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 스님의 전심법요
41. 불성과 여래장의 선사상 연관성
여래란 곧 모든 법에 여여하다는 뜻
원문: 배휴가 물었다. “불성과 중생성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선사가 답했다. “성품에는 같고 다름이 없다. 그렇지만 삼승[성문·연각·보살승]의 가르침에 따르면, 불성이 있고 중생성이 있다. 이는 삼승의 인과에 따라서 곧 같고 다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불승 및 조사가 서로 전하는 바로 보면, 이런 일들은 설하지 않으며 오직 일심만을 가르친다.…‘오직 일승의 도가 있을 뿐이요, 둘도 셋도 없다. 다만 부처님의 방편설을 제외한다.’…만약 견처가 있다면 곧 외도라고 한다. 외도는 모든 견해를 좋아하고, 보살은 모든 견해에 있어 동요되지 않는다. ‘여래’라고 하는 것은 곧 모든 법에 ‘여여하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미륵도 또한 이와 같으며, 수많은 성현도 이와 같다. ‘여’는 곧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소멸되는 것도 아니며, 보는 것도 아니고 듣는 것도 아니다.
대승·조사선은 일심에 있어서 중생과 부처가 동일하다는 사상 견지
깨달음 가능성 상징인 여래장은 중국에서 선종 발전하는 단초가 됨
해설: 배휴가 ‘불성과 중생성에 차이점’에 대해 묻고 있다. 황벽의 돈법(頓法) 진리는 곧 초기 대승불교 경전과 여래장계 경전에서 전하는 사상과 똑같은 사상이다. 대승경전이나 조사선에서는 일심(一心)에 있어 중생이든 부처이든 모두 똑같다는 사상을 견지한다.
특히 ‘화엄경’의 일심(一心)사상과 성기사상(性起思想)은 매우 적극적으로 돈법(즉각 깨치는 방법)이 표현되어 있다. “마음과 부처,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고 하는 내용이 그것이다. 다음으로 ‘화엄경’이 조사선에 미친 사상은 성기(性起)이다. 성기(性起)는 불성현기(佛性現起), 근본성품이 드러남이 줄여진 말로서 성(性)의 기(起), 즉 성(불성, 근본성품)의 현현(顯現)이다. 여래의 지혜인 (여래의)성품이 그대로 드러난(顯現한) 존재가 중생이다. 중생의 마음 가운데 지금 바로 일어나고 있는(現起) 그대로가 바로 여래(如來)의 성기(性起)라는 것이다. 이는 수행에 의해 부처(佛)가 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 본래 부처를 이루고 있다는(本來佛, 본래 부처다는) 뜻이다. 당대의 임제 의현이나 우리나라 진각국사 혜심, 나말여초에 선사들이 화엄사상에 밀접했던 점들을 볼 때, 선(禪)과 화엄사상(華嚴思想)은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오직 일승(一乘)의 도(道)가 있을 뿐이요, 둘도 셋도 없다.…’는 말은 ‘법화경’의 ‘방편품’에 설해진 내용이다. 깨달음의 길이 여러 갈래이지만, 목표인 부처가 되는 것이 바로 일승(=대승)이다. 누구나 성불할 근기를 갖고 있어 일승인 것이다. ‘방편품’에서는 “모든 부처님은 방편의 힘으로 일불승에서 삼승을 설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삼승(三乘)은 방편(方便)이요, 오직 일승(一乘)만이 진실(眞實)이라는 사상(思想)은 ‘법화경’을 관통하는 대들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이어지는 ‘외도(外道)는 온갖 견해(見解)를 좋아하고, 보살은 모든 견해(見解)에도 동요(動搖)되지 않는다’는 내용은 ‘유마경’의 ‘문수사리문질품’에 나온다. 경전에서 원래는 “모든 마군(분별 망상 번뇌 견해)은 生과 死라는 분별 망상을 좋아하고, 보살은 생과 사를 하나로 삼아 버리지 않으며”라고 하면서 어록 내용이 전개된다. 곧 진정한 수행자는 분별 망상 번뇌조차도 나쁜 것이라고 버리지 않고 분별망상 번뇌를 수행의 방편으로 삼고, 더 나아가 ‘좋다 나쁘다’는 분별심 조차 갖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견해(見解)에도 마음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不動心)을 견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어 ‘여래(如來)라고 하는 말은 곧 모든 법(法, 존재, 것, 현상)에 흔들리는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 여여(如如)하다는 뜻이다’는 말은 ‘금강경’의 “여래자즉제법여의[如來者卽諸法如義]”와 동일하다. 또 금강경 29품에서도 “여래란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고, 어디로 간 바도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여래라 한다(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와 아울러 살펴볼 수 있다. 이것이 ‘여래’에 대한 정의다. 여래라고 할 때, 여래는 ‘있는 그대로가 곧 진실’인 것, ‘진리인 것’을 의미한다. ‘대지도론’에서는 여래(如來)를 법의 모습 그대로, 법상(法相) 그대로, 진실의 모습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여래를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지혜로써 제법(諸法, 이 세상 모든 참다운 존재))의 실상(實相)을 터득한 사람을 여래(如來)라고 부른다. 제법실상, 즉 제법공상(諸法空相)임을 깨우친 사람은 그 자체로 여래이기 때문이다.
여래를 진여(眞如) · 진리의세계로부터 우리들의 세계로 오신 분으로 해석하지만, 그 반대로 진리의 세계로 갔다고 해서 여거(如去)라고도 한다. 여거는 석가모니부처님이 깨달았다는 측면으로, 여래(如來)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한다. 여래(如來)의 뜻이 이렇기 때문에 깨달음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단어가 여래장(如來藏)이다. 여래장설은 후대 학자들에 의해 비판의 소재가 되기도 하지만, 중국에서 선종이 발전하는 단초가 되었다. 전심법요가 황벽이 경전에 입각해 설한 법문임을 볼 때, 당시 선사(禪師)였던 황벽의 면모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1416호 / 2017년 11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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