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를 때려야 하는가, 소를 때려야 하는가
소가 수레를 끌고 가는데
만약 수레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수레를 때려야 수레가 가는가,
소를 때려야 수레가 가는가?
如牛駕車 車若不行 打車卽是 打牛卽是
여우가거 거약불행 타거즉시 타우즉시
- 남악회양(南岳懷讓) 선사
여기에 소개하는 유명한 말씀도 스승인 남악회양 선사와 제자인 마조도일 선사와의 대화에서 나온
가르침이다. 전등록(傳燈錄)에 의하면 어느 날 마조도일 스님이 전법원(傳法院)에서 매일 좌선을
하고 있었다. 남악회양 선사는 그가 훌륭한 법의 그릇임을 알아보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대덕은 좌선을 해서 무엇을 하려 하는가?”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자 남악 선사는 벽돌을 하나 들고 와서 절 앞 바위 위에서 바위에 대고 벽돌을 갈고 있었다.
그같은 행동을 본 마조 스님이 물었다.
“스님은 바위에 벽돌을 갈아서 무엇을 하려 하십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벽돌을 간다고 그 벽돌이 어찌 거울이 될 수 있습니까?”
“벽돌을 갈아서 거울이 되지 않는다면 좌선을 한다 해서 어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마조 스님의 바로 이 질문에 대해서 남악 선사가 하신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예컨대 소가 수레를 끌고 가는데 만약 수레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수레를 때려야 수레가 가는가 아니면 소를 때려야 수레가 가는가?”
마조 스님이 아무런 말이 없자 남악 선사가 다시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는 좌선을 배우는가 아니면 앉아 있는 부처를 배우는가? 만약 앉아 있는 부처를 배운다면
부처는 형상이 아니다. 어디에도 머무름이 없는 부처의 이치에서 마땅히 부처를 취하거나 버리지
말라. 그대가 만약 앉아 있는 부처를 배운다면 그것은 곧 부처를 죽이는 일이다. 만약 앉아 있는
부처에 머물러 부처에 집착한다면 부처의 올바른 뜻을 통달하지 못하리라.”
마조 스님은 이같은 가르침을 듣고는 마치 제호(醍醐)를 먹은 것과 같은 감동을 받았다.
“수레를 때려야 하는가? 소를 때려야 하는가?” 어찌 보면 뜻은 매우 평범하지만 대단한 말씀이다.
그만큼 평범한 진리가 위대하다는 뜻이다. 자동차가 멈췄을 때 차를 때려서 차가 다시 가도록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운전을 하는 사람에게 차를 계속해서 운전하라고 부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제일 현명하게 지혜롭게 산다는 수행자들이 이 간단한 문제를 놓치고, 근본(根本),
본질이 아닌 지엽적(枝葉的)인 일에 마음을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무엇이 근본이고 무엇이 지엽
인지를 몰라서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가치관이 아직 바르게 서지 못해서인가?
유교(儒敎)에도 “모든 사물에는 근본과 지말(枝末)이 있고 일에는 처음과 끝이 있으니, 그 앞과 뒤를
알면 곧 도(道)에 가깝다(물유본말 사유시종 지소선후 즉근도의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라고 말한다. 또 ”마차를 말 앞에 두지 말라“는 말도 있다. 당연히 말이 앞에서 마차를 끌고가야 한다.
선원에서는 ’몸을 조복(調伏) 받는다.‘는 말을 곧잘 한다. 몸을 다스린다 하여 억지로 결가부좌를 틀고
앉았다가 몸에 여러 가지 병을 얻은 어리석은 예도 적지 않다. 어리석은 사람은 몸을 다스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다스린다. 어리석은 사람은 부처를 찾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찾는다.
수레를 때려야 하는가, 소를 때려야 하는가? 부처를 때려야 하는가, 마음을 때려야 하는가?
출처 : 무비 스님이 가려뽑은 명구 100선 ④ (소를 때려야 하는가, 수레를 때려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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