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과 현대물리학

천지우주가 다 하나님이요, 부처님이다

장백산-1 2019. 9. 3. 12:18

천지우주가 다 하나님이요, 부처님이다. [3] [청화 스님]


여러분들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 법은 망상이나, 또는 허상이나, 그러한 잘못된 상을 갖고 있으면 범부고 외도입니다. 

 

그러한 허망상이 없이 참다운 실상(實相)을 깨달으면 이른바 성인이고 부처라고 말하는 겁니다. 범부와 성인과의 차이는 아주 그야말로 참 부처님 사자후 같이 결정적으로 명확합니다. 그러나 본래면목 자리에서는, 본래 실상자리에서는 모두가 다 하나의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성품(性品)의 생명(生命)입니다그러기에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말씀에도 ‘심진여자((心眞如者) 즉시일법계(卽是一法界) 대총상법문체(大總相法門體)’라. 무슨 말인고 하면 우리 마음의 본래면목자리는 우주의 근본 실상자리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 모든 것이 전부 다 사실은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더구나 세상이 이 유물주의 풍조 때문에 내 몸도 물질이고, 또 우리주변에 대상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다 물질뿐 아닙니까. 그 물질 때문에 싸우고 죽고 여러 가지 갈등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그 물질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불자님들 그것을 명백히 느끼시기 바랍니다. 물질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째서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가. 부처님 가르침은 이유가 없이, 논리적인 철학적인 그러한 이유가 없이 그냥 덮어

놓고서 이것이다 저것이다 라고는 말씀을 안 하십니다. 부처님 말씀은 결정설(決定設) 이기 때문에 꼭 사실을 사실대로 그때 그때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씀이 방금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물질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이와 같이 존재하고 내 주변이 다 물질뿐인데 왜 물질이 존재 하지 않는 것인가. 당연히 그런 의심을 품을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나라는 것 자체가 인연 따라서 잠시 우리가 잘 못 느껴서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나라는 것 자체가 사실은 없는 거란 말입니다. 나라는 것을 긍정해 버리면 부처님 가르침이 못 됩니다.


외도와 부처님 가르침과의 차이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면 우선 나라는 것이 없다는, 없을 무(無)자 나 아(我)자, 무아(無我)로 부터 출발한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자기평생 나(我)라는 그런 관념, 나(我) 라는 짐 때문에 끙끙 앓고 있습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내 

남편도 있고, 내 아내도 있고, 내 자식도 있고, 또는 내 재산도 있고, 모든 사람들이 나라는 관념(觀念) 때문에 웃고 울고 그때 그때 분노로 싸우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我) 라는 것이 잠시 인연이 화합돼서 잠깐동간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지로는 있지가 않습니다. 

이른바 무아(無我)란 말입니다. 불자님께서 무아라는 그런 관념에 대해서 그냥 쉽게 납득이 안가시더라도 무아가 부처님 말씀이고 내가 있다는 것은 이것은 하나의 망념, 허상에 불과하다 이렇게 생각하시고서 두고두고 무아에 대해서 아주 깊이 천착하고 탐구를 하셔서 정말로 무아, 정말로 내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만사가 태평입니다.

 

저는 지리산  한 토굴에서 한철을 겨울에 지냈어요. 이것저것 다 뿌리치고, 남 좋아하고 싫어하는 분별하는생각 다 

뿌리치고 오로지 공부만 하겠다는 그런 셈치고, 쌀을 물에 담가서 먹고 지내지 않았습니까마는 그러는 가운데서도, 그렇게 제 나름대로는 고행(苦行)을 했던 것인데 그런 가운데도 나라고 하는 관념이 사라지지가 않아요.

 

좋은 사람 좋게 생각되고 싫은 사람 싫게 생각되고 이렇게 분별을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냥 미친 듯이 붓으로 벽에다가 벽이 다 검어질 정도로 무아(無아) 무아(無我) 무아(無我) 무아(無我) - - - 하여튼 수수 수 만 번 썼습니다.

 

그래도 그 아(我)라는 관념, 나라는 것이 있다는 관념, 그 아상(我想)이 사라지지가 않아요. 그렇게 한다고 내가 있

다는 생각 그 업장(業障)이 있는데 사라지겠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我)라는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하면 이것은 범부이고 외도입니다. 범부 외도를 여의고 무아(無我)라는 관념을 우리가 확실히 새기고 느끼고 또 몸으로 구현해야 그래야 참다운 불자입니다.

 

어째서 무아(無我)인가 하면 아까도 얼핏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각 인연(因緣)이 잠시간 합해져서 있는 것 같단 말

입니다. 그러나 제행(諸行)무상(無常), 제행이 무상이라는 말은 이것은 그냥 모두가 섭섭하다 슬프다 그런 감성적인 말이 아니라, 투철한 과학적이고도 철학적인 논리입니다.

 

제행이 무상이라,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매 순간순간 그때그때 변화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것은 아

무것도 없습니다. 어느 순간도 일초의 몇 천분지 일순간도 우리 세포는 그때그때 신진대사해서 그냥 변화하고 있습니다. 일초전과 일초후의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가 똑 같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같은 변화를 느끼지 못 할 뿐입니다. 변화를 느끼지 못할 뿐인 것이지 어떤 존재나 우리가 금쪽같이 아끼는 우리 몸뚱이나 대상화 시키는 모든 존재가 다 그렇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라는 것만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 모두가 너도 없고, 산도 없고, 물도 없고, 모두가 다 올바로 보면 없습니다. 그러기에  제법공(諸法空) 아닙니까. 색즉공(色卽空)이라. 색은 물질을 말하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다 물질 아닙니까. 그렇게 보이는 물질이 모두가 본래 공(空)이라는 말입니다.

 

잘 생각을 못한 사람들은 원자(原子)로 분석하고 보다 더 미세한 소립자(素粒子)로 분석하고 그러면 종당에는 공이 되지 않는가. 이렇게 해서 공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분석해서 쪼개고 쪼개서 나중에 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당체(當體)가 즉공(卽空)이라, 물질 그대로 바로 공(空)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의 까막눈으로 보니까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바른 정견(正見)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당체가 즉공

이라, 색즉공이라. 색즉공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분석해서 종당에 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 그대로 공이란 말입니다.

 

다만 우리 들 중생의 지각능력(知覺能力)이 색즉공(色卽空)을 곧바로 보지 못해서 그럴 뿐인데...아까 말씀 마따나 

어째서 그런가 하면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라, 모든 존재가 그때그때 변화무쌍한 것이고 어느 순간도 머무름이 없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제법이 공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철두철미 과학적이고 철학적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그

쳐버리면 또 참다운 불법이 못 됩니다.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 공이 아닌 참다운 실상세계(實相世界), 이 무상사(無相寺) 이름같이 모든 상은 다 허망한 것인데 참말로 허망하다는 것을 깨달아 버리면 그때는 그 알맹이는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아까 제가 기신론을 언급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그 허망상(虛妄相), 가상만 떠나버리면  결국은 그야말로 진여라 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우리가 허망하다는 생각만 가지고서 거기에 집착하면 그때는 불교가 허무주의가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 부처님 사상은 가장 행복하고 가장 충만하고 불가사의한 그러한 가르침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참말로 있는 것은, 우리중생이 보는 것이 허망한 것이지, 성자가 깨달아서 보는 그러한 안목으로 본다고 생

각할 때는 모두가 다 부처님뿐이란 말입니다. 중생은 가상(假相)에서 보고, 깨달은 분들은 실상(實相)에서 봅니다.우리 중생은 상만 보고, 상을 떠난 그러한 성자의 안목에서는 영원적인 생명에 충만해 있는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란 말입니다.

 

불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과거의 성자는 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독교를 생각할 때는 하나님이 창조하고,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흙을 주물러서 만들고, 이렇게 했다고 생각할 때는 창조한 하나님과 창조를 당한 자연과 이렇게 두 갈래로 나누어지지 않습니까.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 이원적(二元的)인 사고(사고)는 굉장히 불행한 사고입니다.

 

우리 개인의 마음도 항시 불안스럽고, 또는 그런 생각으로는 불교에서 말하는 모두가 다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이다 라는 그런 논리가 나올 수가 없어요. 생각해 보십시오, 창조한 하나님 따로 있고, 창조된 자연계 따로 있고, 질적으로 부처님 가르침과 다르지 않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은 허망상을 떠나서 참다운 실상, 중도(中道)의 실상을 우리가 깨닫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공부방식인가 또 이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은 꼭 논리적으로,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논리를 먼저 다 밝힙니다. 사성제법문(四聖諦法門)이나 팔정

도(八正道)를 보나 다 그렇습니다. 어떤 면으로 보나 조금도 모순이 없는 그러한 부처님 가르침 인지라, 과거 뿐만아니라 지금 현재나 오지 않은 미래나, 세계 모든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는 데도 부처님가르침 아니고서는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선 인식론적으로 천지우주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다. 그런 도리를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걸 가리켜서 불교에서 해오(解悟)라, 해오는 풀 해(解)자, 깨달을 오(悟)자, 해오라, 이론적인 차원에서는 조금도 막힘이 없이 어느 것은 체(體)고, 어느 것은 용(用)이고, 이른바 체용성상(體用性相)을 깨닫는단 말입니다.

 

이렇게 돼야 우선 우리 마음이 안심(安心)이 됩니다. 우리마음의 불안의식을 해소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로 해서 참다운 깨달음은 되질 못하니까 참다운 자리, 진여불성 자리, 상(相)이 없는 자리를 우리가 깨닫기 위해서, 상이 없는 자리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때는 이른바 증오(證俉)라, 증명할 증(證)자, 깨달을 오(悟)자 말입니다.

 

천지가 진여불성 같으면 우리 스스로가 진여불성이 돼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증오를 하기 위해서는 그냥 그렁저

렁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금생도 업(業)을 많이 짓고 또는 금생에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과거 숙세에도 무수생 동안에 나고 죽고 나고 죽고 이렇게 윤회(輪廻)를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 지은 업장(業障)이 굉장히 많습니다. 업장이 일조일석에 다 소멸이 안 됩니다. 두고두고 차근차근 닦아나가야 되고 다만 업장이 무거운 분들은 좀 더딜 것이고 업장이 가벼운 분들은 좀 쉽게 업장을 없애고 그러시겠지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논리적으로 논리정연하게 현대의 모든 학문체계와  조금도 대치가 안 되면서 그것을 도리어 지도하는 그런 입장에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해오(解悟)라 풀 해(解)자, 깨달을 오(悟)자, 이치로는 먼저 알아야 한다 말입니다. 그렇게 해 놓고서 우리가  참말로 바른 우리 생명의 본 고향자리, 그 자리에 가기위해서는 두고두고 공부를 해야 할 것인데, 그런 공부도 물론 사람에 따라서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어떤 공부가 가장 하기 쉽고 제일 빠를 것인가,  그것을 우리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상(相)을 떠나 버린 위대한 분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나 중생이나 다 똑 같습니다. 똑같으나 우리 중생들은 상 속에, 이 상이라는, 허상 속에 살고 있어놔서 상을 여의기 위해서는 자기한테 맞는 방법이 필요하고, 그래서 부처님께서나  위대한 그런 선지식(善知識)들이 그때그때 중생의 근기(根機) 따라서 여러 가지 방편을 들어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용수보살(龍樹菩薩 150~250년경)이란 분은 ‘제2의 석가’라고 할 정도로 위대한 분 아닙니까. 대승불교는 마명대사

(馬鳴大師)가 대승불교의 할아버지고, 용수보살이 대승불교의 아버지라는 그런 말이 있을 정도로 대승불교는 용수보살 때 대체로 체계가 많이 세워졌습니다. 용수보살이 지으신 책 가운데서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이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의 이행품(易行品)이라, 이행품은 쉬울 이(易)자, 행할 행(行)자, 기왕이면 우리 중생이 누구나 다, 아주 고도한 업장이 가벼운 사람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나가 다 쉽게 공부하고 쉽게 통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이 없을 것인가,

이래서 용수보살이 그 선택한 법문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십주비바사론 가운데 이행품(易行品)이라, 쉬울 이(易)자, 행할 행(行)자, 그런 즉 말하자면 하나의 법문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공부 할 때는 과거세 우리가 어떻게 공부했던가, 과거세에 우리 업장이 어느 정도인가, 또는 지금 현재 인연

은 어떠한 것인가 이런 것을 감안해서 공부를 우리가 선택해야 되겠지요. 그래서 이 선택이 되어서 공부가 순탄하게 잘 되실 분들은 용수보살께서 말씀하신 이행품, 쉽게 행하는 그런 법문을 참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상을 떠나면 그 자리에서는 쉽고, 쉽지 않고 그런 차별 분별이 없단 말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독실하게 믿고 천지우주가 하나님뿐이고 나도 본래는 하나님이다. 이럴 정도로  이론적으로 굳게 믿는 사람들은 그때는 하나님을 염(念)하시면 좋습니다.

 

또 화두공안(話頭公案)을 들어서 화두공안에 마음이 온전히 통일되고 다른 잡념 없이 공부가 잘 되는 분들은 무(無)자 화두나 이뭐꼬(是甚麽) 화두나 그렇게 들고 하셔도 좋습니다. 본래는 다 하나의 자리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차원에서는 역시 보통 보편적으로 좀 쉬운 법이 있고 어려운 법이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용수보살의 십주비바사론의 이행품인데, 그건 어떤 것인가 하면 우리가 부처님을 생명(生命)으로 수용한단 말입니다. 부처님만 생명이 아니라 사실은 근본, 본질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뿐입니다.

 

유정무정(有情無情) 모두가 다 하나뿐인 생명 아님이 없습니다. 천지우주는 불교식으로 말하면 부처님생명으로,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생명으로 충만해있다 말입니다. 천지우주는 모두가 다 진여불성뿐이고, 또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천지우주 모두가 다 하나님뿐이란 말입니다.


지금 현대사회는 우리가 함부로 그런 성인들 가르침을 비방한다거나 또는 섣부른 비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다행히 모두를 다 하나의 진리로 수용할 수 있는 부처님 가르침을 지금 배우고 있어놔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가 배우는 부처님 가르침은 원만스럽게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로 봅니다. 하나의 생명으로 봅니다. 따라서 부처님은 바로 우주생명(宇宙生命)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다 부처님 아님이 없다, 신(神)이 아님이 없다. 이런 것이 이른바 철학적으로 말하면 범신론(汎神論pantheism) 아닙니까. 넓을 범(汎)자, 귀신 신(神)자, 범신론이라.

 

우리 불자님들께서 조금 어려우셔도 기본적인 논리나 철학은 가지셔야 됩니다. 지금 세상이 모두  철학의 빈곤이라, 철학의 부재라 그런 말 하지 않습니까. 정부 관료나 누구나 대통령이나 어느 사람이나 기본적인 철학이 필요합니다. 철학이 무엇인가? 철학은 모든 존재의 근원을 의미한단 말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인데 잘났거나 못났거나 도둑놈이거나 어느 사람이나 결국은 우리가

본래성품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진여불성이란 말입니다. 다 부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정치도하고 법을 집행해서 남한테 벌을 주고 하는 사람도 본래 하나의 생명이란 것을 알고 해

야 그래야 그때그때 오류를 안 범합니다. 소중한 사람의 그런 존엄인데, 인간이 존엄스럽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 

우리 인간자체의 생명이 어느 누구나 다 개개원성(箇箇圓成)이라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어느 죄인을 심판할 때도 우리는 “저 사람은 죄를 지었으니까 마땅히 거기에 상응되는 벌을 받고서 고생을 

해야 된다” 이러면 그것은 철학이 없는 그런 소리입니다.

 

어떤 사람도 그의 본래마음은 부처입니다. 인연 따라 악연(惡緣)을 만나서 과거 숙세에 무수생(無數生) 동안에 자기가 지은 바 업장 따라서 금생에 나쁜 짓하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상은 모두가 다 부처님입니다따라서 그렇게 알아야, 실상(實相)을 알아야 그래야 이른바 철학을 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어느 것을 하든지 간에 다른 사람의 아버지가 되나 또는 어머니가 되나 어느 입장에서이든지 간에 꼭 그렇게 알고 하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자기 인생을 행복으로 유도 하는 그런 길입니다.

 

우리가 농사를 짓는다 하더라도 그래요. 한 포기의 벼, 또는 사과 한 개 모두가 다 그냥 물질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우주생명의 한 덩어리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법이 연기법(緣起法)이라, 이렇게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법이다. 연기법이란 그냥 보통 이것과 저것과 인(因)과 연(緣)이 합해져서 이루어졌으니까 고유한 것이 없다. 이런 정도가 아니라 연기법의 가장 시초원인이 무엇인가. 연기법의 줄거리를 이렇게 더듬어 올라가면 차근차근 올라가면 끄트머리는 무엇이 돼 버리는 것인가. 그것이 바로 진여법성(眞如法性),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나 그것의 본래적인 자리는 다 진여법성입니다. 진여불성입니다.따라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이나, 참선하는 법문도 그래요. 그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를  안 여의여야 참다운 공부가 됩니다. 우리가 가령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덮어놓고 애쓰고 외워도 물론 공부가 되고 가피(痂皮)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외우면 그것은 하나의 염불(念佛)은 돼도 참선(參禪)은 못 됩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 참선은 본래의 자리, 본래면목자리, 즉 진여불성자리를 여의지 않아야 참선이란 말입니다. 가령 이뭐꼬 이뭐꼬 하고, 무무(無無) 하고 우리가 화두공안선을 한다 하더라도 본래면목자리 진여불성자리를 안 여의야 참선이 되는 것이지, 그냥 공안을 그대로 상대적인 마음 가지고 해서는 그것은 참선이 못 됩니다.

 

그와 똑 같이 염불도 그래요. 부처님이 저 저만치 대상으로 계시다가 우리가 열심히 하면 그때는 우리를 가피하는 타력적(他力的)인 그러한 우리를 가호(加護)하는 그런 분이다. 이래서는 참다운 염불도 못되고 또한 동시에 염불참선이 못돼요. 우리 불자님들이 기왕이면은 그냥 염불이 아니라 염불참선이 되고싶어 하시겠지요. 염불인 동시에 참선이 되면 얼마나 좋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참다운 염불은 바로 그것이 염불 참선이어요. 그건 어떠한 것인고 하면 우리마음이 본래의 자리, 그 진여불성이라는 실상자리를 안 여의면 그때는 같은 염불도 염불인 동시에 염불참선이 됩니다.

 

다른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외고 싶어서 하나님을 그렇게 염송하신 분도 그래요. 하나님이란 것이 어느 구분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우주진리다, 이렇게 보편적으로 인식을 하고서 동시에 그런 자리, 천지우주가 하나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오! 주여 하면 그때는 그것도 하나의 훌륭한 참선이 됩니다. 그 본래면목자리 본래 고향자리를 안 떠나면 다 참선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을 몇 번 더 했습니다마는 용수보살 이행품, 쉬운 것이 무엇 인고 하면 그냥  다른 공부도 다 중요하지만 우리 일반적인 우리 바쁜 생활을 지내는 우리중생들을 위해서는 부처님을 생명으로 받아들이고 부처님을 인격적으로,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부처님생명뿐이다 부처님뿐이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도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모든 부처님은 우주를 몸으로 삼는단 말입니다. 우주가 바로 부처님입니다. 우주를 몸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것, 어느 누구나가 다 부처님을 이렇게 나누어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온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물질은 분할 할 수 있지만 그 보이지 않는 우주생명자체는 분할이나 구분할 수 없단 말입니다. 모두가 다 천지우주가 온전히 부처님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서 염불을 하신다고 생각할 때는 바로 참다운 염불인 동시에 바로 염불참선입니다.

 

그렇게 부처님 명호(名號)를 외는 것이 어째서 빠른가. 그것은 그 사람의 근기라든가 여러 가지로 작용이 되겠지만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님의 생명뿐이기 때문에 우주자체가 바로 부처님생명자체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을 하나의 자기생명과 공통됨과 동시에 똑 같은 절대적인 생명이다, 이렇게 우리가 느끼면서 부처님이름을 외는 그것은 우리 마음을 가장 편안히 하고 동시에 모든 가피를 우리가 거기서 받들고 거기서 가피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우리 중생계(衆生界)는 사람이 있고, 사람의 눈에 안 보이는 신장(神將)이나 그러한 존재는 보

통은 무시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눈에 보이는 우리 사람 외에도 안 보이는 그런 신장도 있고 또는 금생에 살다 돌아간 영가(靈駕)도 있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영가들이나 선신들이나 또는 더러 악신도 있고 합니다.

 

그런 존재들이 부처님의 이름, 부처님의 명호는 만덕장엄불(萬德莊嚴佛)이기 때문에 부처님 이름 자체에 모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능력(能力)이라든가 또는 행복(幸福)이라든가 또는 모든 복덕(福德)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이름은 부처님을 영원적인 의미에서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목숨 수(壽)자, 한도 끝도 없는 생명이라 그래서 무량수불이라 또는 부처님의 지혜광명(智慧光明)은 우주의 어느 때나 빛나고 있다 그래서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빛 광(光)자, 무량광불이라.

 

우리는 광명(光明)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천지우주는 사실은 지금 광명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자도 역시 모든 물질을 이른바 쪼개고 쪼개고 들어가서 소립자나 그런 단계, 그런 단계에 이르면 일체존재가 모두가 다 전자기장(電磁氣場)광명이라, 방사광명(放射光明)이라, 이 우주의 근본은 그런 전자기장, 방사광선으로 충만하여 항시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들은 기술에 따라서 전자기장광명, 방사광명을 볼 수가 있을 뿐인 것이지 우리 육안으로는 그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과학이 다 증명하는 것이고, 또는 우리 스스로 공부를 깊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과학자가 아닌 어느 누구도 우리 마음의 정화(淨化)에 따라서 광명을 느끼고 감득(感得)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능엄경(楞嚴經)에서 억불염불(憶佛念佛) 이라,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 이름을 외면,

현전당래(現前當來) 필정견불(必定見佛)이라, 금생에든지 내생에든지 틀림없이 우리가 부처님을 만나고 

부처님과 하나가 된단 말입니다.

 

부자간이나 모자간이나 부부간에도 역시 금생에 서로 그리워서 인제 살다가 헤어지면 내생에 가서 꼭 다시 만납니다. 똑 같은 처지로는 안 만나도 꼭 다시 만납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중생은 부처님하고 본래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억불염불이라, 우리가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또는 부처님의 그러한 이름을 외운다고 생각할 때는 현전당래 필정견불이라. 현생이나 또는 내생이나 틀림없이 부처님을 만나 뵌단 말입니다.

 

만나 뵈옵는 경로는 다르겠지요. 훤히 빛나는 광명으로 만나 뵈올 수도 있고 더러는 사람 몸 같이 된 그러한 상징적인 광명상으로 우리한테 나투기도 하시고 그러시겠지요. 그와 같이 다른 것도 또 거기에 부수되어서, 악신도 선신도 모든 신장도 많이 있는 것인데 그런 것이 어떤 존재나 근본자리는 부처님인지라 우리가 근본자리인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찬탄(讚嘆)한다고 생각할 때 그 나쁜 신들은 그때는 우리를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리고 선신들은 그때는 좋아서 그냥 환희심(歡喜心)으로 우리를 지켜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 꼭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리(眞理)에 따라서 진리에 수순(隨順)해서 산다고 생각할 때는 무량의 공덕이 삶에 다 따릅니다. 다른 사람들도 역시 우리가 참말로 바르게 공부하면 어떤 식으로 하든지 간에 부처님 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근본자리진여불성자리를 여의지 않는 공부니까요.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것이나 우리를 다 숭상(崇尙)합니다. 자기는 몰라도 자기 몸에서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부처님의 향기가 풍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안에서  아버지나 어머니 노릇을 한다하더라도 부모님이 함부로 자시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정말로 부처님 신앙에 사무친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숭배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생활이 어느 면으로 보나, 직장생활을 하나 어떤 생활을 하나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행복스런 생활입니다.

 

이 세상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오직 부처님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가상(假相)을 떠나서 실상(實相)으로 부처님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그러한 바른 신앙입니다.

 

여러분들이 하시는 공부에다가 여러분들이 그런 것을 생각을 하셔서 아까 용수보살이 말씀했다는 이행품, 쉬운 공부, 쉬운 공부라는 것은 무엇 인고 하면 천지우주가 생긴 대로 천지우주가 부처님뿐이니까 부처님은 바로 우주생명이니까 그런 자리를 우리가 알고서 거기에다가 그 자리에다가 마음을 두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육조단경에도 중요한 법문이 있어요. 수지(須知) 일체만법(一切萬法) 자성기용(自性起用)이라. 모름지기 알지니 일체만법은 자성 진여불성에서 인연 따라서 생겨난 것이라는 말입니다.

 

진여연기(眞如緣起)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진여연기란 것은 무엇 인고 하면 모든 것이 다 진여라는 진여불

성에서 생겨나왔다는 그런 연기법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인연법(因緣法) 하면 그냥 쉽게 이것과 저것이 합했다는 그런 간단한 것을 생각할 수가 있지만 참다운 인연법은 근본이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라그래서 이것이나 저것이나 나나 너나 누구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 아님이 없다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참다운 인연법의 해석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할 때는 우리가 비록 여러 가지 다른 환경에 처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물들지 않는단 말입니다. 우리는 좋은 생각을 했다가도 그냥 환경이 바뀌면 거기에 마음이 끌리고 물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생각이 항시 일체만유의 기본자리,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성품자리인 진여불성에다가 마음을 둔다고 생각할 때는 어떠한 환경에도 우리가 물들지 않고 그러면서 심자재(心自在)라 우리 마음이 자유스럽고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같이 생각을 하는 것을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그렁저렁 우리 마음을 그대로 방하(放下)

시키지 말고서 우리 마음을 항시 다 잡아서 우리 마음의 근본고향자리, 우리생명의 근원자리에다가 우리 마음을 딱 거기에 머물게 한단 말입니다. 그 자리에서 비춰 본단 말입니다.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 최상의 행복을 누리고, 또 우리 건강을 위해서도 최상의 건강법입니다.  

 

무량무수의 선신들이 우리를 항시 지키면서 우리의 공부도 도와주고 또는 사업도 도와주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무상사 같은 이러한 훌륭한 그러한 부처님 전당을 만드신 것도 계행(戒行)이 부실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계행이 청정한 분들은 부당한 것을 발원도 않습니다. 계행이 청정한 분들은 청정한 마음 때문에 꼭 정당한 것을 발원합니다. 그 정당한 것을 발원하기 때문에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다 돕는 것이고, 무수한 신장이 다 돕는 것입니다. 세속 일을 하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다 그렇게 도와줍니다.

 

따라서 불자님들께서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선 도덕적으로 계행을 잘지키고, 그렇게 하면서 바른 정당한 것을 우리가 구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실패할 것이 절대로 없습니다. 부처님도 돕고 무수한 신장이 다 돕고 다른 사람들도 계행을 잘 지키면 그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향기가 풍긴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다 좋아하고 따르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하셔서 한없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