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生覺)
“삶은 생각이 아니라 실천과 행동으로 완성된다”
고요히 수행 집중하던 말룬캬풋타는 세계는 한정 있는가 등 의문 일의켜
붓다는, 저절로 일어나는 생각은 분별 번뇌를 일으키는 망상으로 규정
비구 말룬캬풋타는 평안하고 고요한 곳에서 명상 수행을 하던 중에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일으켰다. ‘세존께서는 수많은 주제에 대해 설법하시지만 이런 주제에 대해서는 설법하시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은 항상함이 있는가 없는가, 세계는 한정이 있는가 없는가, 목숨은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에게는 마침이 있는가 없는가, 여래에게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인가, 여래에게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인가 등이다.’
그는 이어서 생각했다. ‘나는 이것이 궁금하다. 그런데도 세존께서는 이와 같은 주제들에 대해 설하시지 않는데, 나는 그것을 참을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고, 나는 그것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 여기까지 생각한 다음
말룬캬풋타 비구는 세존을 찾아갔다. 그는 세존께 예배를 올린 다음 물러나 한쪽에 앉아 자신의 의문사항을 말씀드린 다음 답변해주실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세존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말룬캬풋타여! 내가 이전에 너에게 세상은 항상함이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나를 쫓아 내 법을 배우고 닦는 것이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또한 너는 ‘세상은 항상됨이 없다, 세계는 한정이 있다, 세계는 한정이 없다, 목숨은 곧 몸이다, 목숨과 몸은 다르다, 여래에게는 마침이 있다, 여래에게는 마침이 없다, 여래에게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나를 쫓아 내 법을 배우고 닦는 것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말룬캬풋타여, 네가 일으킨 그 의문들에 대해 나는 답하지 않는다. 나는 너에게 네가 일으킨 그 질문들에 대해 답하겠노라고 말한 적이 없다.”
이에 말룬캬풋타는 마음으로 근심하고 슬퍼하며 머리를 숙인 채로 잠자코 앉아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았으나 그에게는 무언가 더 물을 것이 있는 듯 보였다. 이에 세존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세상은 항상됨이 있거나 없다는 데 대한 결론을 내린 다음 수행을 하고자 한다면 그는 그 의문에 대답을 알기 전에 목숨을 마치고 말 것이며, 네가 제기한 다른 여러 질문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마치 독화살을 맞은 어떤 사람의 경우와 같다.
어느 때 한 남자가 독화살을 맞아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이 의사를 청해 왔다. 의사가 화살을 뽑으려 하자 화살을 맞은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 화살을 뽑지 마시오. 나는 그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소. 나는 화살을 쏜 사람에 대해, 그가 어떤 성을 가졌으며, 이름은 무엇인지, 신분은 어떤 계급이며, 키는 큰지 작은지, 살결은 거친지 고운지, 얼굴빛은 검은지 흰지, 혹은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지 등을 알고 싶소.’
이어서 그는 또 말했다. ‘나는 화살에 대해서도 그것이 무슨 나무로 만들어졌는지, 산뽕나무로 만들어졌는지 뽕나무로 만들어졌는지 물푸레나무로 만들었는지, 또는 뿔로 만들었는지를 알고 싶소. 또한 나는 활에 대해서도 그 줄이 소의 힘줄로 만들었는지 노루나 사슴의 힘줄로 만들었는지, 또는 실로 만들었는지를 알고 싶소.’
더 나아가 그는 화살과 화살촉과 화살통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를 궁금해하면서, 그에 대해 알기 전에는 자신에게 박혀 있는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자, 어떠하냐? 이런 그의 주장이 합리적이라고 너는 생각하느냐?”
말룬캬풋타 비구는 그제서야 비로소 깨달은 바가 있는 듯 보였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그를 위해 다정히 말씀하셨다.
“말룬캬풋타여, 네가 제기한 그 질문들에 대해 나는 말하지 않겠다. 무슨 까닭으로 그러한가. 그런 질문들은 이치에 맞지 않고, 법에 맞지 않으며, 청정한 행으로 인도하지 않고, 지혜로 인도하지 않으며,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고,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말룬캬풋타여, 나는 무엇을 말하는가. 나는 한결같이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바업에 대해서 말한다. 왜 그러한가. 이것들은 이치에도 맞고, 법에도 맞으며, 청정한 행으로 인도하고, 지혜로 인도하며,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하고,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이렇게 설하시자 말룬캬풋타는 세존이 말하는 바와 말하지 않는 바를 확실하게 알았고, 그에 기반하여 수행함으로써 큰 성취를 이루었다.
생각은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일으키는 생각과 자신과는 상관없이 저절로 일어나 첫 번째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이어지고, 두 번째 생각이 세 번째 생각으로 이어지면서 끝없이 전개되는 생각으로 구분된다. 전자의 생각은 팔정도의 정사(正思)에 해당되는 바람직한 생각이지만 후자의 생각은 분별과 번뇌의 일종으로서의 허망한 생각, 망상(妄想)이다.
세 번째 생각으로, 바람직할 수도 있고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는 생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철학적인 생각이다. 철학적인 생각은 좋은 생각일 경우 정사(正思)를 거쳐 바른 법(진실)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에 바람직한 생각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생각을 위한 생각, 즉 희론(戱論, 작난하는 논리)에 빠져버릴 위험성이 있는 생각이다.
말룬캬풋타는 희론의 위험에 빠져들었고, 세존께서는 희론하는 생각의 문제점을 ‘독화살의 비유’로써 설명하셨다. 닥쳐 있는 고통의 원인을 한 단계까지 밝히는 생각은 당연하고도 좋은 생각이다. 세존께서 늘 설하시는 사성제(四聖諦), 즉 고통과, 고통의 원인과, 고통의 소멸과, 고통의 소멸로 인도하는 방법에서도 고통의 원인이 논의되고 있다.
문제는 고통의 원인 또한 다른 원인의 입장에서는 결과가 된다는 점이 먼저다. 어제는 오늘의 원인이지만, 어제는 그저께의 결과이기 때문에 어제의 원인을 밝히려 들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어제까지 원인을 밝히는 생각은 좋다. 그러나 그저께, 그끄저께, 그그끄저께…의 방향으로 나아가며 원인을 밝히려 드는 생각은 합당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세 번 생각하고 행동한 사람을 칭찬하는 제자에게 공자는 “그가 두 번만 생각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세존 또한 공자와 같은 입장을 취하신다. 생각하라, 그러나 너무 많이 생각하지는 말라. 그것이 바르게 생각하는 것, 즉 정사(正思)의 실제이다. 거듭되는 생각이 끝나야지만 실천이 가능해진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삶은 생각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 또는 실행으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79호 / 2019년 3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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