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와 화엄] 반야의 공(空)은 무슨 뜻인가?
반야심경에서 空의 이해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空을 올바로 이해해야 반야에 근접하게
되니까요. 반야심경의 空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연기공성(緣起空性)로서의 空입니다. 연기공성으로서 空이라 함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영원불변
하는 독립적인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인연 화합에 의한 가합물(假合物, 잠시 임시적으로
나타나 있는 허상)에 불과하므로 이 세상 모든 것은 空이라는 말입니다. 연기공성 이것은 이해하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문제는 두 번째 空의 의미입니다.
空의 또 하나의 의미는, 물질세계 그 자체가 그대로 空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
이 물질세상 모든 것이, 空으로 변해서 空이 아니고, 분석되고 해체되어 空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냥 있는 그대로 空 그 자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설명하는데 현대
물리학을 원용하기도 합니다.
즉, 양자(양자, quantum)를 포함한 모든 물질은 원자핵(중성자+ 양성자)과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자핵과 전자 사이는 너무 멀어 원자핵과 전자 사이는그야말로 텅~빈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원자가 축구장 크기만 하다면 원자핵은 탁구공만한 하고 전자는 그 축구장 주위를 온동하는
것으로 원자핵인 탁구공과 축구장 사이는 텅~비어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물체가 다른 물
체를 자유롭게 아무 장애도 없이 통과하는데는 원칙적으로는 문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이 세상과 어울랴 사는 현실세계는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벽을 통과할 수 없고 모든 물질은 다른 물질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세상
에서 인간이나 물체가 인간을 사물을 통과할 수 없는 그것은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하듯 물질이 空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각각의 물질들이 가지고 있는 전자기력(電滋氣力)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각각의 물질이 갖고 있는 각각의 전자기력이 척력(斥力)으로 작용해서 서로 서로 반발하며 서로의
물질을 밀어 내므로 사람들은 벽을 통과할 수 없고 물질적 장애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실지로 전자기력을 갖지 않는 중성자(中性子)는, 우리가 유령 영화에서 보듯이 그대로 벽을 통과하고
어떤 물질도 서로가 서로를 통과하는데 장애를 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설명도 이해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空을 ‘眞理의 根本자리’라고 정의하면 空에 대한 이해가 좀더 쉬워질지 모르겠습니다.
즉 空은 문자 그래도 텅~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이 우주에 충만한 근본진리자리를 ‘空’이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우주에 충만한 근본진리자리를 정의내리는 것은 가르침마다 다른데, 가령 불교에서는 일심, 불성,
여래장, 아뢰야식, 본래면목, 무아, 진아 라 하지만 도교에서는 무극(無極), 기독교는 神(God)이라
하는 것입니다. 부르는 말은 다르지만 나름대로 우주에 충만한 근본진리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空을 우주에 충만한 근본진리자리로 이해하면, 공은 바로 진리 그 자체가 됩니다. 이렇게 보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말은, 물질이 그대로 진리요 진리가 바로 물질이란 말이 됩니다.
이것은 반야심경에 이어지는 다른 말에도 적용되는데, 그렇다면 수상행식도 진리요 무명도 진리요
무명이 없음도 진리라는 말이 됩니다. 진리 속에 수상행식이 없고 진리 속에 안이비설신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반야관(般若觀)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진리입니다. 생과 사도 진리요,
윤회도 진리요, 무명도 진리요, 무명이 다함도 진리입니다. 망상도 진리요 깨달음도 진리입니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던, 모든 이분법적 사고, 분별심이 소멸됩니다.
무명이 있고 깨달음이 있으며, 무명은 버리고 깨달음만 찾는 사람들의 습(習)의 근거 자체가 소멸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반야지(般若智)요 화엄관(華嚴觀)입니다.
사람들은 그동안 너무나 사물을 이분법적, 즉 상대적으로 상대성에 입각해서 분리 분별해서 보았
습니다. 이분법적 사고를 지양하는 불교도 예외가 아니라, 초기불교에서는 대부분을 따로 분리해
보았습니다.
번뇌가 따로 있고 보리가 따로 있고, 무명이 따로 있고 지혜가 따로 있고 그래서 괴로움이 있고 그
괴로움이 다하는 열반이 따로 있고 깨달음이 따로 있다고 본 것입니다. 괴로움의 세계가 따로 있고
영원한 기쁨의 세계가 따로 있다고 보아 한사코 이 세계를 버리고 저 땅으로 가고자 집착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고로움)를 멸하려면 집착을 버려야 하고 열반에 가려면 팔정도를 닦아야 한다고 말한 것
입니다. 업장 때문에 공부가 안 되니 업장은 무조건 소멸해야 하며, 탐진치 때문에 공부가 안 되니
계정혜로 다스려야하는 대상으로서의 업장이나 탐진치를 본 것입니다.
반야는 그런 분리 분별을 모두 타파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렇게 둘로 나눠져 있는 것 같던 세계가
사실은 하나이며, 번뇌를 떠난 보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반야관입니다. 그러므로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다며 반야심경은 사람들이 이 때까지 있다고 착각해온 이 세상 모든 것이 텅~비어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고집멸도까지 없는 것입니다. 파할 괴로움도,
끊어야할 집착도, 가야할 열반도, 닦아야할 팔정도 까지도 없다는 말입니다.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반야!뿐입니다. 모든 것이 반야입니다. 무명도 반야, 무명이 다함도 반야,
생사도 반야, 열반도 반야입니다. 이런 반야관에서는 업장도 반야, 탐진치도 반야입니다. 지금껏
무상하고 허망하다고 여겨온, 그래서 무가치하다고 여겨온 이 세상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인간이
그렇게 소중히 여기던 세계와 조금도 차별이 없는 진리, 무차별 반야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까지 사람들을 가로막던 벽이 그대로 무너짐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무너진 벽 사이로 지금
까지 보지 못했던 강열한 빛이 쏟아져 들어옴을 봅니다. 그것이 바로 '반야'입니다.
그것도 그냥 반야가 아니라, '마하반야'입니다.
물질계를 진리의 나툼으로 보는 것은 불교의 여러 사상 중 유독 화엄 사상의 특징입니다.
화엄은 이 세상을 진리의 나타남으로 보고, 따라서 현실을 결코 도외 시 하지 않습니다.
현실을 중요시 하며 현실을 떠난 그 어떤 진리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화엄의 확고한 입장입니다.
이렇게 보면 반야심경과 화엄이 만납니다. 반야의 空와 화엄이 둘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반야와 화엄이 다른 것으로 알지만, 이렇게 반야와 화엄이 만나는 것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외치시며 보현행원으로 나아가신 광덕큰스님의 반야관이, 마침내 이런
자리에서 화엄과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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