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S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2013. 2. 15. 금요일 오후 5시 10분
지금은 수행시대 - 위빠사나 18회
진행 : 이명학
대담 : 상좌불교 한국 명상원 묘원 법사님
청취자 질문과 답변
- 통증이 오다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고, 무감각인 상태가 어느 정도 지속되다가 그 뒤끝이 조금 생기는 것 같은데, 왜 이럴까요?
-통증은 알아차리면 없어질 수도 있고, 망상을 하는 동안은 통증이 있어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 알아차리면 어느 정도 통증이 무감각해 진 상태가 옵니다. 그런 것들은 저린 현상입니다. 그 때마다 통증이 일정하지 않으므로, 나타나는 현상을 나타나는 대로 알아차리시면 됩니다. 통증이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는 것이 다 無常입니다. 몸에는 끊임없는 그러한 변화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법으로 보면 무상이고, 대상으로 보면 있는 그대로, 그 때마다 다 다른 현상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 알아차리라는 말씀은 망상이 올 때,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라는 말씀인가요?
- 알아차린다는 것은 대상을 깨어서 보는 것입니다. 망상은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인데,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네’ 라고 알아차리면 생각들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현재의 순위가 마음입니다. 망상을 유지하면서 알아차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알아차림의 순도가 낮은 것입니다.
알아차리는 둥 마는 둥, 망상 쪽으로 오히려 마음이 기울어져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정확히 알아차렸다면 딱~ 끊어져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알아차림의 순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망상하는 것을 정확하게 겨냥할 것, 그러면 순간적으로 망상은 소멸합니다.
-기도도 끊임없이 하고, 독경, 사경, 백팔배도 열심히 했는데, 요즘은 그냥 덤덤하고 무감각해 진 것 같습니다. 어떤 상태인가요?
-그런 경우에는 무언가 바라고 하다가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입니다. 그러면 수행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고, 또 수행은 늘 신심을 내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사이클이 있습니다. 지금의 상태는 나태함, 게으름의 상태입니다. 이러한 시기가 옵니다. 그러므로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는 스승의 이야기를 듣고, 도반을 만나거나 해서 스스로 게으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 마음이 힘들고 아플 때, 가만히 앉아서 호흡만 관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고요함, 지혜가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 고요히 호흡을 보면 번뇌가 들어오지 않고 호흡만 있습니다.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을 때 평안함, 고요함이 생깁니다. 그 고요함에서 지혜가 납니다. 평안함, 고요함을 경험하면, 이 평안함과 고요함이 이익이라고 아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지혜가 어딘가에서 화들짝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이익이라고 아는 것이 작은 지혜입니다.
- 가부좌를 하지 않고 알아차림을 해도 괜찮은지요? 이 알아차림이라는 말 한 마디에 일상생활이 많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혼자 하는 것보다는 스승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 우선, 좌선을 할 때, 앉는 자세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허리가 아픈 사람은 등에 기대고 앉아도 되고, 다리가 저리면 뻗어도 됩니다. 또 다리가 아파서 바꾸고 싶을 때는 의도를 알아차리며 바꿔도 됩니다. 그러니까 자세는 중요하지 않고 편안하게 하시되, 닿는 부분이 많으면 졸음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앉는 것입니다. 미얀마에서는 다리를 꼬지 않고 평좌를 합니다. 가지런히 놓으면 눌림이 없어서 통증이 덜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세든지 괜찮습니다.
그리고 알아차림을 하면 깨어서 대상을 아는 것이기 때문에, 있던 마음이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각성된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또, 스승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스승이 없을 때는 책을 통해서, 책도 보기 어려울 때는 도반을 통해서 경험하는 것이 좋습니다.
1. 사념처 수행에 대해 계속 말씀 듣겠습니다. 수행을 할 때 번뇌가 나타나는 것을 알아차리면 순간적으로 소멸하고, 수행을 계속 해서 지혜가 나면 번뇌가 일시적으로 소멸하고 마침내 완전한 소멸인 열반에 이른다고 하셨는데, 결국 깨달음이라는 것은 거창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번뇌가 소멸하는 것이 곧 깨달음이라고 보면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열반을 빨리어로는 ‘닙바나’ 라고 하는데, 탐, 진, 치 의 번뇌가 불탄 것을 말합니다. 곧 번뇌의 소멸이 열반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번뇌가 소멸되어 몸과 마음이 청정해져야 열반에 도달합니다. 번뇌가 소멸한 것이 열반이고, 번뇌는 지혜가 나야 소멸합니다. 이 지혜는 단계적으로 계발되기 때문에 번뇌도 지혜의 계발에 따라서 단계적으로 소멸합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불현듯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의 지혜는 존재하는 것의 특성인 무상, 고, 무아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무상, 고, 무아를 알면 느낌이 일어났을 때 갈애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연기가 회전하지 않습니다. 그 순간 윤회가 끝납니다. 사실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12연기에서는 깨달음의 황금의자를 보리수 아래가 아닌,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자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성제 중 도성제에 해당하는 팔정도입니다. 팔정도는 느낌이 일어났을 때, 욕망으로 넘어가지 않고 단지 느낌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느낌은 가만히 있지 않고 항상 더 좋은 느낌을 갈구합니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자리, 느낌이 소멸하고 욕망이 소멸한 자리가 깨달음입니다. 따라서 깨달음은 번뇌의 소멸이라고 보는 게 좋겠습니다.
2. 번뇌가 소멸한다고 했을 때, 번뇌에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요?
-번뇌를 빨리어로는 ‘낄레사’ 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오염, 더러움’ 이라는 뜻입니다. 한문으로는 ‘삼독(三毒)’ 이라고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탐욕, 성냄, 어리석음입니다. 이것이 번뇌의 주를 이루는 세 가지입니다. 번뇌는 여기서 파생되는데 이 세 가지 마음은 선하지 못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깨닫지 못한 사람은 너, 나 없이 누구나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번뇌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음, 양심 없음, 수치심 없음, 들뜸이 그것입니다. 이 네 가지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번뇌들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나타나,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번뇌가 있습니다. 탐욕에 관한 것은 탐욕, 사견, 자만입니다. 탐욕이 일어날 때는 사견과 자만심이 함께 붙어 다닙니다.
성냄에 관한 것은 성냄, 질투, 인색, 후회입니다. 또 게으름에 관한 것은 해태, 혼침이 있습니다. 아까의 질문에서, 기도를 했는데 무기력한 상태라 한 것이 바로 이 해태와 혼침의 번뇌에 오염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또 의심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번뇌입니다. 번뇌를 구별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와 같이 이해하시면 됩니다.
3. 수행자가 번뇌를 소멸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가장 확실한 수행법은 무엇인가요?
-이것은 불교의 핵심과 관계가 있습니다. 불교란 말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여실지견’이라 하고, 빨리어로는 ‘야타부탐’ 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법을 빨리어로는 ‘담마’ 라고 하는데 이 담마라는 말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 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바라거나 없애려고 합니다. 항상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갖지 않고 ‘그냥 거기에 그것이 있네’ 하고 보아야 그것이 갖고 있는 진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을 알기 위해서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선입견으로 봅니다. 보는 시각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감추어져 있는 진실을 보지 못합니다.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이 필요합니다. 알아차림이 있을 때 이익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은, 알아차림이 각성이기 때문에, 깨어서 봄으로써 번뇌가 그 순간 사라지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관념으로 보지 않고 실재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선입관을 갖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 새로운 사고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 있는 그대로 보는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전부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알아차릴 것, 이 두 가지가 병행되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이라는 기차표를 갖고 있으면 해탈로 가는 열차를 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비운다, 버린다, 내려놓는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말입니다. 비울 수 없습니다. 내려놓기도 어렵고 버릴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말들은 관념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문자에 빠지고 실천이 어려운 말들입니다.
마음을 비운다고 할 때, 비울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말 자체는 참으로 좋으나, 어떻게 비우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 내가 ‘욕심을 부리고 있네’ 하고 알아차리면 그 순간 비워집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때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또한 욕심은 버리기가 쉽지 않은데 버린다고 할 때는 구호에 그치기가 쉽습니다. ‘욕심을 부리고 있네’ 하고 알아차리는 순간 욕심이 소멸합니다.
그리고 내려놓는다는 말도 관념적입니다. 집착을 내려놓는다고 하는데 내려지지 않습니다. 내가 ‘집착하고 있네’ 하고 알아차릴 때, 순간적으로 소멸합니다. 지혜의 단계에 따라서 깨달음도 달라집니다.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대상을 겨냥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예전에는 걸어 다닐 때 망상이 너무 많이 떠올랐는데, 망상을 알아차리면서 정진하다 보니 이제는 걸어 다니면서 망상이 없어진 것을 느낍니다. 정말 신기한 것 같습니다. 정말 희한한 것 같습니다.
-알아차리는 방법을 아직 몰라서인지 조금 어렵습니다. 생각하기로는 마음이 1분에 몇 십번은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은데 정말 어렵습니다.
-대단한 통찰력이십니다. 마음은 1분이 아니라 1초에 생멸하는 현상이 엄청납니다.
부처님께서는 빛이 머무는 속도의 백만분의 일보다도 더 빠르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무상’입니다. 그리고 마음이란 것을 ‘내 마음’ 이 아닌,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으로 보시면 됩니다. 보통 알아차린다는 말은 ‘주시하다’ ‘지켜보다’ ‘깨어서 보다’ ‘있어서 보다’ 라는 말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망상을 할 때 망상하는 것을 알아차리면 망상이 끊어지고 번뇌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알아차림은 문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지기가 있으면 도둑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알아차림은 이러한 효과가 있습니다. 불교가 갖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용어가 알아차림이며, 팔만사천법문을 하나로 줄이면 바로 이 ‘알아차림’입니다. 그게 각성이니까. 알아차림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라 이해하시면 됩니다, 깨어서. 보다, 이해한다, 지켜본다, 받아들인다, 다 동의어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네’라고 그냥 지켜보세요, 하고 있는 일들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4. 수행을 하면서 집중이 되거나 지혜가 나서, 있던 현상들이 소멸되면 무심코 있던 것들을 다시 찾을 수도 있을 텐데요, 이런 경우는 어떻습니까?
-수행자에게 소멸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멸은 지혜가 나면 생기는 현상입니다. 제가 미얀마에서 처음 수행을 할 때, 몸의 느낌이 사라지고 호흡도 사라지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처음 경험했던지라 놀랐습니다. ‘내가 지금 살아있나?’ 하는 생각에 아랫배를 볼록 볼록 움직여 보았더니 호흡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조금 뒤 다시 호흡과 몸의 느낌이 사라지고....‘이게 무엇일까 대체...’ 하며 스승께 말씀드렸더니 ‘왜 소멸한 것을 찾는가? 사라진 것을 찾지 말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은 수행자에게는 불문율과 같은 사항입니다. 왜냐하면 소멸은 지혜가 발전해서 생긴 현상인데, 사라진 것을 찾아서 다시 호흡으로 가면 호흡이 있는 상태의 지혜의 단계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미 사라진 것은 더 높은 지혜의 단계로 올라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다시 더 높은 지혜의 단계로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라진 것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흘러가고 지나간 것들은 단지 흘러 보내야 합니다. 다시 과거로 회귀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자에게 과거를 묻지 말라는 말은 이러한 것을 의미합니다. 사라진 과거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항상 현재의 알아차릴 대상만이 중요합니다.
5. 우리가 살면서 모두 과거가 있기 마련입니다. 물론 좋은 기억도 있고 나쁜 기억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이미 소멸한 것을 다시 되새겨서 비생산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기억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훌륭한 능력 중의 하나가 망각입니다. 잊어버려야지 그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살 필요가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 건망증이 생기는 것도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현상의 하나라고 봅니다. 건망증은 불필요한 기억을 여과해내는 역할을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괴로운 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그분을 도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뒤 10년 만에 만나게 되었을 때, 대뜸 그 때의 고통스럽던 일을 꺼내게 되었습니다. 물론 걱정이 돼서 한 말이지요. 그러자 그분이 낯을 붉히며 “동생 왜 그래?”, “나 잊고 있었는데, 왜 동생이 아픈 상처를 끄집어내는가?” 하자마자 순간적으로 “미안합니다.” 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수행을 하지 않았을 때의 일이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면 이미 사라진 나쁜 기억을 끄집어내지 말아야할 일이라 느꼈습니다. 남을 괴롭히기 위해서 자꾸 아픈 기억을 환기시켜 상처를 내기도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악한 의도입니다.
6. 사념처 수행이 몸, 느낌, 마음, 법 네 가지인데 이 중에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통해서도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까? 아니면 마음이나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만 열반에 이르게 되는가요? 열반에 이르는 과정을 간략히 말씀해 주세요.
-사념처는 몸을 통해서 열반에 이를 수 있고요, 느낌, 마음, 그리고 법을 통해서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몸 하나 가지고도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념처면 어느 것이나 함께 작용을 합니다. 몸을 통해서도 열반을 알아차릴 수 있으니까요, 몸의 호흡을 열심히 보셔도 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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