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 - <淸華큰스님 法語>
저는 이렇게 법상(法床)에 올라오지 않고 그냥 소참법문(小參法門)으로 하면은 횡설수설(橫說竪說) 말이 제법 잘 나옵니다. 이렇게 격식 바르게 올라와 앉아 놓으면 위축이 되어서 좀 거북합니다. 그러나 할 수 없이 무슨 말씀을 하기는 해야 하겠지요.
상당(上堂)이라 하는 이 자리는 그런저런 상대적(相對的) 유한적(有限的)인 말을 할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아닙니다. 오직 상(相)을 떠나고 관념(觀念) 개념(槪念)을 떠난 그런 절대적(絶對的)인 말을 하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여느 도인(道人)들은 지지리 애써서 상당(上堂)에 모셔 놓으면 눈만 끔벅끔벅 하시다 이제 다 말했다 하고 그냥 내려와 가버립니다. 그러기에 원주(院主)스님이 뒤따라 가면서 우리가 애쓰고 모셨는데 왜 한마디도 않고서 가시느냐고 하니까
"경(經)을 잘 설(設)하는 데는 강사(講師)가 있고, 법(法)을 잘 설(設)하는 데는 법사(法師) 가 있고, 나는 선사(禪師)인데 선사인 나한테 무슨 말을 하라고 하느냐?" 그렇게 대답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묵은 해, 새해가 과연 부처님 법(法)에 있을 수가 있는 것인가? 묵은 해, 새해라는 관념(觀念) 개념(槪念)은 부처님 법에는 원래 없습니다. 다만 중생(衆生)들의 약속된 상대적(相對的)인 시간(時間)으로 해서 묵은 해, 새해가 있는 것처럼 여겨질 뿐입니다. 그래서 중국 당나라 때 운문(雲門) 스님이 정월 초하루날 원단(元旦)에 상당(上堂)에 올라가셔서 대중들한테 하신 말씀이 '내가 그대들에게 과거(過去) 지나간 달의 소식은 묻지 않을 것이니 닥쳐오는 달의 그 소식을 한마디 말해 보아라'. 지나간 달의 소식에 대해서는 그대들에게 아무런 해답(解答)을 구(求)하지 않을 것이니, 앞으로 다가올 달의 소식을 한마디 말해보아라, 그렇게 마씀을 했습니다. 이 때 대중(大衆)들은 한마디 말이 없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달의 소식에 대해 한 마디 말해 보거라 이것이 쉬운 질문이 아니지 않습니까. 대중들의 대답이 없으니까 그래서 운문대사(雲門大師) 스스로 자문자답(自問自答) 식으로 말을 했습니다. 년년시호년(年年是好年)이요, 해마다 바로 좋은 해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 날마다 바로 좋은 날이다 라고. . .
지금 저같은 사람한테도 연하장(年賀狀)이 꽤 옵니다. 그 중에는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하는 그런 아주 좋은 문구(文句)가 많이 있습니다. '해마다 좋은 해고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이런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자기 아들이나 딸이 시험에 낙방하면 그것이 이제 좋은 날이 될 수는 없겠지요.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자기 자녀(子女)들이 입학시험에 합격이 못되고 불행히도 낙방한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굉장히 마음으로 갈등을 느끼고 불행(不幸)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운문(雲門)스님께서는 과연 날마다 좋은 날이요, 해마다 좋은 해라는 이런 말씀은 꼭 재수가 좋고 운수가 좋은 사람한테만 그렇게 했을 것인가? 이렇게 우리가 의심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운문스님 말씀은 절대로 재수가 좋고 운수가 좋고 그런 사람들한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년년시호일 일일시호일 이것은 보편적(普遍的)으로 어떤 누구한테나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설사 자기가 금방 아파서 내일 죽는다 하더라도 그 사람한테도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말입니다.
불교의 팔만사천 법문의 모든 뜻이 방금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해마다 좋은 해 날마다 좋은날 때마다 좋은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항상 행복한 것이 부처님 법문(法門)의 대요입니다. 바꿔서 말씀 드리면 인생고(人生苦)를 몽땅 소멸 시켜서 정말로 위없는 행복(幸福)을 내가 체험하고 맛보고 더불어 자기 이웃들도 그렇게 도도록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불법)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연유(緣由)로 해서 인생고로 충만한 중생(衆生)들이 날마다 좋은 날이 되고 해마다 좋은 해가 될것인가? 이것은 오직 하나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인생, 삶, 현실, 이 세상을 올바로 보면 날마다 좋은 날이고 해마다 좋은 해고, 올바로 못보면 그때는 날마다 불행한 날, 해마다 불행한 해입니다.
사업(事業)해서 이득을 좀 보고,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하더라도 이것은 결국은 불행한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상대적이고 이분법적인 그런 문제는 모두가 다 상대적이기 때문에, 행복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지 참다운 행복이 못되는 것이고 결국은 그 행복도 인생고(人生苦)로 끝나고 만단 말입니다.
설령 부자가 되었다고 칩시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노력없이 되겠습니까. 갖은 고생을 다 한단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 또 몹쓸 일도 하겠지요. 자기 양심(良心)에 가책된 일도 하고 또는 남한테 원망(怨望)도 받고, 자기 이웃은 배고픈데 자기만 배부르게 먹으니까 그 자체가 벌써 죄(罪)란 말입니다.
따라서 부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죄나 허물 위에서 이루어진 허깨비나 같은 것입니다. 모래위에 쌓은 탑 모래위에 지은 집은 마찬가지로 금방 허물어지고 맙니다. 허깨비 같이 사라지고 맙니다. 설사 좀 오래간다 하더라도 자기 생명(生命)과 더불어서 자취도 없습니다.
올 새해는 굉장히 희망이 충만한 해가 아니겠습니까. 저도 가끔 신문(新聞)을 봐서 짐작은 좀 합니다만은 그렇게 극성을 부리던 그 동구라파(東歐羅巴) 공산주의(共産主義)가 그야말로 사상누각(砂上樓閣)같이 이제 붕괴되어 버렸습니다. 그 소비에트 얼마나 막강한 나라이었습니까. 1917년 그 소비에트 (Soviet) 볼세비키(Bolsheviki) 혁명이 일어난 뒤에 74년동안 그렇게 압제하고 탄압하고 무수한 사람들을 죽였단 말입니다. 하여튼 정적(政敵)을 죽인 것이 몇천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런 소비에트가 해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또 북한하고 남한을 보십시오. 46년동안이나 분단(分斷)되어 가지고서 그 원수라고 하면 제일 미운 원수, 불구대천지원수같이 서로 죽이고 싸우고 했단 말입니다. 그러던 것이 다행이 지난 12월 이제 화해(和解)하자, 그리고 서로 침략하지 말자, 교류하자 서로 왔다 갔다 교류하자고 했습니다. 그 다음은 서로 협력(協力)하고 지내자.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할 때에 굉장히 희망(希望)이 넘치는 앞으로 한해입니다.
따라서 상대적(相對的)인 뜻에서 본다 하더라도 정말로 날마다 좋은 날, 달마다 좋은 달, 해마다 좋은 해가 앞으로는 꼭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자들은 그냥 상대적인 세속적(世俗的)인 차원(次元)의 행복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根源的)이면서 보편적(普遍的)인, 어느 누구한테나 어떠한 경우나 어느 때나 행복하게 되는 것,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년년시호년(年年是好年)이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 해마다 바로 좋은 해요, 날마다 좋은 날이라. 이것은 그런 뜻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 드린바와 같이 바로 본다고 생각하면은 그냥 보편적인, 궁극적인 차원에서 그런 년년시호년 일일시호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衆生)들의 절대시간(絶代時間)이 존재하고, 절대공간(絶代空間)이 존재하고, 이런 차원에서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내 몸뚱아리가 우리 중생의 육안으로 볼 때는 이렇게 존재하고, 내가 미원하는 사람이 대상적으로 저렇게 존재하고, 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존재하고, 또는 그렇게 욕심을 내는 감투도 존재하고, 또는 다른 물질도 존재하고, 이런 분별적이고 상대적인 차원에서는 날마다 좋은 날이 절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고(思考)의 패턴(Pattern)의 전환, 의식전환(意識轉換)을 우리가 하지 않으면 그러한 성자(聖者)의 보편적인 일일시호일이라는 말은 우리한테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사업에 실패(失敗)하면 그냥 자결도 하는 것 아닙니까. 바른 견해(正見)라 하는 것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 하는 반야사상 밑에서 이른바 사물(事物)을 통찰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이제 80평생을 지내시다가 열반(涅槃)이 임박했습니다. 따라서 구시나가라(拘尸那碣羅)성(城)의 사라쌍수(娑羅雙樹)나무 밑에서 열반(涅槃)에 드셨습니다만, 사라쌍수 나무 밑에서 나무 잎파리나 그러한 것을 깔고서 거기에 누워서 당신 법의(法衣)만 덮고서, 오른쪽 팔뚝을 베시고서 그곳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우리 스승은 그렇게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열반에 드실 때가 임박해서 이웃 나라들 한테도 석가모니부처님의 죽음(열반)을 공포(公布)를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시나가라 근처에 있는 비아리국의 역사(力士)들이, 비아리국에는 아주 기운이 센 역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우리가 부처님께서 구시나가라로 가시는 길을 좀 다듬어야 되겠다. 그래서 역사들이 노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조그마한 소로길을 부처님께서 이제 통과하실 길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시원스럽게 가시도록 편하게 가시도록 길을 다듬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험로에서 집체만큼 큰 바위가 가로막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역사들이 몇십명이 모여서 그 바위를 움직일려고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바위를 치워버려야 험로를 걷지 않고서 부처님께서 편한 길로 가시는데-지금같이 포크레인도있고 하면 오직히 조겠습니까만은 - 기운이 세다해도 집채만한 바위를 치워버리는 것이 쉽지가 않았겠지요.
그래서 땀을 뻘뻘 흘리고 그렇게 힘을 쓰는데 그네들이 기운은 좀 세어서 기운을 믿고서, 부처님 법(法)을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각국의 16왕자가 다 숭상하므로 부처님을 자기들도 숭상하기는 하는데 부처님 법을 모른단 말입니다. 따라서 역사들은 자기들의 힘을 믿고서 그 아주 행패가 심했습니다. 남의 것을 윽박질러서 빼앗기도 하고 그래서 피해가 심해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내가 열반에 들기 전에 저 사람들을 제도(濟度)해야 하겠구나. 그렇게 맘을 먹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허름한 수행자(修行者) 몸으로 변신(화신)을 했습니다.
부처님이나 도인들이 경우에 따라서 중생의 근기(根氣)에 따라서 중생을 제도할 때 몸을 바꾸는 것을 보고 동사섭(同事攝)이라 합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우리 범부(凡夫)들이 앉아서 이 말하고 저 말하고 이 생각하고 저 생각하는 것이 동사섭이 아니라 도인들이 중생의 근기를 보고나서 그들의 근기에 맞추어서 몸을 변신하는 것을 동사섭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그와같이 허름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변신했습니다.
아함경(阿含經)이나 화엄경(華嚴經)이나 법화경(法華經)이나 기타 경론(經論)에 있는 신통자재(神通自在)하는 그런 것을 절대로 미신이라고 생각을 마십시오. 저같은 사람도 부처님 덕택으로 가끔 비행기를 탑니다만은 한 삼백명이나 이백명이나 그 많은 사람 태우고 공중을 날아갈 때 것은 그야말로 참 희귀한 신통(神通)이 아니겠습니까. 비행기도 다 사람 머리에서 나왔습니다. 몇백만 개의 부품(部品)이 비행기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인간(人間)의 마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인간의 머리란 대체 무엇인가? 인간의 마음은 무한공덕(無限功德)과 무한가능성(無限可能性)을 입력(入力)한 컴퓨터(Computer)의 저장장치나 똑같습니다. 원만한 자비(慈悲)도 마음에 다 갖추고 있고, 즉 입력(入力)되어 있고 지혜(智慧)도 다 입력되어 있고 행복(幸福)도 어떠한 것도 우리 마음이라 하는 컴퓨터 기억장치에 다 입력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무한의 컴퓨터, 따라서 '지혜 나오라' 하면 지혜가 나오는 것이고 '행복 나오라' 하면 행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마음(心)을 가리켜서 불심(佛心)을 가리켜서 여의주(如意珠), 여의보주(如意寶珠), 또는 마니보주(摩尼寶珠)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마음에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마음은 그런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성자(聖者)한테만 있는 것인가? 마음은 이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존재(存在)의 궁극적(窮極的)이고 보편적(普遍的)인 실체(實體)이기 때문에 이 세상 어느 것이나 누구한테나 다 갖춰져 있습니다. 아직 마음이 계발(啓發)이 못된 사람도 역시 갖추고 있는 것은 똑같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마음은 우리 인간(人間)한테만 갖추고 있고, 다른 동물(動物)들은 갖추어 있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동물도 똑같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생물인 동물(動物)이나 식물(植物)이나 무생물(無生物)이나 어떠한 미세한 존재(存在)나 모두가 다 불심(佛心)이라 하는 인생(人生)과 우주(宇宙)의 근본실체(根本實體)를 똑같이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이 어느 것 어디에나 똑같이 갖추고 있다고 할 때 산소(酸素)에나 수소(水素)에나 어디에나 갖추고 있다고 할 때에 사실은 천지우주(天地宇宙)는 불심이라 하는 청정무비(淸淨無比)하고 무량공덕(無量功德)을 갖춘 마음뿐입니다.
그 마음 위에서 물리적 법칙이나 화학적 변칙(變則) 이런 작용(作用)에 따라서 다시 말씀드리면 인과(因果)의 법칙(法則)따라서 이것이 되고 저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 우리같이 아직 공부가 안된 사람들은 안되겠지만은 - 그런 불심(佛心)하고 하나가 딱 되어버렸단 말입니다. 불심하고 하나가 되어버린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신통묘지(神通妙智)를 갖추는 것은 그 당시에도 조금도 부사의(不思議)한 것도 아니고 지금도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과학(科學)이 기기묘묘(奇奇妙妙)한 것으로 해서 원자력(原子力)같은 무서운 힘을 내는 것을 보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그 원자력과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인 불심(佛心)하고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할 때 우리가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그와같이 이제 당신 몸을 변신하셔서 허름한 수행자(修行者)로 나투셔서 그 역사(力士)들 앞에 가셨단 말입니다. 땀을 뻘뻘 흘리는 역사들 앞에 가셔서 하시는 말씀이
"동자(童子)들아!" 그야말로 나이도 많이 먹고 육중한 사람들한테 동자들아 하니까 역사들이 다들 기가 찻겠지요. "동자들아, 그대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가?" 라고 그렇게 핀잔 비슷하게 말씀을 하시니까, 아만심(我慢心)도 많고 행패(行悖)나 부리던 역사들이 더구나 화가 났겠지요. 그러나 승복(僧服)을 입었으니 함부로 할 수는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대체 누구인데 그와같이 오만불순하게 말을 하느냐고, 눈으로 보면 알지 않느냐고, 이렇게 집체만한 바위를 우리가 못치워가지고 이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애쓰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때 허름한 수행자로 변신하신 부처님께서는 미소를 띄우시면서 "아, 그것 하나 움직이지 못하느냐?"고 그러니까 더욱더 골이 나서, 그러면 그대가 한번 해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손도 대지 않고 발가락 둘로 이제 집채만한 바위를 훅 이렇게 올려버렸단 말입니다. 아! 그 바위가 몇십 미터 밖으로 굴러 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길 밖으로 굴러나간 것이 아니라 길 가운데로 갔단 말입니다. 또 치워야 하겠지요. 그러니 역사들이 그때는 그야말로 경천동지(驚天動地) 했겠지요. 참 저 사람이 보통 스님이 아니구나. 우리가 함부로 해서는 안되겠구나 했겠지요. 그래서 그때부터서는 아주 은근하게 공대(恭待)한단 말입니다. 기왕이면 길 밖으로 보내 주십시오.
이번에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손으로 바위덩이를 들어서 공중(空中)으로 내던져버렸단 말입니다. 그러고는 집채만한 바위가 윙 윙 소리를 내면서 몇십명이나 되는 그 역사들의 머리 위에서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바위덩어리가 금방 자기들의 머리위에 떨어질 듯이 생각된단 말입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이윽고 그 바위를 손바닥으로 받으셔서 입으로 훅 불어버리니 집채만한 바위덩어리가 가루가 되어서 흔적도 없이 간 곳이 없단 말입니다. 그 역사들도 이젠 조금 눈이 틔고 귀가 조금 열리고 했겠지요.
부처님을 믿는다하고 더구나 신통자재(神通自在)하는 불가사의한 힘을 보니 불가사의(不思議)한 그런 생각 때문에 정말로 진리(眞理)에 대한 갈증이 일어난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신 다음에 부처님께서는 그야말로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갖춘 원만덕상(圓滿德相)인 모습으로 환원(還元)하셨던 것입니다. 그때 그 역사(力士)들의 환희심(歡喜心)이 그야말로 참 청정(淸淨)한 마음이 얼마나 사무쳤겠습니까. 그때 역사들이 부처님한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세존(世尊)이시여, 과연 그 돌은 실체(實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 범부의 견해로는 공간성(空間性)도 있고 시간성(時間性)도 있고 분명히 물질(物質)인 그 돌이 실체(實體)가 있다고 대답해야 되겠지요. 만약 실체(實體)가 있다고 대답하면 색즉공(色卽空)이라는 그 말이 맞지 않는단 말입니다. 부처님 도리(道理)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제법공(諸法空)이 아닙니까. 오온개공(五蘊皆空), 제법공(諸法空)입니다. 그렇게 역사가 몇십명 들어도 움직이지 못한 바위이지만 본 바탕은 역시 공(空)입니다. 그래야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색즉공(色卽空)도 이치에 맞고 오온개공(五蘊皆空)도 이치에 맞고 그렇게 되겠지요.
어째서 공(空)인가? 다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돌이나 가장 단단한 다이아몬드나 내 몸뚱아리나 물질의 구성 요소는 원자(原子)로 되어 있습니다. 각 원자는 또 전자(電子), 양성자(陽性子), 중성자(中性子)가 적당히 결합(結合)해서 운동(運動)하는 것이 각 원자 아니겠습니까. 전자나 양자나 중성자나 그런 미세한 소립자(素粒子)는 이런 것이 본래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energy)라는 하나의 정기(精氣)가 적당히 진동(振動)하고 적당히 운동(運動)해서 하나의 상(相), 모양을 낸 것이 그것이 양성자(陽性子)요 중성자(中性子)요 전자(電子)요 그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현대물리학이 다 증명(證明)한 도리 아닙니까. 지금 이 가운데는 물리학 교수님도 계신데 제가 서투른 말을 해서 죄스럽습니다.
지금 현대 물리학은 - 뉴톤식 고전물리학은 물질 따로 있고, 마음 따로 있다고 합니다만 - 현대물리학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른바 양자역학(量子力學)은 그렇지 않고 다만 에너지의 파동(波動)이 결국은 전자고 양성자고 중성자라고 합니다. 그것들이 적당히 결합되어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고 그런것들이 모여서 분자(分子)가 되고 그래서 돌이 되고 다이아몬드가 되고 무엇 되고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근본물질(根本物質)이 공(空)인지라, 근본물질이 에너지뿐이고 또는 정기(精氣)인, 그런 공(空)인지라. 그런 근본 미세한 물질이 이렇게 합하나 저렇게 합하나 공(空)은 공(空)이란 말입니다. 저는 가끔 말씀을 드립니다만은 제로(Zero)를, 영(零)을 몇십번 곱하나 더하나 나누나 영은 영 아닙니까. 그와 똑같이 물질이 아닌 원래 시간성(時間性)도 공간성(空間性)도 없는 그러한 것들이 어떻게 모여서 모양이 어떻게 나오든간에 그림자같은 모양을 어떻게 나투든간에 결국은 끝내 공(空)은 공(空)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인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은 그런 공(空)의 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래가 공(空)자리입니다. 색즉공(色卽空)도 -색(色)은 물질 아닙니까 - 물질이 바로 공이라. 이것도 물질을 분석(分析)해서 물질을 쪼갠 뒤에 공(空)이란 뜻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말한 색즉공(色卽空)이란 분석하디 전에 물질이 바로 공(空)이라는 말입니다. 물질이 바로 공이거니 사람의 몸뚱아리도 이대로 바로 공(空)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들은 이렇게 움직이는 지금 겉모습만 봅니다. 허깨비라는 그림자만 봅니다
따라서 내용은 실체는 못봅니다. 내용은 무엇인가? 내용 실체 이것은 에너지고 우주(宇宙)의 정기(精氣)고 불교식으로 말하면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불성(佛性)입니다. 따라서 성자(聖者)는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하면 성자는 나를 보나 남을 보나 이렇게 이목구비(耳目口鼻)가 잘생겼다 못생겼다 분별해서 그렇게 안봅니다. 나를 보나 남을 보나 모두가 다 법계연기(法界緣起)라, 즉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인연(因緣)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낸것이구나, 이렇게 본단 말입니다. 산(山)도 내(川)도 물(水)도 모두가 다 진여법성(眞如法性)이 인연 따라서 연기법(緣起法)으로 잠시잠간 모양을 드러냈을 뿐이란 말입니다. 잠시잠간입니다. 잠시잠간!
잠시잠간 모양을 드러내서 그것이 머물러 있으면 공간성(空間性)도 있고 시간성(時間性)도 있을 것인데, 잠시잠간 인연(因緣) 따라서 모양을 나투어서도 그 모양은 순간 찰나도 머물러 있지 않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성도 공간성도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 참 절실한 말씀입니다.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이요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이요, 또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이란 말이 금강경에 있습니다. 과거 마음도 얻을 수가 없고 미래 마음도 얻을 수가 없고 현재 마음도 얻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라 하는 것은 우리 중생심(衆生心)이 공간적(空間的)인 물질(物質)이 존재(存在)한다고 보고서 물질이 마멸되어 없어지고, 그것이 지나가면 과거(過去)라 하는 것이고, 아직 오지 않았으면 미래(未來)라고 하는 것이고,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지금 변화하고 있는데 그것보고 현재(現在)라고 할 뿐이지 원래 과거, 현재, 미래가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본체(本體)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시간(時間)도 공간(空間)도 없습니다. 절대공간(絶對空間)도 절대시간(絶對時間)도 없고, 절대물질(絶對物質)도 없습니다. 이것이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말하는 공(空)의 도리입니다.
앞서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내일 당장에 -괴테(Goethe)식으로 말하면 최후(最後)의 심판이 와서 다 없어진다 하더라도- 그네들은 슬퍼할런지 모르지만 불교인(佛敎人)들은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기 때문에 내일도 모레도 없어진 뒤에도 다 그때는 좋은 날 뿐입니다. 어째서 그러는 것인가? 설사 내 몸이 금방 죽어 사라진다 하더라도 생명(生命) 자체는 죽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이런 말씀을 합니다. 석가모니부처님 당시에 부처님 같은 사람이 태어났으니 석가족(釋迦族)은 그야말로 부자(富者)가 되고 감투를 많이 쓰고 오래살고 그랬어야 되겠지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인과(因果)가 그렇게 안되어서 부처님의 종족(種族)인 석가족이 몽땅 죽음을 당하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도 한 둘이 아니라 그 연연한 석가 귀족(貴族)들을, 여인들도 땅에 묻어서 죽이기도 하고 창으로 죽이기도 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수백명이 당했습니다. 그리고 무거운 돌을 등에 엎고서 밧줄에 묶이어서 호수에 던져지고, 부처님의 종족이 그렇게 해서 죽을 때도 신통자재(神通自在)하고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바위덩어리도 훅 불어 버릴 수 있는 부처님인데 그런 것을 그대로 묵과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는 어떤 모순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런 대목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불교(佛敎)도 별 볼일이 없구나. 그래서 그냥 신심(信心)이 떨어진 그런 분도 있습니다. 직접으로 그런 말을 하신 분도 있습니다. 그 당시에 신통자재(神通自在)하시는 분이 부처님 뿐만이 아니라, 특히 부처님 제자 가운데는 신통제일 마하목건련(摩訶目健連)이란 목건련(目健連) 존자(尊者)도 있었습니다. 목건련이 부처님한테-그때 아사세왕이 그렇게 잔인무도한 짓을 했습니다.-아사세왕 그놈을 저쪽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밖으로 던져버리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부처님한테 말씀을 드렸단 말입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지금 아사세왕이 내 말을 들으면 앙화를 면할 수가 있지만 업장(業障)이 무거워 선근(善根)이 없어서 도저히 내 말을 안들을 것이니 그대로 가만히 두어도 앞으로 이레가 못가서 생환지옥(生還地獄)이라, 산체로 지옥에 떨어진다.
그리고 지금 핍박을 당하고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석가족(釋迦族)들은 죽자마자 생전에 부처님 법을 닦았기에 바로 도리천(宧利天)에 가서 태어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생사(生死)를 초월(超越)한 도리(道理) -우리 생명(生命)이라는 것이 현상적(現象的)인 '이것만이 존재한다' 이렇게만 생각할 때는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고 그런 것들이 최고의 삶이 되겠지요-그러나 생사를 초월한 도리에서 볼 때에는 그런 것은 별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비참하게 죽은 석가족도 오히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년년시호년(年年是好年)이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 해마다 좋은 해요 날마다 좋은 날입니다. 죽으면 당장에 천상(天上)에 태어나서 인간세상(人間世上)보다는 훨씬 고통이 적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삼동결제(三冬決濟)에 들어 정진(精進)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본래(本來) 부처이니까 당장에 빨리 깨달아 버리면 오직 좋겠습니까마는 그렇게 안되니까 이제 공부를 하고 또는 출가사문(出家沙門)이 되어서 고행(苦行)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부처님 법(法)을 어떻게 닦아야 본래 부처의 자리, 생사(生死)를 초월(超越)한 본래자리를 터득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란 말입니다. 그냥 그렁저렁 대충 닦아서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공부를 많이하신 분들은 그렇게 되시지가 않습니다만 대체로 모두가 다 범부(凡夫)입니다. 범부란 것은 자기의 본 바탕도 모르고 우주(宇宙)의 본질(本質)도 모릅니다. 석가(釋迦)나 또는 달마(達磨)스님이나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나 또는 공자(孔子)나 예수나 노자(老子)나 그런 분들은 우주의 실상(實相)과 우주의 참 모습과 자기의 참 정신(精神)을 알았던 분들입니다.
그러나 성자(聖者)가 아닌 사람들은 자신의 본 바탕을 못 봅니다. 본 바탕을 보고 보았을 때 그때는 본 바탕하고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자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허깨비 같은 이 현상(現象)만 보는 겉에 뜬 그림자같은 현상만 보는 사람들은 우리 범부 중생입니다. 따라서 우리 범부 중생 차원에서는 아무리 애쓴다 하더라도 그냥 쉽게 본바탕인 우주(宇宙)와 인생(人生)의 본(本) 생명(生命)자리를 볼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쉽게 볼 수가 없으면 차라리 그렁저렁 살면 될 것이 아닌가? 애쓰고 출가(出家)도하고 도 선방(禪房)에 들어 앉아서 자기 가족(家族)을 떠나와서 고생할 필요가 있겠는가? 모두 다 현실적(現實的)으로 사는 것이 이 사회인데 돈 많이 벌고, 잘 살고, 모두가 다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하는 이런 때 선방에서 가만히 앉아서 그와 같이 지내는 것은 그야말로 지독한 비생산적(非生産的)인 것이 아닌가? 이렇게 느끼는 것이 지금 현대식(現代式) 사고방식(思考方式)입니다.
물질이 전부고 물질만능주의(物質萬能主義), 권력만능주의(勸力萬能主義), 황금만능주의(黃金萬能主義) 이런 우리 견해로 해서는 절에 가서 마음공부하는 것은 아무 필요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와 같은 스님네들 가운데도 사회에 나가서 참여도 하고, 도시(都市)에 나가서 중생(衆生)들과 더불어서 같이 아파하고 그래야지 산중(山中)에서 자기만 좋자고 공부하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이런 사람들이 우리 스님네 가운데도 한 둘이 아닙니다. 불자님들은 이런 때 일수록 꼭 바른 견해(正見)을 가지셔야 합니다.우리가 산중에 있건 도시나 시장에 있건 그 처소(處所)는 문제가 아닙니다. 도시에 있지 말라는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처소가 문제가 아니라, 다만 우리가 꼭 성자가 되기 위해서는 바른 길(正道)로 가야 합니다.
교육자(敎育者)는 교육현장에서 꼭 자기와 자기 학생(學生)이 성불(成佛)하기 위해서 애써야 되는 것이고, 부모님들은 자기 가정(家庭)에서 자기 자녀(子女)와 더불어서 성불(成佛)하기 위해서 바른 길을 가야합니다.
그렇게 애쓰고 갈 필요가 무엇인가?
우리가 올바른 길을가지 못하면 또 소련같은 공산주의(共産主義)의 나라가 나오는 것이고, 또 허물이 많은 자본주의(資本主義)가 나와서 부자(富者)는 더욱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가지 않으면 그리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돈이 제일이고 물질이 제일이고 권력이 제일이고 자기 몸뚱아리가 제일이고 자기 가족이 제일이고 이렇게 생각할 때는 다른 방도는 없습니다. 자기 가족을 위해서는 자기 개인의 영달(榮達)을 위해서는 별스러운 짓을 다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무슨 주의(主義)가 생기고 무슨 운동(運動)을 한단 말입니다. 자기 국가(國家)만 좋아지고 자기 민족(民族)만 좋아지는 국수주의(國粹主義) 민족주의(民族主義) 말입니다.
성자(聖者)의 길, 예수가 가신 길, 석가(釋迦)가 가신 길, 공자(孔子)가 가신 길, 그런 바른 길을 버리고 떠나서 우리 중생(衆生)들이 이 현상적(現象的)인 허깨비를 사실로 있다고 착각하고 그것이 좋다고 생각 할 때는 우리 인생(人生)이 가는 주의(主義)라든가 가는 길은 바르게 갈 수가 없습니다. 역시 그런 쪽으로,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나를 위해서는 남을 희생(犧牲)시키고, 그렇게 싸우다 죽고 아귀다툼하고, 그러다 판이 끝나 버린단 말입니다.
우리는 싫든 좋든간에 우리 범부(凡夫)의 껍데기는 벗어야 합니다. 싫든 좋든 간에 중생심(衆生心)이라는 분별심(分別心)은 꼭 벗어야 합니다. 나중에 못벗고 그대로 다 버티는 것이 아니라, 몇생 몇만생이 꼭 종당(終當)에는 벗고마는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못 벗으면 다음 생에 고생(苦生) 더하는 것이고, 또 금생에 바르게 못 살면 지옥(地獄)갔다 아귀(餓鬼)로 갔다 이제 윤회고(輪廻苦)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윤회(輪廻)가 있습니다. 개미가 있고 구더기가 있고 또는 땅버러지가 있고 하듯이 지옥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을 어떻게 썼는가? 탐심(貪心)을 많이 썼는가, 화내는 마음 진심(嗔心)을 많이 썼는가, 어리석은 마음을 많이 썻는가 또는 표독한 마음을 많이 썼는가, 의업(意業) 거기에 따라서 거기에 상응(相應)되게끔 꼭 과보(果報)를 받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잘 했으면 대학입시에 합격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어딘가 부족했으니 낙방이 되었겠지요. 부처님 법(法)은 낙제가 될 사람을 꼭 합격(合格)되게끔 하는 법이 아닙니다. 부처님 법은 인과(因果) 그대로입니다. 그대로 맞습니다. 5만큼 공부하면 5만큼 이루어지고 5만큼 좋게 마음 쓰면 5만큼 좋게 됩니다.
부처님 법의 요체가 무엇인고 하면 방금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인간의 기본적인 인생고(人生苦)를 떠나 행복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고득락(離苦得樂)입니다. 중생의 허물을 벗는 것입니다. 매미도 허물을 벗어야 성충이 됩니다. 누애도 자신이 자기 몸에서 그 실크를 뽑아가지고서 누애고치를 만들지만 그 속에 갇혀버리면 영원히 갇혀버리지요. 자기가 만들어 놓은 그 껍질을 벗고서 나와야 합니다. 우리 인간도 이 몸뚱아리를 튀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서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바위덩어리도 사실은 텅텅 빈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잘 못보아서 바위 덩어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여의통(身如意通)이라,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도인(道人)들은 바위속으로도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위가 원래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말입니다.
단단하다. 물질이다. 그런 것이 우리 중생 차원에서 보는 것입니다. 물질은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 마음의 패턴(Pattern)입니다. 우리가 중생심, 즉 분별심을 벗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출가승(出家僧)이 되고, 수녀(修女)가 되고, 신부(神父)가 되고 하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그렇게 한번 되었을 때는 응당 그때는 엄격하게 준엄하게 계행(戒行)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계행(戒行)이란 무엇인가? 계행은 우주삼라만상이 본래(本來) 공(空)이고, 모든 것이 본래는 차별이 없는 똑같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루어진 우리가 하는 말(口), 그런 차원에서 이루어진 몸(身)으로 하는 행동, 그런 차원에서 이루어진 우리가 하는 생각(意), 이것이 계행이란 말입니다.
남과 내가 둘이 아니기에 우리가 남을 살생(殺生)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남과 나가 둘이 아닌데 음탕(淫蕩)한 짓을 할 수가 있습니까. 물질이란 전부 허망(虛妄)한 것이고, 원래 나도 없고 내 소유(所有)도 없는 것인데, 내 몸뚱아리 편하고자 해서 부당(不當)한 수입을 가질 수가 있습니까. 따라서 훔칠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부정을 저지를 만한 아무런 필요도 없습니다. 거짓말이나 욕설이나 이간하는 말은 모두가 다 허망하고 무상한 것인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또는 마약을 복용할 필요가 있습니까. 따라서 부처님 계율(戒律)은 모두가 다 근원적인 본래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 바르게 본 그런 견지에서 우러나오는 우리의 생각, 우리의 행동, 우리의 말, 이런 것이 계행입니다. 잘 못 생각한 사람들은 계행(戒行)은 부처님 당시나 필요하고 현대(現代)는 현대에 적합한 계행이 필요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해서 문란스럽게 합니다만 잘 지킬려고 애써도 빗나가고 마는데 합리화(合理化)시키면 그때는 아무것도 안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버릇이 잘 못들어 놓아서 과거 전생(前生)에도 잘 못 배우고, 금생(今生)에도 잘 못 배우고 버릇이 잘 못들어 놓아서 계행을 지킬려고 애써도 미끄러지고 실패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부터 대학(大學)까지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물리학(物理學)도 배우고 법학(法學)도 배우고 이러한 여러 가지 학문(學問)을 많이 배우지 않았습니까. 모두가 다 소중한 공부입니다만은 그러나 마음을 깨닫고 참다운 자기가 된다는, 참다운 진아(眞我)를 발견한다는, 참다운 대아(大我)가 된다는 그런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있다 없다 하는 분별시비(分別是非) 사변적(思辨的)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을 아무리 많이 쌓아도 바벨탑이라. 결국엔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는 마음은 우리 행복(幸福)을 위해서는 다 허물어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지식이나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은 우리가 기능적으로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 필요하지만 방금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우리가 참다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사람이 못된다고 생각할 때는 다시 무슨 주의, 무슨 철학이 나와가지고서 옥신각신하고 또 싸운단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몇십년동안 배웠다는 것이 '있다, 없다' 하는 분별만 배워 놓아서 그런 관념(觀念)을 다 놓아버려야 할 것인데, 그래야 불심(佛心)하고 우주만유(宇宙萬有)의 참다운 에너지인 그런 우주정기(宇宙精氣)하고 하나가 되고 우리가 가까워진단 말입니다.
그런데 워낙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 저장한 배운 것이 많아서 염불(念佛)도 하고, 화두(話頭)도 참구(參究)하고, 또는 주문(呪文)도 외워서 우리가 본래적인 우리 마음자리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갈려고 생각할 때는 자꾸만 반발이 많이 나옵니다. 선방(禪房)에서 이렇게 두 세 시간동안 앉아 있다 하더라도 그냥 두 세 시간 동안 아무런 딴 사념(邪念)이 없이 오로지 맑은 정심(淨心)으로 갈 때가 별로 없는 것입니다.
납월팔일(臘月八日 : 陰 12月 8日)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신 날입니다. 그래서 12월 초하루부터서 팔일까지는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합니다. 칠일(七日)동안 용맹정진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우리 수행(修行)을 '했다 말았다 했다 말았다' 그래서는 조금해도 그때는 잠재의식(潛在意識)이 또 나와 버리면은 또 역시 분별 번뇌 망상(妄想)이 나와버립니다. 낮에는 조금 애쓰고 한다 하더라도 밤에는 또 잠잘때는 꿈속에서 잠재의식이 발동되서 이상 야릇한 꿈을 꾼단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 중생이 하는 중생놀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쉬었다 안쉬었다'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적하고 싸울 때도 집중적으로 공격해 버려야 그래야 다시 힘을 만회해서 반격을 못해 오겠지요. 집중적으로 우리 번뇌(煩惱)를 공격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용맹정진을 합니다.
용맹정진(勇猛精進)은 오직 부처님한테 지향하는 마음, 화두(話頭)나 염불(念佛)이나 주문(呪文)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 자리, 우리 본체(本體)로 지향하는 마음 아닙니까. 본체에 지향하는 마음을 순간 찰나도 쉬지 않고서 지속을 시키기 위해서 용맹정진을 합니다.
밥을 먹더라도그 영양을 섭취하기 위해서는 입으로는 먹지만 자기 마음으로는 부처님한테 본체에 지향하는 그 마음을 놓치지 않고 그렇기에 용맹정진 동안에는 원칙적으로 묵언(默言)을 지켜야 합니다. 말을 하면 그때는 개념(槪念) 관념(觀念)이 나옵니다. 말을 하면 개념이 발동되기 때문에 또 역시 분별시비(分別是非)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말도 않고 또 하루에 한 때만 딱 먹고 말입니다. 우리 생각을 불심(佛心)에다 딱 머물러 두게 해서 간단이 없이 쉼 없이 우리가 밀어 나간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간다고 생각할 때는 불경(佛經)에서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이라. 반주삼매(般舟三昧)라는 것은 어떤 것인고 하면은 우리말로 풀이하면 불립삼매(佛立三昧)라. 부처님이 훤히 앞에 나타나신단 말입니다. 부처님이 사람 모양으로 나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때는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가 우주(宇宙)의 본체(本體)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이 훤히 빛나옵니다.
그렇게 간단없이 간다고 생각할 때는 일주일(一週日) 미쳐 못가서 틀림없이 그때는 그와같이 부처님 광명(光明)이 나옵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과 몸이 온전히 그 광명(光明)과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심월고원(心月孤圓)이라. 그러면 그때는 자기라는 생각을 초월(超越)해 버립니다.
그래서 일주일(一週日) 이것이 최단시일(最短時日)이고, 그래도 안될 때는 삼칠일(三七日), 이십일일(二十一日)동안 그렇게 하고, 그래도 안될 때는 49일동안 하고, 그래도 안되면 90일 동안 합니다. 따라서 90일 동안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일주일이면 되는 것인데 90일 동안에 안되겠습니까. 그러나 해보면 그렇게 쉽게 안됩니다. 안되기에 이제 저같은 사람도 삼동결제(三冬結制)를 그렇게 많이 했지만 지금도 오히려 번뇌(煩惱)의 찌꺼기를 다 못 버리고 있습니다.
참선(參禪)은 제일 쉬운 것입니다. 몸도 편하고 호흡(呼吸)도 편하고 또는 마음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제일 편하고 말입니다. 내가 없고 네가 없고 미운 사람, 좋은 사람도 없고 말입니다. 앞서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나날이 좋은 날이고 때때로 좋은 때입니다. 우리 마음은 나다, 너다, 좋다, 궂다, 시비(是非)를 다 떠나서 천지우주(天地宇宙)의 순수(純粹)에너지인, 천지우주의 순수 정기(精氣)인 부처님만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참선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화두(話頭)도 그러기 위해서 화두(話頭)를 드는 것이고, 염불(念佛)도 그 자리를 위해서 염불(念佛)을 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훤히 빛나는 자리입니다. 앞서 제가 말씀 드린 바와같이 행복(幸福)도 지혜(智慧)도 자비(慈悲)도 능력(能力)도 원만히 갖춘 무한(無限)한 공덕(功德)과 무한한 가능성(可能性)을 입력(入力)한 컴퓨터, 이것이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그 자리를 계발(啓發)하는 데 있어서 가장 요령있고, 가장 쉽고, 가장 확실한 방법이 참선(參禪)입니다.
참선은 어떻게 하는가? 참선은 우리 몸을 바르게 하고, 우리 호흡을 바르게 하고, 먼저 몸을 바르게 하려고 철저한 계행(戒行)을 지켜야 되겠지요. 몸을 바르게 하고, 우리 호흡을 바르게 하고, 호흡을 무리하지 않게 될 수록 가늘고, 길고, 고르고, 길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우리 마음은 남을 미워하고, 남 좋아하고, 허튼 자기 분수에 넘는 권리나 권력을 추구하고 돈을 구하고 그런 때는 마음이 괴로운 것입니다. 자기 분수에 맞게 구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은 우리 마음은 내 생명(生命)의 근본인 동시에 우주만유(宇宙萬有)의 근본(根本)자리인 우리 부처님을 생각합니다. 이렇게 분수에 맞게 하는 것이므로 제일 쉬운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면 우리 몸이 거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때때로 좋은 때요, 다 좋은 때요, 사람마다 나한테 지금 애매하게 내가 허물이 없지만은 내 목에다가 칼을 겨누는 사람도 좋은 사람이요. 천지우주(天地宇宙)가 오직 부처님 뿐이요. 천지 우주가 다 화장세계(華藏世界)라, 다 부처님 나라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날이 좋은 날이요, 분명히 해마다 좋은 해입니다.
공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시기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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