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의상대사의 법성게 중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에 관한 법륜스님의 법문을 실었습니다.
.....(중략) .....
불수자성(不守自性)‘은 ’스스로의 성품을 고집하여 지키지 않는다는 ‘ 뜻입니다. 약 독 , 길다 짧다, 깨끗하다 더럽다 하는 그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불수자성(不守自性)이란 이 말은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아(我)‘라 할만한 것이 없다(무아/無我) 즉 ’나라고 할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말과 같고 ,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이 세상 모든 것은 비어 있다 (空)’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이 그릇은 밥그릇이고, 저 그릇은 국그릇이고 , 또 저 그릇은 반찬그릇이라고 미리 정해져 있는게 아니라,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되고, 국을 담으면 국그릇이 되고, 반찬을 담으면 반찬그릇이 되는 이치입니다. 이같은 이치(理致)가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입니다.
제법(諸法), 만법(萬法), 삼라만상만물, 이 세상 모든 현상은 스스로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인연(因緣) 따라 이루어진다(수연성/隨緣成), 이 말이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보약으로 유명한 인삼도 본래는 약(藥)도 아니고 독(毒)도 아닙니다. 그러나 인삼은 인연(因緣) 따라 약성(藥性)을 나타내기도 하고, 효과 없을 때도 있고, 처음엔 약효를 나타냈다가도 나중에는 독성(毒性)을 나타내기도 하고, 먼저 독성(毒性)을 나타내다가 나중에 약성(藥性)을 나타내기도 하는 겁니다.
인삼의 효능도 인연(因緣) 따라 잠시 잠깐 일어나는 현상(現象)일 뿐이지 고정(固定)된 어떤 실체(實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삼도 물거품 같고, 허깨비 같고, 아침이슬 같고, 번개 같고, 꿈 같고, 그림자 같습니다.
'주먹질’을 예로 들면 , 주먹질 그 자체는 선한 행위도아니고 악한 행위도 아닙니다. 길을 가는데 강도가 여자한테 칼을 들이댔어요. 그때 마침 길 가던 사람이 재빨리 강도에게 주먹을 날려서 여자를 구했어요. 그러면 용기 있는 사람이라 하여 시민상을 줍니다. 그런데 집에서 부인과 다투다가 주먹질을 했어요 . 그러면 폭력범이 되죠. 주먹질이라는 행위 자체는 제법(諸法)의 본질(本質), 즉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에서 보면 선도 악도 아니고 , 옳은 행동도 아니고 그른 행동도 아니지만 , 현상세계(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에서는 주먹질이 인연(因緣) 따라 선과 악, 옳고 틀림으로 결정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본질세계(本質世界)와 현상세계(現象世界)의 차이, 이것을 알아야 자유(自由)로워집니다.
‘신발을 신은채로 방에 들어오는 것’이 바른 행동인가 그렇지 않은가? 한국에서는 바르지 못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바르지 못한 행동이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신발을 벗고 다니면 예의 없는 사람이 되고 , 인도에서는 불상 앞에서는 신발은 물론 양말까지 벗어야 예의가 있는 사람입니다. 한국에서는 어른한테 인사하려면 얼른 가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는데, 인도에서는 신발 양말 다 벗어야 됩니다. 바닥이 흙투성이어도 신발과 양말을 벗어야 됩니다. 미국에서는 신발을 신어야지 신발을 아무 데서나 벗으면 결례입니다. 그러니까 신 신고 양말 신는 행동 그 자체는 본래 옳고 그른 것이 없어요. 인연(因緣) 따라 이루어지는 도리(道理)임을 알아야 됩니다.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이 구절만 기억하셔도 누구나 해탈(解脫)할 수 있습니다. 즉 자유인(自由人)이 될 수 있습니다
“금강경 3분(分)에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버려라’ 라고 쓰여있고 , 5분(分)에는 ‘무릇 모양 있는 것은 전부 다 고정된 실체가 없어 허망한 것이고(범소유상 개시허망 凡所有相 皆是虛妄), 모든 상을 상이 아닌 것으로, 모양 지어진 것이 본래 모양 없는 줄을 알 때 ,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라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고 말합니다. 그런데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은 본래 성품이라 할 것이 없어 스스로의 성품을 고집해서 지키지 않고 인연(因緣) 따라 이루어진다고 하면 사람들은 또 무조건 본래의 성품이 없다는데 집착을 하는 거지요.
수행(修行)이란 사실 내 것이라고 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본래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무아(無我), 무상(無常), 무소유( 無所有), 무아집(無我執)을 말하죠. 그럴 때 사람들은 자유(自由)로워집니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가슴속에 맺혔던 응어리들이 하나씩 풀립니다.
사람들이 가슴 속에 왜 응어리를 가진 채 사느냐? 변하지 않는 실체적인 어떤 '내'가 항상 있다고 여기는 착각(錯覺)때문에 그렇습니다. 칼은 다른 칼에 부딪치면 상처가 생기지만, 만약 내가 허공(虛空)이라면 허공(虛空)에 어떤 칼이 꽂친다 해도, 허공(虛空)에 원자폭탄 수소폭탄이 터진다 해도 허공(虛空)은 조그만 상처도 입지 않고 멍쩡합니다.
그래서 마음공부 하는 것을 ’자기를 비우는 작업‘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 세상 모든 것, 우주삼라만상만물, 제법, 만법의 실상(본질)을 잘 알아서 지혜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중략)
-다음 카페 무진장행운의 집- 가산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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