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어록과 마음공부 (법상스님 원광사아카데미-18.6.08)-2 녹취 by 하이얀마음
육조 혜능스님이 오조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나자마자 딱 부른 게송입니다. ‘야 자성이 이처럼 본래 청정했음을 어찌 기대나 했겠습니까(何期自性本自淸淨)’ 자성이 본레 청정함을 상상조차 못했다, 이런 표현을 쓰지요. 불교공부를 교리적으로 많이 한 사람들의 머릿속엔 ‘깨달음은 이런 걸 거야’, 라는 깨달음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요. 깨달음이라는 상이, 법상이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데 깨달음은 머릿속에 그려져있는 깨달음의 그림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불교공부를 아무리 많이 해서 풍부한 불교에 관한 지식을 지닌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깨달음은 이런 걸 거야’, 라고 머릿속에서 그림 그리고 있는 깨달음과는 완전 다르다 라는 표현을 씁니다. 혜능의 게송에서도 나타나지요. ‘야 자성이 이처럼 본래 청정했음을 어찌 기대나 했겠습니까?(하기자성본자청정 何期自性本自淸淨)’ 상상조차 못했다. 내가 기대하고 상상했던 것과는 좀 차이가 나는 것이었거나. 왜냐면 상상하고 기대하는 거는 분별심(分別心, 분별을 하는 생각 마음) 안에서의 일이잖아요.
사람들의 생각과 비교, 판단, 분석, 해석, 개념으로 분별하는 것 안에서만 상상하고 기대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자성은, 우리의 본성(근본성품)은, 나라는 존재의 실상은, 깨닫고 나면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면 우린 본래 이미 완전하게 깨달아 있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의 근원, 내 존재의 근원, 청정한 자성이 본래 이런 존재라는 거예요. 나는 본래 청정했다. 한 번도 오염된 적이 없다. 우리는 죄를 지으면 오염된다고 생각하고 복을 많이 지으면 나는 되게 청정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해요.
뭐∼ 청정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불교에서도 청정비구 이래서 비구라는 것은 결혼을 안 한 스님을 비구라고 남자스님을 비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自性 淸淨, 즉 승보 이렇게 얘기합니다. 즉 승보, 스님의 규정, 스님의 정의가 뭐냐 하면 자성이 청정한 줄 알면 그것이 승보다, 이러거든요. 머리 깍은 사람이 스님이 아닙니다. 자성이 청정한 사람을 승보(僧寶)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성이 본래 청정하다. 사람들이 죄를 아무리 많이 지었어도 우리의 청정한 자성은 없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99명을 죽였던 앙굴리마라도 자기 성품 하나, 청정한 자성을 확인하고 나니까 그 자리에서 바로 아라한과를 증득하는 비구가 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왜? 죄라는 관념은 청정한 자성을 오염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제 이런 표현을 씁니다. 큰 스님들이 많이 하는 표현 중에 “나는 선악을 논하지 않는다.” “깨닫고 깨닫지 못한 것을 알려면 청정한 자성, 근본성품을 확인했는지 못 했는지 그것을 논할 뿐이다.” “이 공부는 착하게 사는지 아닌지를 묻지 않는다.” “착하게 살고 악하게 살고를 묻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선과 악이라는 분별이 주안점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선에는 필히 상대하는 악이 있잖아요. 선악은, 선은 취하고 악은 버려야 되는 취사간택심, 중생심, 분별심이라는 거지요. 이 공부는 악을 멀리하고 선을 좇는 공부가 아니라 선과 악이라는 분별을 넘어서는 공부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에서는 능력 있고 능력 없고, 선하고 악하고, 복을 짓고 복을 안 짓고, 이런분별심들 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실 우리는 옛날에 큰스님들이 되게 무섭고 법이 있는 큰스님들을 되게 겁내거나 이런 어떤 뉘앙스도 일부 있는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야 내가 저 큰스님들 앞에 가면 저분들이 내가 여태까지 지은 잘못을 훤히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러면 큰 스님이 나를 미워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석가모니부처님을 보세요. 아흔 아홉 명을 죽인 앙굴리마라 그가 와서 부처님께 법을 물은 것도 아닌데 부처님이 스스로 알굴라마라를 제 발로 찾아가서 백 번째 애를 찾아 눈에 혈안이 되어 백 명 째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가 백 번째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이제 소문이 나서 아무도 앙굴리마라가 있는 숲으로 가지도 않으니까.
한 명을 더 죽여서 백 명을 채우긴 채워야 되겠는데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백 명을 채워서 죽여야 되겠다,’ 라는 그 생각이 너무 강해서 ‘어쩔 수 없다, 우리 엄마라도 죽여야 되겠다.’ 그래서 엄마를 죽이려고 가는 길에 석가모니부처님이 앙굴라마라 앞에 나타나신 거거든요. 부처님의 자비심은 이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전에 와서 ‘부처님이 나를 미워하지 않으실까?’ 예를 들어 많은 종교에서 우리는 그렇게 착각을 해요.
부처님 앞에 가면 죄인들은 ‘부처님이 우리를 되게 미워하실 거야.’ ‘부처님이 나에게 죄를 물으실 거야.’ ‘내가 죽고 나면 염라대왕이 내가 살아생전에 지었던 죄를 다 알고 있어서 내 죄를 물어 나를 지옥에 보낼 거야.’ '신과 함께' 라는 영화는 이 불법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잘못된 영화입니다. 그냥 단순한 방편이지요. 단순한 방편을 그냥 재밌게 만들어놓은 겁니다.
신과 함께 라는 영화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방편으로 그 영화 감독이 그렇게 만든 것은 잘한 일이지요 잘한 일인데. 신과 함께를 보면 지옥에 가지 않는 게 엄청 어렵잖아요. 지옥에 가지 않는 게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일인데 지옥이라는 거 자체가 없을 뿐 아니라 염라대왕이 심판을 하고 어떤 잘못을 해서 아주 작은 거 하나라도 잘못이 있으면 엄청난 벌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전혀 그럴 수가 없습니다.
부처라는 것, 자비라는 것, 지혜라는 것, 진리의 자비는 본래 청정함이기 때문에 본래 이미 청정하기 때문에 본래의 청정성은 결코 오염될 수가 없기 때문에 나는 본래 이미 완전한 부처입니다. 내가 아무리 100명을 죽인다 할지라도 나의 본바탕은 본래 청정하다. 심지어는 연쇄살인마 같은 사람의 본바탕도 본래 청정한 거예요 사실은.. 연쇄살인마를 두둔하려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 사람의 겉에 드러난 현상세계에서의 사법계(事法界)로서는 아주 나쁜 놈이지요. 중한 벌을 받아야 되지요. 그러나 이법계(理法界)에서 봤을 때 이치, 진리에서 봤을 때는 그의 본성은 하나도 오염될 수가 없습니다. 그 연쇄살인마도 (죽비를 치며) 이 죽비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거든요. 살인마도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움직이고 밥먹고 자고 똥싸고 하거든요. 보는 성품이 있고 듣는 성품이 있는 그 근본성품자리에서는 선과 악이라는 분별을 넘어서는 그 자리는 하나도 오염된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분별하는 습관, 분별심, 분별식, 이 습관이 오염되어 있는 것일 뿐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 어떤 두려움도 죽음이라는 두려움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은 무엇이겠어요? 지금까지 나는 죽고 나면 염라대왕 앞에 가서 심판을 받는 줄 알았는데 나는 죽어서 지옥 가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구나. ‘자성의 이 본래 청정함을 어찌 기대나 했겠나?’ ‘본래 죄 없음을 어찌 기대나 했겠나?’ 이 세상은 본래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자성이 이처럼 본래 청정함을 어찌 기대했겠습니까? (何期自性本自淸淨)
자성이 이처럼 본래 생멸하지 않음을 어찌 기대했겠습니까? (何期自性本不生滅)
자성이 이처럼 본래 모자람 없이 완전함을 어찌 기대했겠습니까? (何期自性本自具足)
자성이 이처럼 본래 흔들리지 않음을 어찌 기대했겠습니까? (何期自性本無動搖)
자성이 이처럼 만법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어찌 기대했겠습니까? (何期自性能生萬法)
(선어록과 마음공부 p118)
‘자성이 이처럼 본래 생멸하지 않음을 어찌 기대했겠습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온갖 일이 생기고 또 그 일을 해결하고 괴로운 일이 생기고 괴로운 일을 해결하고 문제가 생기고 문제를 해결하고 내 인생에서는 파란만장한 온갖 일들이 벌어지는 것처럼 느껴요. 온갖 파란만장한 일들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돈이 생겼다가 돈이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지고요.
명예가 생겨났다가 명예가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지고, 나라는 존재가 생겨났다가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처럼 느낀단 말이지요. 수많은 좋고 나쁜 일들이 생멸, 생멸 생멸하면서 내 앞에 등장하면서 나를 못살게 구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자성이 이처럼 본래 생멸하지 않음을 어찌 기대나 했겠습니까?(何期自性本不生滅)” 라고 하듯이, 모든 것은 일어나는 그대로 본래 일어난 바가 없는 것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에 내가 생각으로 그것들에게 의미부여를 해서 ‘나는 이렇게 돼야 돼.’ 하고 의미부여를 한 사람은 거기에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뭐 로또를 하나 사는데 보통 로또 사는 사람은 대부분 당연히 안될 거 알고 그냥 재미로 샀을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예를 들면 로또 사는 사람이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반드시 될 거라는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로또를 샀다고
그러면 자기 스스로 헛된 기대를 한 거잖아요. 뭐 딴 것도 비슷하지요. ‘뭐 내가 아파트를 사거나 아파트 값이 올랐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도 비슷하고. ‘내 자식이 공부는 조금 못하지만 어떻게 운이 좋아서 저 대학에 합격했으면 좋겠다.’ 이것도 좀 비슷하고. 뭔가 기대를 하는데 기대가 크면 클수록 어떻겠어요? 크면 클수록 ‘내 자식이 반드시 인 서울은 해야 돼.’ 아니면 ‘서울대를 반드시 가야 돼.’
‘뭐 인연 따라 가면 되고 아니면 말고. 가면 좋은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뭐.’ 이렇게 생각하면 괴로울 게 덜하지요. 그런데 ‘반드시 이 대학은 가야 돼’, 라는 집착이 크면 클수록 내가 만든 집착, 자승자박으로 내 스스로 그 마음을 묶어놨기 때문에 그 일이 벌어지지 않을 때 더 크게 괴로워합니다. 남들이 이해를 못해요. ‘저 사람은 서울대를 못 갔다고 왜 저렇게 괴로워하지?’ ‘그럴 수도 있는 건데.
’ 마치 로또를 사놓고 로또 당첨되는 날만을 막 기다리면서 좋은 꿈꿔가지고 ‘난 당첨될 거야.’ 하고 기다리고 막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안 돼가지고 엄청 실망하는 사람을 보면 우리가 봤을 때 이해가 안 가잖아요. ‘저걸 기대한 네가 웃긴다.’ ‘네 스스로 기대해놓고 뭘 그렇게 실망을 하냐?’ ‘그게 되겠니?’ 이래 생각을 할 텐데. 본인은 집착한 사람은 그게 본인에겐 엄청 큰 괴로움이지요.
그런데 그건 스스로 만들어놓은 생멸심이지요. ‘로또가 될 거야’, 라는 기대와 집착심. 된다, 라는 어떤 돼서 내가 부자가 되는 부자인 삶을 생각한 것이지요. 그 생멸심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거기에 집착하고 있으니까 그것이 되지 않았을 때 괴로운 것이지요. 그것은 내 스스로 만든 거지요. 사실은 내가 나라고 여기는 이것은 내가 아니거든요. 색 수 상 행 식이 전부다 내가 아니잖아요.
몸뚱어리도 내가 아니고 생각 의식 의지 마음 뭐 난 이게 됐으면 좋겠어, 저게 됐으면 좋겠어. 이거 전부다 내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걸 나라고 생각하니까 우리는 살면서 엄청난 기대를 품어요. 그리고 기대를 품고 그것을 성취하는 게 나라고 생각해요. 성공하는 게 나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진짜 나는 성공할 수가 없어요. 가짜 나, 나라는 아상만이 성공과 실패라는 허망한 착각을 할 수 있을지언정.
근원의 나는 이 개체적인 자아가 아니거든요. 몸뚱이가 내가 아니거든요. 생각이나 기대나 의지가 내가 아니거든요. 성공 실패라는 거는 내가 만든 허망한 착각에 불과한 것이지. 나라는 존재는 성공도 할 수 없고 실패도 할 수 없습니다. “뭐만 할 수 있을까요?” 나라는 존재는 그저 이렇게, 이렇게 있을 뿐입니다. 그 어떤 해석 불가한, 해석 불가한 있는 그대로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인 겁니다.
우리에게 그 어떤 개념이나 해석도 붙이지 않고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할 필요 없이 그 어떤 생각도 개입되지 않은 채 이렇게 있는 이대로 온전하게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무문제가 없습니다. “이렇게 있는 것에 노력을 해야 되나요?” 애쓸 필요 없이 그냥 존재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내가 애써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본래 부처는 저절로 온 우주법계가 스스로를 지탱하고 있는 거예요. 나라는 건 없습니다. 우주법계가 법계의 법신을 저절로 살아가게 하고 있는 것일 뿐. 거기에 나라는 개념은 개입될 수가 없는데 중생심을 가지고 이만큼은 나다. 이만큼은 너다. 이렇게 틀을 만들어놓은 것일 뿐이지요. 전혀 남 같은 사람이 갑자기 내가 될 수도 있거든요. 이 사람과 내가 남남일 때는 저 사람이 죽든 살든 돈을 버리든
아니면 교통사고가 나든 신경도 안 써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해서 그 사람과 결혼할 마음을 냈다. 그러면 그 사람의 괴로움이 내 괴로움과 똑같은 괴로움이 되기 시작해요. 아상이 개입되기 시작하면서 그게 나의 괴로움처럼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처럼 아상이라는 건 말 그대로 상입니다, 상. 허망한 상. 허망한 상으로 만들어놓은 거예요.
그래서 사실은 우리 삶은 내가 그런 허망한 상으로 만들어놓은 허망한 개념의 삶이 없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인생을 멋있게 만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근원에서는. 법이 법으로서의 삶을 그냥 살고 있는 거예요. 나는 그냥 법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지. 거기 뭐 나라는 것조차 붙을 게 없습니다. 그래서 무위법이라고 하는 거지요, 무위법.
내가 애쓴다고 잘 되고 애쓰지 않는다고 안 되는 게 아니고 애쓰지 않아도 될 건 다 되고 애써도 되지 않을 건 결코 안 됩니다. 어떤 분이 엄청나게 큰 사고를 일으켜서 너무 큰 충격에 빠져가지고 너무너무 괴로운 나날을 보내다가 ‘내가 왜 이렇게까지 됐느냐?’ ‘내가 이런 문제를 만든 걸까?’ 아니면 ‘내 팔자일까?’ 아니면 ‘오늘 주어진 걸까?’ ‘뭘까?’ 하고 오랫동안 사유를 해봤데요.
그랬더니 살면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내가 만들어낸 게 아닌 거 같다는 자각을 했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했더니, 내가 결정적으로 그때 실수해서 이렇게 큰 문제가 벌어질 때 내가 그 자리에 있지만 않아서도 내게 그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닌데, 내가 그 자리에 있고 싶어 있었던 게 아니다. 어쩌다보니 그 자리에 가게 됐고. 또 어쩌다 보니 그런 일을 만나게 됐고.
이게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게 분명하더라는 거예요. 심지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거조차 나나 그 사람 중에 한 명이 우연히 다른 일이 있어서 그 자리에 있지 않았으면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사랑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럼 지금 이 자식이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모든 것을 가만히 보니까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삶이 그냥 이렇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구나.”
“거기에 나는 내가 했다.” “내가 잘 했다.” “내가 못했다.” “내가 어느 순간엔 잘 했고 어느 순간엔 못했다.” “이런 개념을 내가 부여했을 뿐이구나.”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사실은 나라는 것이 본래 없기 때문에 나라는 개념은 내 의식이 만들어놓은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이 법계가 그냥 하나의 마음, 하나의 법계, 일진법계라고 하는 하나의 진실한 법계, 일심이라고 하는 한마음,
일불승(一佛乘)이라고 하는 한개의 부처가 이 세상이라는 이 우주라는 우리 모두의 삶을 운행시키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고 한개의 거대한 한마음의 기관이 일불승의 기관이 대용, 크게 온 우주법계 전체를 한마음으로 돌리고 있다. 저 밤하늘의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은 별의 문제고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이 내 손가락 하나 튀기는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온 우주법계 전체가 한마음으로 돌아가고 있는 대기대용의 하나임의 존재이기 때문에 대기대용 하나임의 존재 거기에 나라는 개념이 개입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생겨난 모든 것이 생겨난 채로 생겨난 바가 없는 겁니다. 내가 이것을 만들어 냈다. 내 인생은 이렇게 돼야 된다. 내 인생은 저렇게 돼야 된다. 내 인생은 성공했고 내 인생은 실패했고 이런 개념만 내려놓는다면 본래 생겨나는 것이 없습니다. 본래 생겨나는 게 없기에 사라지는 것도 없습니다. 본래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것(不生不滅法)밖에 없는 것이지요. 정신적인 현상이건 물질적인 현상이건 이 세상 모든 것글, 현상들은 생겨나고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보이는 착각(錯覺)이 있을 뿐이지.
본래 이 우주법계, 이 세상 모든 것은 실제적으로 생겨니고 실제적으로 사라지는 게 없습니다. 사람들이 죽는다고 할지라도 오온[五蘊 : 색(육신), 수(느낌 감정), 상(생각 상상 이미지), 행(욕망 욕구 충동 의지 의도), 식(인식, 마음, 의식, 알읆알이, 분별식)이라는 이 껍데기 내가 죽는 겁니다. 이 껍데기 내가 죽는 거야 뭐 손톱 깎는 거랑 똑같아요, 손톱 깎는다고 내 몸이 죽는다고 괴로워하지 않듯이. 손톱 깎아서 변기에 버리거나 쓰레기통에 버리잖아요. 이발소나 미용실에 가서 머리 깎고 나서 잘린 머리카락 아까워하지 않잖아요. 내 생명이 떨어져 나가는데도 “그거는 손톱이고 내 살이 떨어져 나가면 나는 괴롭지요.” 라고 하지만 전 살점이 이만큼 똑 떨어져 나간 적도 있었거든요. 아프긴 해도 그게 떨어졌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는 않잖아요. ‘어디까지를 내 몸이라고 할 것이냐?’ ‘어디까지를 나라고 할 것이냐?’ 그래서 우리의 이 겉껍데기 오온은 실체가 없다, 즉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하지 않습니까?
나라고 착각해왔던 오온 그것이 진정한 내가 아니다. 그래서 삶, 인생에 등장하는 모든 희 노 애 락 이라는 이 모든 좋고 나쁜 온갖 사건 사고들 문제들 그거는 일어나는 채로 일어난 바가 없습니다. 내가 해결하려고 아등바등할 필요가 사실은 굳이 없어요. 턱 내맡기면 저절로 우주법계가 알아서 해결해버립니다.
우주법계에 내맡긴다고 그런다고 해서 나는 가만히만 있고 해결하지 않아요? “그럼 나는 내가 하지 않고 부처님이 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나는 너무 에너지도 없이 그냥 가만히 멍청하게 앉아있기만 하면 인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가만히 있는 걸 해보세요, 가만히만 앉아있게 되나?”(웃음) 우주법계, 법신부처님께 맡겨도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사람들 성격이 그냥 가만히 있는 걸 못 버텨요, 차라리 뭐라도 한다니까요. 마음을 텅~ 비우더라도 비운 채 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텅~비운 채 하는 게 더 크게 하는 것이지요. 하는 일에 더 큰 힘이 붙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텅~비운 채 하면, 나라는 아상을 탁 내려놓은 채 하게 되면, 뭐 무아지경(無我之境)이라는 말도 있듯이 나라는 것을 탁 내려놓아요. 나라는 개체가 하게 되면 힘이 없어요. 나 잘되라고 하면 어때요 하지만 이 우주법계의 법비가 내리는데 나 혼자 잘 되려고 나라는 울타리를 딱 치고 있으면 법의 비가 요만큼만 채워지고 나머지는 전부 다 흘러내릴 거 아니겠어요? 나라는 울타리가 딱 없어지면 온 우주법계가 바로 나입니다.
그 다음은 또 이래요. ‘자성이 이처럼 본래 하나도 모자람 없이 완전함을 어찌 기대했겠습니까?(何期自性本自具足)’ 모자람 없이 완전하다. 내가 모자라다 라는 생각이 있을 뿐. 내 인생은 돈이 부족하고 난 능력이 부족하고 난 외모가 좀 딸리고 내 자식은 공부를 좀 더 잘했으면 좋겠고. 뭐 뭐가 좀 부족하고 키가 좀만 더 컸으면 좋겠고 뭔가 모자란 게 많아서 사람들은 평생 모자란 걸 채우려고 아등바등하며 살잖아요. 모자란다는 생각만 없으면 모지랄 게 하나도 없습니다. “남들이 봤을 때 모든 걸 다 갖춘 거 같은 사람을 제가 얼마나 많이 봤겠습니까?” 모든 걸 다 갖춘 거 같이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행복할까요?’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것만 되면 망구에 괴로울 게 없을 거 같은 조건을 전부 갖춘 사람 전혀 그렇게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치 저것과 같아요. 10평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친구네 집에 가서 20평, 30평의 아파트를 보면서 입이 떡 벌어지면서 ‘야 내가 저 30평 아파트에 살 수 있을까?’ ‘불가능하겠지.’ ‘내가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나?’ ‘말도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해서 꿈만 꾸다가 어느 날 갑자기 운 좋게 30평 아파트에 딱 이사를 가가지고 너무너무 행복해요, 막 그냥 하루 이틀 삼일 막 그 행복감을 누리면서 지내는 시간이 얼마나 갈까요? 몇 달도 되지 않아 그냥 30평에 익숙해지는 거예요. 30평이라서 좋은 건 별로 없어요. 청소 할 일이나 많아지고. 그러다가 한 40평, 50평 집에 놀러가게 되면 또 40평 50평 그게 부럽지요. 아니면 같은 30평이라도 저 강원도 양구에 있는 30평 아파트하고 저 도시에 있는 30평 아파트하고 비교해서 또 서울에 잇는 30평 그걸 부러워한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의 욕구 욕망 욕심은 끝이 없이 이어지는 것이지요. 이처럼 인간의 어떤 욕심, 욕구, 욕망은 성취에 쉽게 적응을 해서 또 다른 욕심을 일으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 일어나도 그 좋은 일이 계속될 거 같지만 금방 다 지나가버립니다. 나쁜 것도 마찬가지 좋은 것도 마찬가지. 나쁜 일도 금방 지나가버립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가 있어요. 자살을 하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 아주 간단하답니다. 그 순간만 모면하게 하면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살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 순간 잠깐, 잠깐 몇 초 그것 때문에 자살한다는 거지요. 그 순간만 모면하게 하면 그 다음에는 자살 안 한답니다. 그 어디지요? 무슨 자살 다리라고 하는데 그 다리에서 사람들이 맨 날 뛰어내려서 자살을 하길래. 그 다리에다가 진득진득한 뭐 기름칠을 해놨더니 자살하려고 올라가다가 진득하니까 지저분하니까 아이∼ 귀찮아가지고 신경을 딴 데 잠깐 쓰고 나니까, 아이 더러워서 안 되겠다 하고 씻으러 간답니다, 자살 안하고.(웃음) 법적으로 실제 호텔이나 모텔 화장실 욕조 앞에 보면 커튼 치는 거 있잖아요. 옛날에는 커튼 치는 봉이 못으로 강하게 박혀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강하게 박혀있으니까 여기 목매달아 죽는 사람이 많데요, 모텔 가서. 그래서 법적으로 자살예방 전문가들이 법을 제안해가지고 법으로 여기는 못을 못 박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거튼 달린 여기서 그냥 어느 정도의 몸무게가 매달리면 이게 똑 떨어지도록 하는 법안을 외국에서도 많이 하고 그런다는 거지요. 그런데 실제로 그걸 하고 나서 자살하려는 사람들이 거기서 자살을 안 한답니다.(웃음) 그냥 거기서 자살하려고 해서 목을 딱 맸는데 어찌어찌하다가 뚝 떨어지니까 그럼 다시 좀 더 튼튼한 데로 찾아가서 자살해야 되는데 사람들이 그때 실패하면 튼튼한 데로 다시 찾아가서 안 한답니다. 딱 그 순간 몇 초. 그것만 모면하면 그 다음에는 안 한답니다. 그렇게 자살을 유혹하는 마음 때문에 자살을 하는 거거든요, 순간의 어떤 마음 때문에. 이와같이 사실은 우리가 하는 생각들, 일키는 마음들이 변하지 않고 영원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생각 마음은 항상 잠깐 왔다가 가는 것이지요. 생각 마음은 찰나생 찰나멸 합니다. 좋은 거라는 생각에도 과도하게 집착할 필요가 없고 나쁜 거라는 생각에도 지착해서 거부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생가 마음은 반드시 흘러가고 반드시 잊혀집니다.
그러니까 아주 괴로운 사람이 자살을 선택하려고 하는 이유는 이 괴로움이 죽을 때까지 평생 갈 거라는 착각 때문이라는 거예요. 왜냐면 하루 이틀 삼일 너무 괴롭다 보니까 ‘아 이대로 나는 평생 가겠구나.’ 이래 생각한다는 거지요. 그런데 결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사람에게 장애가 생겼어요. 그럼 이게 평생 갈 게 분명하잖아요. 그러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싶지만 그러지 않다는 거지요.
거기 익숙해지면 또 여기에 익숙해져서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또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또 좋은 거에도 마찬가지로 아주 좋은 걸 얻는다고 할지라도 거기 금방 익숙해지기 때문에 거기서 또 다른 괴로움이 생깁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에 사는 사람도 그 좋은 조건에서 괴로워하는 일이 생기지요. 그래서 조건을 좇는 것은 근원적인 해결 방법일 수가 없습니다. 조건은 끊임없이 바뀌고 변하면서 흐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남들은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야 저건 별것 아닌데 저것도 못 견뎌서 저런 생각을 해.’ 그거는 그런 얘기를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봤을 때 아주 별 볼 일 없는 것 때문에 저렇게 괴로워하는 사람도, 그 사람에게는 엄청난 지옥 같은 삶일 수 있다는 거지요. 왜냐면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은 현실세계가 딱 정(定)해져있는 것이어서 우리가 딱 정(定)해져
있는 거기 들어가서 사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이라는 현실세계는 자기의식의 세계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작은 괴로움을 너무나도 지옥처럼 생각해서 못 견디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어마어마한 괴로움 속에서 모든 사람이 다 손가락질을 하고 욕을 해도 꿋꿋하게 살아남는 그런 사람들도 있는 거지요. 그래서 이 세상은 자기의식의 세계이기 때문에 남들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겁니다. 해서 본래 아무것도 모자람 없이 완전하지만 내 스스로의 의식에서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일 뿐이지요.
‘자성이 이처럼 본래 흔들리지 않음을 어찌 기대했겠습니까(何期自性本無動搖)?’ 사람들의 마음 생각은 대상 경계를 따라서 계속 흔들립니다, 휘둘리고. 좋았다 나빴다, 행복했다 불행했다, 울고 웃으면서 계속 흔들리고 휘둘리면서 사는데 자성은 본래 동요됨이 없다. 본래 완전한 안심으로서 그 어디에도 휘둘리거나 흔들릴 수 없는 것이 자성의 본질이다.
‘자성이 이처럼 만법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어찌 기대했겠습니까?(何期自性能生萬法)’ 자성이 나의 근본성품이, 본래의 내가, 만법(이 세상 모든 것)을 만들어 냈습니다. 내 마음이 만법을 만들어 냈습니다 내 자성이. 이 세상을 만든 조물주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신이 바로 나 자신입니다. 부처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만법을 만들어 냈어요. 하나에서 분리된 나라는 개체적인 자아가 만법을 만들어낸 게 아니라, 나의 근본성품과 동일한 우주법계의 근본성품인 자성이 만법을 만들어낸 겁니다. 마치 바다 위에 무한한 파도가 치듯이 무한한 그 파도는 잠깐 쳤다가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거거든요. 그 파도는 사실은 그렇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인연 따라 파도가 쳤다가 인연이 다하면사라지는 것일 뿐이듯이.
어젯밤 꿈속에서 꿈을 꿀때 그 꿈속에서는 그 꿈이 진짜 같기 때문에 울고 웃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미운사람 싫은 사람 있고, 미운사람은 때리고 싶고 성질도 나고 막 그러잖아요. 제가 갑자기 생각하니까 어젯밤 꿈에서 아침에 깨어나기 직전 차를 이렇게 몰고 가는데 옆에서 누가 그 사람 차로 내 차를 툭 치고서는 나보고 막 잘못했다고 하면서 어디가 고장 났으니 돈을 얼마를 물어 달라. 이런 턱도 없는 말도 안 되는 이런 꿈과 비슷해요. 이렇게 맥락도 없고 개념도 없이 그냥 우리 생각이 일어나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은 체계적이고 이런 게 아니라 이 생각이 일어났다 갑자기 저 생각이 일어났다. 뜬금없이 이 생각 저 생각이 마구잡이로 일어나듯이 꿈도 그와 같이 일어나거든요. 마구잡이로 일어나거든요. 그것처럼 꿈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특정한 일들에 대해서 그 모든 것들이 진짜라고 여겨서 막 화도 내고 성질도 내고 좋아하기도 했다가 울고 웃습니다. 그런데 꿈에서 깨어나면 그 꿈속에서 내가 미워했던 사람이 누구에요? 내 마음의 그림자, 내마음의 허깨비, 내 마음 내 의식일 뿐입니다. 꾹속 일은 전부 다 내 마음, 내 의식, 내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허상 환상 허깨비이었을 뿐입니다.
꿈 속에서 내가 미워했던 사람도 내 마음이 만들어냈던 환상입니다. 꿈 속에서 좋아했던 사람도 내 의식이 만들어냈던 허께비입니다. 꿈속에 등장했던 모든 것들은 전부 다 내 마음이 창조했던 거예요. 그 꿈속 세계 그 하나의 세계가 내 의식이 만들어냈던 환상세계입니다. 그러고 꿈이라는 환상세계 그게 진짜라고 여겨서 거기 안에서 너와 내가 분리 분별되어 있는 줄 착각했어요. 저 사람이 나를 공격한 줄 알았어요. 꿈을 깨고 보니까 그게 다 내 마음 하나에서 일어난 환상이었어요. 이 세상이 똑같습니다. 현실이라고 여기는 이 세상은 여러분의 근원이 꾸는 꿈일 뿐입니다.
그런데 꿈속에 있으니까 우리는 아직 분별 번뇌 망상이라는 꿈속에 있으니까 꿈 같은 이 세상, 이 현실 이게 진짜인 것으로 착각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남들과 싸우는 것도 진짜 같고 성공하는 것도 진짜 같은 착각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세상, 이 현실은 진짜가 아니라 그것은 자성이 꾸는 하나의 꿈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꾸는 꿈이 바로 이 우주이고, 부처가 꾸는 꿈이 바로 이 세상이라는 꿈입니다. 그래서 ‘자성이 만법을 만들어냈음을 어찌 기대나 했겠습니까?’
잠시 쉬었다가 하겠습니다. ∼ 박수 (이어서 1시간 02분 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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