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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자가 본 ‘종교개혁 500주년’에 대한 단상

장백산-1 2017. 6. 16. 22:42

특별기고 

종교학자가 본 ‘종교개혁 500주년’에 대한 단상 3


2017/02/09 16:59 입력



통일한국의 역사와 민족 아우르는 종교신학 작업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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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가톨릭 개혁 500주년에서 진정한 지구촌 종교개혁의 원년으로
신학은 다양한 학문분과가 있다. 그만큼 그리스도교계가 세계의 학문계를 풍미하며, 축적된  역사적 전통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도교’와 ‘신학’의 이름으로 세계 문명의  중심축을 이루던 지중해와 대서양의 시대는 갔다. 

우리는 지구촌의 종교가 합류하여 동시대에 같은 문제를 고민하는 역사시대에 첫 세대로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불교 등의 세계종교는 물론, 분절된 인류이성이 만든 다양한 현대의 분과학문 등의 지성의 산물이 이제 닫힌 창문을 열고 대화하(려)는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가 종교문화의 역사라는 관점에 시야를 한정해 보더라도 축 시대에 발아되고 형성된 종교문화는 한정된 지역의 시대적 문제의식을 안고 형성된 종교문화이다.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신학은 유럽과 미국 등의 지역적 사고의 산물이며, 불교 등의 동아시아 전통은 인도, 아시아의 문제를 담지한 종교문화이며, 이는 유교도 그 예외가 아니다. 즉 모든 경전해석의 패러다임과 축적된 제도화된 종교의례는 개별 시대의 종교고고학의 지층을 이루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개신교에서 기념하는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에는 여전히 서구와 그리스도교 중심적 사고가 내포된 개념이다. 만약 종교개혁 500주년이 한국의 입장에서 명실상부한 종교적 언어로 인정한다면, 개신교계는 그리스도교가 전래한 이후 한국에 존재하는 유교, 불교, 무교, 천도교, 증산교, 원불교 등과 어떠한 호응관계를 가져야 하는지 진지한 종교적 성찰을 해 보는 것도 중요한 종교사업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종교개혁 500주년은 말 그대로 개신교 발단의 원년이었지 세계의 다양한 종교개혁의 원년은 아니다. 이런 그리스도교의 관습적 용어의 대표적인 것은 ‘종교신학(Theology of Religions)’이란 학문분과이다. 

신학(神學, theology)의 어원은 신(theos)에 관한 말(logia)이다. 그리스어로 ‘θεολογια(데오로기아)’는 신학, ‘θεοV(데오스)’는 신, ‘λογια(로기아)’는 말, 즉 하나님에 대한 논술 혹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이는 그리스도교만을 표준으로 하여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를 묻는 ‘오만’이 담긴 표현이기도 하다. 그것이 배타주의이든 포괄주의이든 다원주의이든 이미 그리스도교만이 구원의 유일(성)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전개되는 신학적 담론이다. 개념은 해석에 선행한다. 보라 그리스도교는 Christianity이며, 불교는 Buddhism, 유교는 Confucianism, 도교는 Taoism, 무교는 Shamanism으로 일반적으로 표기한다. 그리스도교와 종교들이다. 

우리가 학문적으로 깊이 논증하지 않더라도 종교신학이란 용어는 큰 범주인 ‘종교’를 ‘신학’이라는 작은 범주로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필자는 그리스도교계에서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에 대해 ‘시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신학을 하려면 정말 다른 종교에 대한 폭넓은 견식을 가지고 신학을 해 달라는 하나의 당부이다. 물론 한국의 일부 신학자들은 어려운 신학적 환경에도 이런 학문적 작업을 하고 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명실상부하여야 한다. 한국의 다종교적 상황에서 ‘종교신학’이 가진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교 일원적인 종교적 색채에서 형성된 서구교리와 구원의 체계는 유·불·도 등의 다른 종교적 전통에 훈습된 한국의 상황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서구 신학자의 신학적 문제제기와는 다른 종교적 환경에서 우리 신학자는 고민하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유럽에서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별만이 필요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교리하면, 우리의 신학적 작업은 그리스도교 이외에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느냐는 것은 전혀 별개의 질문이며, 이에 대한 것은 우리만이 가지는 신학적 문제인 것이다. 주체적 신학과 주체적 신앙은 그래서 필요하다.  

세계의 다양한 국가 가운데 한국만큼 세계적인 종교적 사유가 합류하여 종교 간의 세력적 균형을 이루고 있는 국가는 거의 없다. 2016년 12월 19일 통계청이 발표한 ‘2015년 인구 주택총조사 표본 집계 결과’에 의하면 무종교인 2,750만명(56%), 종교인 2,150만명(44%), 이 가운데 개신교 967만 명(19.7%)와 가톨릭 389만 명(7.9%)을 합하여 그리스도교 1,456만 명(27.6%), 불교 761명(15.5%) 등이다. 이에 유교문화와 한국의 기층적 신앙이라는 무교와 풍류도, 한국 신종교 등을 포함하면 다양한 세계적 종교지형의 압축판이라고 하여도 무방하다.  

위대한 사상은 늘 주변부에서 발생한다. 이스라엘의 헤브라이즘이 헬레니즘 세계를 통해 유럽 중세를 풍미하였으며, 개신교의 일군의 프로테스탄트들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팍스 아메리카의 초석을 다져 현대에 풍미하고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본 인류의 약사라면, 앞으로는 진정한 종교개혁의 원년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이런 거시적인 역사적 흐름에서 볼 때 우리가 말하는 종교개혁 500주년은 ‘가톨릭 개혁’을 통한 유럽 중세의 사회개혁의 큰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개념이다. 즉 그리스도교라는 일원적 종교세계에서 이해될 수 있는 개념이며, 계몽주의, 종교개혁, 산업혁명, 제국시대 등은 세계 대전을 거쳐 서구 문명을 지탱해 온 정신적인 양대 축이었던 헬레니즘에 의한 헤브라이즘의 해석적 전통은 그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를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인류는 아직까지 축 시대의 사유 전통을 뛰어넘지 못하였다고 카렌 암스트롱이 『축의 시대』에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일색의 일원적 전통 안에서 이루어진 ‘종교개혁’이 아니라, 종교와 종교, 종교와 과학, 지구와 우주, 물질과 생명이 거대한 합류의 시대에 모든 종파경전은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낡은 문명과 새 문명이 부딪치고 있고 한국의 역사적 환경은 새 문명의 알짬을 만들 수 있는 역사적 고민을 하는 현장이다. 낡은 문명의 위험과 새 문명의 기회가 공존하는 한국은 그야말로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낡은 자본주의와 낡은 공산주의가 대결하는 극단의 역사적 대결이 맥아더의 말처럼 신학전쟁이라면 통일한국의 새로운 생활패러다임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찾아내어야 한다. 역사를 떠난 신학, 민족을 떠난 신학, 현대 학문을 떠난 신학은 생각할 수 없다. 다 경전적 전통에 익숙한 한국은 분열과 상극의 낡은 문명을 상생과 조화의 새로운 문명을 창출하는 국가로 거듭나야 한다. 

낡은 자본주의와 낡은 공산주의가 공존하는 역사적 현장 한반도에서, 다종교적 전통의 종교문화에서 한국은 옛날 이스라엘과 영국이 했던 새로운 문명의 틀을 통일한국의 새로운 문명의 생활체계로 만들어내어야 하는 것이 세계사적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한국 신학자와 목회자의 역사적 사명이 아닌가!

말 그대로 지구촌의 진정한 ‘종교개혁’은 한국 그리스도계의 숙제이자 역사적 사명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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