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헛된 삶과 참된 인생’ / 청담스님

장백산-1 2017. 11. 22. 22:11

‘헛된 삶과 참된 인생’ / 청담스님


法(법), 부처(佛),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중생과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법을 깨치고자 하면 

대중과 함께 더불어 사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본래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

인지, 또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 것인지, 그저 생겨났으니 막연히 살 수 있을 때까지는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것인지,....고달픈 삶에 쫓기다 보면 이런 질문들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턱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람들의 각박한 현실에서의 일상생활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생각하기 이전에 벌써 이미 살고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나는 잘 사는 삶이 뭔지를 가지고 말하보려 한다. 농사짓는 사람이나 장사하는 사람이나 

물고기잡는 사람이나 공장직공, 정치인, 학자, 종교지도자 심지어는 석가모니, 공자, 노자, 예수에게 

물어 보더라도 잘 살려소 하는 마음, 이 생각만은 똑같이 가지고 있으리라. 이 글을 쓰는 나도 그렇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그렇게 잘 살아보려고 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삶을 잘 산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인간이면 누구나 할 것없이 잘 살아보려는 마음을 

가졌을 것인데 잘 살 수 있는 어떤 법칙이 필요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잘 사는 방법을 말하기 전에 먼저 어떤 것을 잘 사는 인생이라고 하는가를 묻고 싶다. 

전 세계의 경제를 한 손에 쥐고 주무르는 세계적인 재벌이나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제왕이 되거나 또 

사자후 같은 웅변을 토하며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서늘하게 만들고, 천하의 독자를 펜 하나로 놀라게 

하는 큰 문호가 된다면 이것을 일러 잘 사는 삶이라고 할 것인가? 


부귀와 명예를 헌신짝같이 던져버리고 뜬구름과 흐르는 물과 같은 살림을 밑천 삼아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양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을 일러 잘 사는 사람이라 할 것인가? 아니다. 이 모두가 겉치레의 잘 사는 

방법이 될지는 몰라도 참된 의미의 잘 사는 방법은 되지 못하리라. 


그렇다면 어떤 삶이 잘 사는 인생인가? 부족함이 없는 마음이 잘 사는 것이요, 구할 것이 없는 마음이 

잘 사는 것이요, 원망함이 없는 마음이 잘 사는 것이요, 성냄이 없는 마음이 잘 사는 것이요, 미움과 

질투가 없는 마음이 잘 사는 것이요, 공포와 불안이 없는 마음이 잘 사는 것이요, 강제와 속박이 없는 

마음이 잘 사는 것이요, 해탈과 자유가 있는 마음이 잘 사는 것이요,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보다 위없는 삶이 잘 사는 것이요, 마음에 만족한 삶이 잘 사는 삶이다. 


인간의 일평생을 백년이라 한다면 이 백년 동안을 흔히 살아간다고 한다. 이 귀중한 한평생 동안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또 누구를 위해서 살고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흔히 이런 질문들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머리엔 흰 머리카락이 늘어나고 얼굴엔 주름살이 잡히곤 한다. 만약 인간들이 이런 이유를 

모르고 그저 먹고 자고 성생활만 즐기며 살아간다면, 이 같은 인생은 저 짐승들의 삶과 무엇이 다른가?  


사람들은 보통 흔히 인생을 ‘살아간다’ 말한다. 그러나 살아간다는 말은 아무런 내용도 없는 빈 말이다. 

가령 인간이 백년을 살 권리를 갖고 이 세상에 와서 하루를 살았다는 말은 하루를 죽었다는 말 외에 또 

무슨 다른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까 일년을 살았다는 말은 곧 일년을 죽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살아간다는 말은 죽어간다는 말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인간들이 농사짓고, 장사하고, 정치하고, 경제하고, 종교를 믿는 것은 죽지 않으려고 하는 것인데 그래도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운명이 사람들의 인생이 아닌가. 이는 참으로 비참한 사실이다. 권력, 재력, 그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죽음이라는 일생일대의 큰 문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인생은 죽음이라는 큰 구렁이 입에 뒷다리를 물려 들어가는 개구리의 운명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런 인간들이 잘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을 볼 때는 정말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구렁이한테 물린 개구리는 구렁이 뱃속에 완전히 들어가기까지 오직 구렁이가 결정할 것이지 개구리에

겐 아무런 자유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죽음도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죽음 그 자체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천하의 영웅과 만고의 호걸도 이 죽음 앞에선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그저 순종해야 하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이 같은 절박한 죽음이라는  현실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죽음은 마치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처럼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아니 죽음이라는 구렁이 입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세상에서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과학자, 종교가. 철학자, 정치인, 기업가, 선생, 농부, 광부, 장사꾼 등 

모든 사람이 누구나 다 업보중생(業報衆生, 지은 업으로 인해서 태어난 존재)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보는 견해도 역시 업안(業眼)에 걸러 보는 것밖에는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지 못함이 또한 사실이다. 우리 인간들 모두가 이 업안(業眼)을 벗어버리고 진리(眞理)의 눈, 즉 심안

(心眼)으로 세상을 보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심성수양(心性修養), 즉 어두운 마음을 걷어내고 근본

성품이 밝게 세상을 비추게 함이니 이것이 곧 견성(見性), 즉 근본성품을 본다 라는 말이다. 


견성(見性) 했다 함은 자기 근본성품, 텅~빈 바탕 空寂靈知, 텅~빈 바탕 진공의식, 일체만유(一切萬有)의 

근본인 근본성품(根本性稟) 자리, 곧 진리(眞理)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자리이니 이 진리 자리인 본심자리

, 근본성품를 맑고 밝고 청정히 가져 만사만리(萬事萬里)를 통찰할 줄 아는 지혜의 눈을 터득하는 것이다. 

근본성품은 사람들의 육안(肉眼)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신비하고 묘하게도 근본성품은 각자가 모두 지니고 

있으면서도 못 보고 못 찾는 것이 묘한 이치라 할 수 있겠다. 


그럼 어떻게 하여야 각자가 본래 이미 완전하게 지니고 있는 근본성품을 보고(見性) 고달픈 이 고해(苦海)

이 세상, 이 사바세계에서 헤어날 수 있는가? 범부 중생은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분별하는 어리석은 

마음, 즉 삼독심(三毒心, 세 가지 독이 든 마음)과 재물(돈)에 대한 탐욕, 섹스에 대한 탐욕, 먹을 것에 대한 

탐욕, 오래 살고자 하는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등 다섯가지 쾌락을 누려 보고자 하는 중한 병에 걸린 환자

들이다. 


그러니 이 탐진치 삼독심과 오욕의 병을 고치지 아니 하고는 자기 근본성품을 결코 볼 수 없나니, 우선 먼저 

삼독심과 오욕병을 버리고 육바라밀(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실천해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해서 죽음에 직면해 있는 일체 중생이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서 죽음에 직면해 있는 일체 중생이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절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흔히 이 세상 모든 것, 우주삼라만상만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세계를 사바세계라 한다. 모든 생명들

이 살아가는 모습은 서로 빼앗고 서로 죽이고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수라장(修羅場)이라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 현실세상은 과거 무량겁을 내려오며 서로서로가 제각각 지어놓은 삼업의 업력(業力)으로 만들

진 인과응보(因果應報)의 결산장(決算場)이기 때문에 서로서로가 지은 업의 영향력과 그 업장으로 괴로운 

고통이 눈앞에 전개되는 것이다. 


인간들은 이 같은 현상이 결코 회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인과응보의 법칙(業因緣果報)라는 것을 깊이 깨달

아서 자기 자신의 근본성품을 곧장 곧바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근본성품을 보라 함은 나라는 존재의 본질, 

나라는 존재의 실체, 나라는 것의 존재성(存在性)을 알라 함이요, 나의 실체를 알라함은 나의 영원한 본질을 

터득하라 함이다. 인간이 이것 이외에 또 무슨 할 일이 더 중요하단 말인가? 


1969.6.29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 장로원장 재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