 만들어낸 개념이었다. 가령 정명도와 정이천은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그것을 형성하는 질료인 기(氣)는 형이하(形而下)의 것이고, 그 모든 사물이나 氣의 형상을 이루는 것, 원리나 이치에 해당되는 리(理)는 형이상(形而上)의 것이라고 대비한다. 이 말대로라면 ‘형이상학’이란 사물이나 질료를 규정하는 형상이나 원리에 대한 학문이란 뜻이니 서양의 메타피직스와 거의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공이란 연기적 조건에 기대 있기에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중도

연기적 조건은 만법의 각각을 규정

그 만법 하나마다 무한으로 돌아가



‘하나’로 세상 만물을 설명하려는 생각은 그보다 오래된 것이다. 가령 ‘도덕경’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道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뒤집으면, 만물은 셋으로, 셋은 둘로, 둘은 하나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것이니, 이는 만물의 기원을 찾아 창조주로 거슬러 올라가는 형이상학과 유사한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하나는 다시 ‘道’로 올라가는데, 그 ‘道’는 비어있음(空)이고 무(無)라고 한다. 유(有) 이전의 無, 모든 有가 발원하는 발생지로서의 無. 그러니 그 하나는 결국 無로, 즉 영(o)으로 귀착되는 셈이다. 이는 형이상학과 아주 다른 것이다. ‘하나’가 ‘무’의 심연 속에 빠져버리니, 원리라고 부를 것이 소멸해버리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도가(道家)는 이런 無를 하나 이전의 기원에 설정함으로써, ‘하나’를 찾아 거슬러가는 사고를 급기야 無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송명도학의 선구자였던 주렴계는 이런 道 개념 대신에 음양의 개념과 오행(五行)의 개념을 결합한 도교(道敎)의 태극도(太極圖)를 유학 안에 끌어들였고, 장횡거는 이 태극의 개념을 ‘주역’에 나오는 태극의 개념과 연결하여, 음양의 둘을 통합한 ‘하나’로 재정의한다. 그리고 이 ‘하나’를 만물의 기원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 ‘하나’는 형체가 없는 氣의 본체를 뜻하는 ‘태허(太虛)’라고 말한다. 그것은 형태 없이 흩어져 응축되지 않는 기(氣)를 뜻한다. 이런 점에서 虛空은 그런 응축되지 않는 氣들로 가득 차 있으니 무(無)가 아니며, 太虛 또한 無가 아니라고 한다. 여기서 장횡거는 노자의 道 개념과 명확하게 거리를 둔다. 道라는 無의 심연을 氣로 메워버린 것이다. 그런데 太虛라고 불렸던 氣는 형태를 갖는 모든 사물들의 질료이니, 여기서 장횡거가 말하는 ‘하나’는 사실 질료적 연속성을 뜻하는 ‘하나’에 가깝다. 형이상학의 하나가 아닌 것이다.


지고의 원리를 뜻하는 ‘하나’의 개념을 도입하여 명확한 이론적 지위를 부여한 사람은 정명도·정이천 형제였다. 그들에 따르면, 만물에 이미 구비되어 있고 그 만물의 구체적 형태를 만들어내는 원리가 있으니, 리(理) 혹은 ‘천리(天理)’가 그것이다. “理는 세상(天下)의 오직 하나의 理인 만큼 理는 온 세상(四海)에 작용하여 준칙(準)이 된다.” 이들은 氣와 사물들 모두가 형이하자(形而下者)라면 理는 형이상자(形而上者)라고 구별한다. (‘중국철학사’ 하, 506). 


이런 理 개념을 확고한 ‘형이상학’으로 발전시킨 것은 주희였다. 그는 理란 모든 사물의 존재이유이자 원천이라고 본다. “온갖 理가 있기에 온갖 사물이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理는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며 사물이 생기기 전에도 존재했다고 한다. 이런 理의 총화를 주희는 ‘太極’이라고 명명한다. 이것이 모든 것을 통합하는 초월적인 ‘하나’다. 심지어 이 태극에 주희는 명확한 가치마저 부여한다. 즉 “태극은 가장 훌륭하고 지극한 선한 도리”라는 것이다. 지고한 형이상의 이치니 ‘선하고 훌륭하다’ 하는 게 당연스러워 보였던 게다. 


세상을 하나의 개념으로 포착하려는 시도는 槪念을 사용하는 思考라면 어디서나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하나가 ‘어떤 하나’인가에 따라 인간의 사고는 아주 다른 길을 가게 된다. 無를 뜻하는 하나인지, 有를 뜻하는 하나인지가 그렇고, 질료라는 ‘형이하’의 연속성을 뜻하는 하나(장횡거)인가, 형상이나 理 같은 ‘형이상’의 원리를 뜻하는 하나인가(주희)가 그렇다. 그런데 노자나 장자가 보여준 것은 원리적 단일성은 물론 질료적 단일성과도 다른 ‘하나’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有도 있기 이전의 無(노자), 혹은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동등한 가치(齊物)를 갖게 되도록 해주는 平等性의 場(장자)이 그것이다. 각각의 사물이 자신이 취한 바에 따라 각이한 소리를 내고 각이하게 살아가게 해주는 텅~빈 ‘하나’.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조주에게 이리 물었던 스님은 이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일까? 여기서 말한 대로는 아니겠지만, 만법을 하나로 귀착시키는 것이 어떤 문제가 있음은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형이상의 ‘하나’를 추구하는 도학의 출현 이전에 이미, 지금이라면 ‘형이상학 비판’이라고 부를 매우 현대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불교 안에서 보면, 만법이 귀착되는 저 ‘하나’는 다시 어디로 돌아가느냐는 이 질문에 표면적으로는 상반되게 보이는 두 가지 방향의 대답이 있었던 것 같다. 


첫째 방법은 그 ‘하나’가 ‘空’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중관학이 선명하게 보여준 것처럼, 만법은 모두 어떤 불변의 자성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즉 만법에 공통된 ‘하나’의 ‘원리’나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불변의 자성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법이 귀착되는 ‘하나’는 바로 ‘空’인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그 ‘하나’는 만법 ‘위’에 군림하길 정지한다. 만물이나 만법 각각이 있는 그대로 空인 것이다. 이런 ‘하나’가 도가의 道와 다른 것은 無로서의 道가 마치 텅~비어 있기에 어떤 것도 담을 수 있는 그릇 속의 공간처럼 ‘없음’을 뜻한다면, 空이란 있어도 연기적 조건에 기대어 있기에 ‘有’라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비유비무(非有非無)’의 中道라는 것이다.


둘째 대답의 방법은 화엄학이 펼쳐 보여준 길로 이어진 것이다. 먼저, 만법이란 그것이 기대어 있는 연기적 조건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하나’인데, 이 연기적 조건은 어떤 원리도 아니고 기준도 아니면서 만법 각각을 규정한다. 연기적 조건이란 그때그때 다르게 있는 것이니, ‘無’도 아니고 ‘空’도 아니다. ‘연기’라는 말로 불리기에 ‘하나’지만, 사실 내용을 들여다보면 하나가 아니라 언제나 다르니 ‘하나’가 아니라 만법만큼이나 각이하고 많다. 이런 점에서 만법이 귀착되는 그 ‘하나’는 만법으로 돌아간다고 하겠다. 


그런데 화엄학은 각각의 사물이나 현상을 규정하는 연기적 조건이란 것이 우주적인 스케일로 이어진 중중무진의 연쇄임을 보여준다. 오늘 아침에 핀 꽃은 그것을 피게 한 연기적 조건으로 귀착되지만, 그 연기적 조건이란 어제와 오늘까지 빛을 비추어준 해와 꽃이 흡수한 물들, 땅 속에 스며들어 물이 되도록 내려준 비, 그 비가 내리게 한 구름과 습기들, 그 습기로 증발한 강과 바다 등으로 이어지는 만물의 연쇄 전체다. 무한한 만법 하나하나마다 또 다시 萬法으로, 無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94호 / 2017년 6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