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과 현대물리학

공 성 상(空-性-相)

장백산-1 2020. 7. 8. 10:13

배광식의 세상 속 경전읽기

 

오염된 의식의 범부, 깨끗한 의식의 성인

 

25. 공 성 상(空-性-相)

 

청화 스님이 엮은 금타대화상의 금강심론(金剛心論) ‘제1편 일인전의 일인도 제2장 보리방편문 제3절 삼신요별(三身了別)’에,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의 삼신(三身)을 각각 법신(法身)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체대(體大). 진(眞). 공(空)], 보신(報身)은 원융무애지[圓融無碍智. 상대(相大). 여(如). 성(性)], 화신(化身)은 수연불변식[隨緣不變識. 용대(用大). 여여(如如). 상(相)]으로 배대하였다.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인 삼신(三身)이 곧 심(心) ·지(智) ·식(識)이며,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체(體) ·상(相) ·용(用) 삼대(三大)이며, 진(眞) ·여(如) ·여여(如如)이며, 공(空) ·성(性) ·상(相)인 것이다.

 

법신 ·보신 ·화신 삼신이 진리의 여러 측면을 인격화한 것이라면, 공(空) ·성(性) ·상(相)은 진리의 여러 측면을 이치로 본 것이다. 수연불변식(隨緣不變識)은 일진여[一眞如. 대승기신론의 일심(一心)]가 인연(因緣) 따라 오염하되(隨緣眞如), 변하지 않고 깨끗하여(不變眞如), 오염되기도 하고 깨끗하기도 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如如相)’을 보여준다. 이 ‘여여상(如如相)’의 그러한 성품(性)이 진실한 공(진공, 眞空)인지라, 공(空) ·성(性) ·상(相)은 하나도 아니요(非一), 둘도 아니며(非二), 또한 셋도 아니다(亦非三).

 

삼신과 공성상의 관계를 다시 부연하면, 진[眞. 법신, 공(空)]과 ·여[如. 보신, 성(性)]가 삼계육도[여여(如如) .화신. 상(相). 곧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三界)의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육도(六道)]에서, 인연(因緣) 따라 다르게 익어가니(隨緣異熟) 오염된 의식을 받아들이는 범부 중생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성품은 변치 않으니(眞性不變) 깨끗한 의식을 받아들이는 성인이요 붓다이다.

 

오염된 의식의 중생과 깨끗한 의식의 성인이 함께 있는 그대로의 모습(如如相)이 화신(化身)이고, 오염된 의식과 깨끗한 의식이 한결같은 일여(一如)의 성품(一如性)이 보신(報身)이며, 성품과 모양의 본래 공(空)한 경지(本空境地)가 법신(法身)이다.

 

법신(法身)은 청정한 허공(淸空心界)과 같고, 보신(報身)은 (공덕의 성품이) 충만한 바다(淨滿性海)와 같고, 화신(化身)은 바다 가운데 떠도는 거품 중생의 모습(漚相衆生)과 같으나, 실상(實相)은 공(空)도 아니고 유(有)도 아니며(非空非有), 참붓다는 3신(三身)도 아니니, 수행을 통해 말과 글을 떠나 실제(實際) 뜻을 요해(了解)하도록 해야 한다.

 

대반열반경에 이자삼점(伊字三點. ∴ 또는 ∵ . 산스크리트)의 비유가 나온다. 이자삼점(伊字三點. ∴ 또는 ∵)은 점 세 개를 삼각형으로 찍어 놓은 글자를 가리키며, 산스크리트 문자의 발음을 음사(音寫)한 것이 한자로 ‘이(伊)’이므로 이자삼점(伊字三點)이라 한다. 이자삼점(伊字三點, ∴ 또는 ∵)은 가로도 세로도 아니고 삼각의 관계를 이루었으므로 물(物)이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며(不一不異), 앞도 뒤도 아닌 것(非前非後)에 비유한 것이다. 열반경에서는 법신 ·반야 ·해탈의 삼덕(三德)에 비유한다. 다른 곳에서는 공(空). 성(性) 상(相), 법신 보신 화신인 삼신, 불법승 삼보, 삼법인 등이 ‘셋이 곧 하나이며(三卽一), 하나가 곧 셋임(一卽三)’에 비유하기도 한다.

 

“무엇을 이름하여 ‘비밀히 감춘 것’이라 하느냐. 마치 ‘이자(伊字)의 세 점 ∴’과 같다. 만약 (가로로) 나란히 있어도 이자(伊字)를 이루지 못하고 세로로 있어도 또한 이자(伊字)가) 이루어지지 않나니, 마치 마혜수라왕 [대자재천(大自在天), 색계의 맨 위에 있는 색구경천(色究竟天)에 사는 신(神). 힌두교의 시바신] 얼굴에 눈이 세 개 있는 것과 같아야 비로소 이자삼점(伊字三點. ∴ )을 이루는 것이다. 만약 각각이라면 또한 다시 글자를 이루지 못한다. 나도 또한 이와 같아서 해탈(解脫)의 법이 열반이 아니요, 여래의 몸(法身)도 열반이 아니며, 마하반야(摩訶般若) 또한 열반이 아니니, 해탈(解脫) 여래의 몸(法身) 마하반야(摩訶般若) 세 가지 법(法)이 각각 다름도 열반이 아니다. 나도 이제 이와 같은 세 가지 법(法)에 안주하나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짐짓 이름하여 방편으로 열반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니라.”  (大般涅槃經 T0374_.12.0376c11-17, T0375_.12. 0616b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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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현대불교신문(http://www.hyunbu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