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자에게 길을 묻는다
내 그림자에게 길을 묻는다
태어나자 마자 나에게는 그림자가 있었는데 내 그림자 그놈은 늘 나를 흉내 내고 있었다. 살아가다 보니 내가 그놈의 흉내를 내고 있다. 석가모니가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듯이, 내가 내 가섭의 미소를 위하여 들어 올리곤 하는 비유들은 내 심장이나 위장이나 머리털이나 얼굴이나 남근이나 내가 배설한 정액이나 오줌, 똥을 닮아 있곤 한다.
내가 말한 '그림자'라는 말에 걸리지 말기 바란다. 사람들은 말에 걸려 그 말에 갇혀버린다. 지옥이라는 말에 걸려 갇히고 천국이나 극락이라는 말에 걸려 갇히고 선(善)이라는 말에 걸려 갇히고 악(惡)이라는 말에 걸려 갇혀버린다. 말하자면 이념이나 사상이나 주의 주장에 걸려 거기에 갇혀버린다.
당신은 지금 '선(禪)'이라는 말에 걸려 그 말에 갇혀있을지도 모른다.
보통의 사람이 어떤 조직에 들어가 그 조직의 제복을 입으면 그 집단의 사람이 되어버린다. 자기의 순수성을 잃고 그 단체가 내세우는 이념 속으로 푹 빠져 들어가 갇혀버린다. 사람은 없어지고 제복(그 제복이 내세우는 이념)만 남는다.
지옥, 천국, 극락, 자유, 깨달음, 선, 악은 없고 오직 마음만이 있을 뿐인데, 사람들은 그 말 그 이름 거기에 얽매이고 걸려서 그 말 그 이름에 갇혀버린다. 사람들은 그 말에 얽매이고 걸려 그 말 그 이름에 갇혀버리지 않기 위해서, 이미 걸려 있는 말(혹은 이념)에서 놓여나려고 참선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참선'이라는 말 이름에 걸려 그 말이 지향하는 바를 향해 나아가지 못한다. '참선'이란 말에 걸참선이란 말에 갇혀버린 사람들은 반드시 벽을 향해 좌선을 하면서 화두를 머리에 뒹굴려야만 제대로 선(禪)에 드는 것으로 알고 그것을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가르치려 든다.
'달마 얼굴에는 왜 수염이 없느냐?', '남전 스님은 왜 고양이의 목을 베었느냐', '뜰 앞의 잣나무', '이뭣고!' 그러저러하다가 그들은 자칫 길을 잘못 들어 곡두(幻影 환영 허깨비) 같은 허령(虛靈) 속으로 빠져들 수도 있다. 곡두 같은 허령을 한소식으로 착각하고, '나는 깨달았다!'하고 거침없이 막 살아버릴 수도 있다.
원효의 '무애(無涯)'는 부처님의 법(法)으로 나아가는 데 걸림이 없어야 한다(죽음마저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인데, 사람들은 무애 그것을 아무렇게나 거침없이 막무가내로 살아버리는 것으로 착각하고, 술 마시고, 이성하고 살 섞고, 탐욕 부리는 따위로 지옥에 갈 죄들을 짓고 있다. 보라. 우리 주위에 그런 거침없이 사는 말릴 수 없는 족속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늘 길을 잃는다. 글을 쓰다가 길을 잃고, 길을 가다가 길을 잃고, 아내와 마주앉아 밥을 먹다가 길을 잃고, 손자의 재롱에 취해 있다가도 길을 잃고, 나에게서 좋은 이야기를 듣겠다고 찾아온 미녀 아주머니들 앞에서 길을 잃고, 제자들에게 강의를 하다가 길을 잃고, 친지들과 더불어 횟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길을 잃고, 통장에 불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는 돈을 들여다보다가 길을 잃고, 지나가는 늘씬한 앳된 여인의 다리나 볼록한 유방이나 백합꽃송이처럼 예쁜 얼굴 앞에서 길을 잃는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길을 잃게 하는가. 처음은 마구니가 길을 잃게 한다. 술맛과 미녀의 향기와 돈의 맛과 권력이 그것이다. 나는 그 속에 빠져드는 나를 의심한다. 회의와 의혹. 나는 지금 들떠 있지 않는가. 잘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이렇게 살아서 어찌할까. 회의와 의혹에서 철학이 시작되듯이 회의와 의혹 거기에서 나의 성찰 또한 싹튼다. 성찰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발을 멈추어야 한다. 발을 멈춤 이것은 나의 '길 잃어버림'의 증후이다. 어떠한 일을 하기로 말 짜듯이 작정을 해둔 것을 일거에 바꾸기 위하여 나는 "잠깐! 우리 그 일을 꼭 해야 하겠어?"하고 제동을 건다.
그러한 나에게 아내는 "당신 변덕은 알아주어야 돼요"하고 말한다. 나보고 변덕스럽다고 할지라도 나는 내 속에 회의가 싹트고 있을 때 변덕스럽지 않을 수 없다. 내 속에서는 '지관(止觀)'의 첫 단계인 '멈춤'이 바야흐로 시작되는 것이다. 이 멈춤의 상태를 보고 아내는 나를 굼뜨다고 하고, 과단성 있게 어떤 일을 추진하지 않는다고 하고, 이리저리 자로 재고 있기만 할 뿐 행동하지 않는다고 타박한다.
그렇지만 나는 일단 멈추고 난 다음에 가까운 곳을 세세히 살피고 뚫어보고 멀리 내다보기〔遠觀〕 시작한다. 그 일〔觀〕이 가장 자연스럽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잘 이루어지는 것은 하루 한 차례 걸터앉아 구린 냄새를 맡곤 하는 화장실에서이고, 잠을 자려고 눈을 감고 누워 있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벌떡 일어났을 때이다. 세상과 나 스스로의 길이 가장 확실하게 보이는 순간과 지점은 내가 가장 추하게 발가벗고 있을 그 순간과 그 지점이다.
나의 의식을 양파껍질 벗기듯이 한 꺼풀 한 꺼풀 걷어내고 나면, 무의식 속에 감추어진 나의 알맹이, 즉 그 절대고독의 실체가 불끈 솟아오르는 것이다. 내 속에 들어 있던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그 위대한 실체는 걸릴 것이 없어진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오만이 아니다. 이 세상 한 복판에 우뚝 선 참담한 고독의 존재인 것이다. 그 고독한 존재가 참담하게 느껴졌을 때 나의 변덕은 관우의 언월도를 휘둘러 나를 얽어매는 그물코(장애의 벽)들을 쳐 없애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자유자재가 된다. 사랑, 재산, 사회적인 지위, 명예 따위의 탐욕,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나를 얽어맬 수 없는 것이다.
한 재벌의 후예들이 나에게 십년 전에 작고한 재벌 총수(아버지)의 전기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이 제시한 기본의 원고료와 10만 부(많은 책을 찍어 세상에 뿌리겠다고 그들은 말했다)에 대한 인세는 2억 원에 이르렀다. 그 돈이 욕심나서 나는 그 일을 해주고 싶었다. 그 돈이면 말년을 어느 정도 편히 보낼 수 있을 터이므로. 그러나 나는 당장에 허락하지 않고 잠시 생각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이때부터 내내 가슴 우든거리는 어지러운 번뇌에 젖어들었다.
친일 행적이 있는 그 총수의 인생을 곱게 포장해야 한다는 전기의 사명과 돈에 대한 욕심과 나의 이름을 더럽히면 안 된다는 방어 의식이 서로 상충하고 있었다. 생각다 못하여 가족회의에 붙였다. 절대로 안 된다고 한 것은 아내와 딸이었다. 아내와 딸은 이렇게 말했다. "2억 벌고 20억의 후회를 하시게 될 겁니다." 그러나 두 아들은 "아버지 알아서 하십시오"하고 말했다. 이제 그 일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 그 번뇌 덩어리를 안은 채 잠자리에 들었던 나는 비몽사몽의 한 순간에 벌떡 일어나 앉으며 생각했다. '그래, 그렇다, 버리면 된다.' 그리하여 나는 그 일을 거부했다. 나의 새로운 길은 길을 잃은 그 지점과 순간에서부터 새로이 시작되곤 한다.
군청 문화관광과에서 내가 사는 마을 앞에 '해산토굴'이란 입간판을 세워 놓았다. 나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깊은 배려를 해준 것일 터인데, 그 후로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난다. "여기 가 부처님 모신 곳입니까?"하고 참배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마당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건너편 산자락에 암자가 있음을 가르쳐준다. 차 공부를 한다는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선생님과 사모님께서 만드신 차를 한 잔 얻어 마시고 싶어서 들렀습니다"하고 말했을 때 나는 거절하지 못한다. 이때 나는 생각한다. 이 사람이 사실은 관세음보살인데 나를 시험하러 왔는지도 모른다고. 어느 날 점심 때 언덕 아래의 살림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기 위해 현관문을 나서는데, 감색 승용차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그 승용차에서 내린 갈색 바지에 회색 윗도리를 걸친 중년남자가 나를 향해 왔다. 어떻게 오셨느냐고 내가 물었더니 그가 말했다. "여기서 새우젓 파십니까?" 나는 어처구니없어 도리질을 하며 "여기는 제가 글을 쓰는 곳입니다"하고 말했다. 그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몸을 돌리더니 승용차를 몰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새우젓도 팔지 않으면서 <해산토굴>이라고 입간판을 세워놓고 사람을 헷갈리게 하느냐?' 하고 생각하며 그는 돌아갔을 것이다.
'해산토굴'이라는 그 입간판을 보면서 기껏 새우젓이나 생각하는 그의 시각을 깔보며 오만해진 채 아랫집을 향해 발을 옮기던 나는 문득 생각했다. 저 사람이 관세음보살의 화신인지도 모른다.
음음한 토굴에서 갈무리한 새우젓은 얼마나 맛깔스럽게 익는가. 그 남자는 토굴에 사는 풋 늙은이인 나의 소설 또한 그렇게 맛깔스럽게 익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갔다. 순간 내가 가야 할 길이 환히 보였다. 나는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환희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짙푸른 하늘을 향해 껄껄 웃었고, 그날 점심밥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맛있었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자기가 볼 수 있는 것만 보지 볼 수 없는 것은 보지 못한다. 자기 눈의 위쪽이나 아래쪽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부처만이 위쪽 아래쪽을 모두 총체적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그 부처 마음[一心]으로 나아가는 데에 걸림이 없어야 한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차별의 말(이념)에서 평등[和諍]으로 나아가야 한다. 원효의 화쟁은 네가 한 말도 옳고 내가 한 말도 옳고 모두가 한 말이 다 옳다는 식의 두루뭉술한 '논쟁의 화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부처님의 법 하나로 귀착시키는 화쟁이다.
"우김질이 일어났을 때, 우기는 그 말이 부처님이 한 말이냐 아니냐에 따라 판단할 것이 아니고, 우기는 그 말이 부처님의 법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 선(禪)은 얼마나 조용한 곳에서, 얼마나 고급한 화두를 들고 얼마나 근엄한 자세로 얼마나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두커니 앉아 참선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걷든지 장사를 하든지 고추나무 차나무에 북을 주든지 벌레를 잡아주든지 글을 쓰든지.. 자기가 자리한 곳에서 참으로 평등한 부처의 마음, 부처의 눈을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에 있다. 눈을 쓸다가도, 벌레를 잡아주다가도, 차 한 잔을 하다가도, 술 한 잔을 하다가도, 친구와 입씨름을 하다가도, 축구 경기 관전 중에 심판의 오심을 보는 순간에도 우리는 문득 부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선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다.
태어나자 나에게는 그림자(글쓰기)가 있었는데 그놈은 늘 나를 흉내 내고 있었다. 살아가다 보니 내가 그놈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석가모니가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듯이, 내가 내 가섭의 미소를 위하여 들어 올리곤 하는 비유들은 내 심장이나 위장이나 머리털이나 얼굴이나 남근이나 내가 배설한 정액이나 오줌, 똥을 닮아 있곤 한다. 나는 나의 그림자에게 늘 길을 묻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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