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 아닌 것이 없다. - - 청화스님
인생이 하나의 나그네 길인데 잠시 살다가 가는 것이 인생인데 억지로 그렇게 살 필요가 없는 것이고 그렇게 억지로 살라고 하니까 돈도 억지로 벌어야 되고 돈을 억지로 벌려고 하면 또 부정부패가 또 따르고 그러겠지요.
소유란 것이, 아까 말씀드린바 소유관념(所有觀念) 그것이 굉장히 참 치사스러운 것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따져보나 아무리 깊이 생각해 봐도 내 몸뚱이가 내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몸뚱이가 참다운 내 것이면 영원히 내 것이 되어야 되겠지요. 겨우 몇 십년동안 그 한정된 시간에 머물러 살다 가는 것이 우리들 몸뚱이 아닙니까.
몸뚱이가 갈 때는 나 몸뚱이 간다 라는 말을 하겠습니까.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은 소유관념(所有觀念) 물질관념(物質觀念)은 꼭 이겨야 극복해야 됩니다. 부처의 법, 불법(佛法)이라는 것이 본래로 내가 없는 것이지, 부처님께서 일반 중생들이 욕심이 많으니까 무아 무소유이니까 무아 무소유의 생활을 해라 이렇게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본래 나도 없고, 내 소유도 없다는 말씀을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 없는 것인데 우리 중생들이 그 논리적으로 생각을 잘 못하니까 우리가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지금은 다행히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정밀화되어가지고서 과학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땐 결국은나도 없거 내 것도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 법, 즉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 열반적정(涅槃寂靜)은 모두 철두철미한 논리적인 체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를 할 때도 역시 자력, 자기 힘만 가지고서 아, 내가 지금 무슨 공부를 하니까 이걸로 해서 내가 꼭 성불하겠다, 이렇게 의지를 갖는 것은 좋은데 우리가 알고 모르고 상관이 없이 이 우주에는 항시 우주의 힘, 즉 부처의 힘이 넘치고 있단 말입니다. 우주의 힘이란 말이나 부처님 힘이란 말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우주는 무생물(無生物)이 아니라 우주 자체가 바로 부처의 생명덩어리, 즉 하나의 생명체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 우주에는 그런 우주생명이 끝도 갓도 없이 넘쳐있기 때문에 우주는 그냥 아무 목적 없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주의 목적의식(目的意識)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무슨 목적인가. 모든 중생을 다 본래 성품자리, 우주의 본래성품이 바로 불성인데 우주의 모든 존재를 똑같이 불성자리에 돌아오도록 하는 거란 말입니다. 천지우주란 것은 우리 불교의 4겁설(四劫說 : 成-住-壞-空) 즉, 우주가 이루어지고 또 중생이 머물러 살고, 또 우주가 파괴가 되고, 또 드디어는 공(空)으로 돌아가고 또 다시 반복되는 것이 불교의 사겁설입니다. 그와 같이 항시 우주란 것은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도 모두 부처님 품안으로 갔다가 다시 거기에서 또 중생계가 이루어진단 말입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나가 다 끝에 가서는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경에도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으니까 일체중생(一切衆生) 개당작불(皆當作佛)이라, 모두가 종당에는 다 부처가 된단 말입니다. 본래부처인데 부처가 안 될 수가 있습니까. 다만 우리 노력여하에 따라서 노력을 우리가 온전히 한다고 생각할 때는 빨리 될 것이고 노력을 안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우주가 파괴될 때까지는 우리가 윤회(輪廻)를 해야지요. 천상으로 갔다가 또는 지옥으로 갔다가.
고정불변하는 것은 없다 하더라도 우리 중생계 인간계도 항시 그대로 머물러있지는 않습니다. 이것도 참 변화무쌍한 것인데 우리 인간계가 변화무쌍하듯이 지옥계나 천상계도 역시 변화무쌍합니다. 변화무쌍한 대로는 분명히 지금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업을 잘 지으면 그때는 틀림없이 천당 갈 수가 있는 것이고, 업을 잘 못 짓고 그야말로 탐욕많은 중생은 아귀가 될 수가 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런 여러 가지 우리 중생들의 생활 상황에 따라서 그런 차별이 있다하더라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여불성이 이것이 우리 생명의 본 고향자리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가 다 모든 중생을 그런 불성자리로 이끌어야 된다는 불성자리로 다가서게 하는 그런 힘이 원래 있단 말입니다.
물리적으로 말하면 그런 힘이 인력(引力)이지요. 그래서 그런 힘이 부처님의 힘의 본원(本願)입니다. 우리가 사홍서원을 할 때 모든 중생이 다 성불이 되고, 모든 중생이 다 무량의 그런 부처님 법문을 배우고, 그런 서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서원은 이것은 우리 개인의 참다운 서원인 동시에 바로 우주의 서원이란 말입니다. 우주의 서원, 이것이 이른바 사홍서원입니다.
따라서 원래 그런 서원이 우주에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저절로 그런 서원을 지금 타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 기운을. 그래서 타력기운은 없는 것을 우리가 끄집어 오는 것이 아니라 원래 우주에는 모든 중생을 다 성불로 이끌어가는 그런 힘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기운에 우리가 편승을 좀 해야되겠지요. 그런 편승하는 기운이 이른바 타력공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한다든가 또는 화두를 참구해서 의심을 한다든가 그런 것도 모두가 다 원래 우주에 있는 그런 기운에 편승해서 우리가 부처가 지금 되어가는 것입니다.
다만 더디고 빠른 것은 우리가 얼마만치 정진하는가에 달려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우리 마음을 다스리는 그런 방법 중에서 보통 4가지 방법을 말 합니다. 한 가지 방법은 상좌삼매(常坐三昧)라. 삼매란 아까도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을 오로지 진리로 통일시키는 것이 삼매입니다. 인도의 말로는 삼마지(三摩地)인데, 우리 마음을 아무렇게나 통일이 아니라 참다운 도리로 통일시키는 것이 삼매인데, 항상 상常자 앉을 좌坐 말입니다. 항시 앉아서 하는 그런 삼매법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로 우리가 가부좌를 틀고 한다든가 우리가 선방에서 한다든가 그런 법은 상좌삼매에 해당합니다.
또 한 가지는 상행삼매(常行三昧), 즉 항상 상常자, 행할 행行자, 항시 갔다왔다 갔다왔다하면서 삼매에 드는 공부를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공부하다보면 또 혼침이 많은 사람은 앉아서 그냥 꾸벅꾸벅 졸기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아, 어느 구간을 딱 정해가지고서 가사 탑을 돈다든가 또는 집을 돈다든가 또는 어느 무슨 나무 밑을 우리가 산책한다든가 그렇게 갔다왔다하면서 하는 공부가 상행삼매입니다.
또 한 가지는 비행비좌삼매(非行非坐三昧)라. 아닐 비非자, 행할 행行자, 아닐 비非자 앉을 좌坐자. 그러니까 반쯤 정도는 앉기도 하고 또는 서기도 하고 그와 같이 그때그때 우리가 교차해서 즉 말하자면 편리하게 자기 능력 따라서 우리가 한단 말입니다. 또는 한 가지
4번째는 반행반좌삼매(半行半坐三昧)라. 우리가 하는 그런 공부하는 방식가운데서 앉는 것과 서는 것을 그때는 반반씩 한단 말입니다. 반 틈 정도는 그냥 우리 앉아서 하고 또는 반 틈은 갔다 왔다 하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 4가지 방식을 보통은 우리 공부하는 방법으로 말씀을 하고 있어요. 한번 다시 말씀드립니다. 상좌삼매라. 항상 앉아서 하는 보통 선방에서 하듯이 앉아서 하는 그런 법이 상좌삼매고, 또 한 가지는 상행삼매라, 우리가 걸음으로 해서 혼침 많은 사람들은 상행삼매를 또 많이 합니다. 상행삼매도 좋고. 또 반좌반행이라, 어떻게 붙이나 하여튼 반 정도는 앉고 반 정도는 서고. 적당히 이와 같이 두 가지 방법을 절충해가면서 공부를 한단 말입니다. 또 한 가지는 비행비좌라. 앉지도 않고 서지도 않고. 그때는 아무런 그때는 결재라든가 한계가 없이 그때그때 편의 따라서 가사 5분 동안 좀 걸음 걸었다가 또 다시 한 20분 동안 앉아서 한다든가 이런 식으로 하는 공부가 이것이 비행비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공부할 때는 자기 건강이라든가 또는 자기 취향이라든가 말입니다. 또는 혼침이 많다든가 적다든가 그런 것을 헤아려서 적당히 조절해서 하시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아까 타력염불에 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만 역시 자력과 타력 문제는 굉장히 그 중요하게 이것이 이루어진 그러한 하나의 수행법이기 때문에 관심을 많이 두고 우리가 공부를 하고 연구를 해야 됩니다.
역시 자기 힘이란 것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자기란 것이 원래 불교에서는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자기 힘이라 해도 내내야 자기를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의 우주의 힘이라고 볼 수가 있지요. 일체존재가 본래로 부처 아님이 없이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참 어느 때든지 무슨 부처란 것이 꼭 사람 마음한테만 불심(佛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는 결국은 불심뿐이란 말입니다. 이 공간도 모두가 다 불심으로 충만돼 있습니다. 천지우주가 하나의 불심뿐입니다.
어디에나 에너지가 없는 데가 없지 않습니까. 이 공간속에나 모두가 그야말로 지금 산소나 수소나 모두 원소가 지금 꽉 차있단 말입니다. 그렇듯이 우주에는 결국은 이 불심이라 하는 순수생명(純粹生命)이 충만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할 때도 우주에 충만해있는 그 진리의 당체인 진리의 그 기본적인 생명자리를 의식을 해야 돼요. 우리가 깨달아버리면 그때는 의식할 것도 없이 진리하고 하나가 되었으니까 그 자리에서 영원한 생명의 광명속에서 우리가 소요하겠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자리를 그 생명의 본체하고 빨리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가 되어야 그래야 윤회를 벗어나고 성불이 되니까 말입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그 하나의 자리를 우리가 의식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른바 염불이라든가 여러 가지 그런 방편을 제시를 많이 했습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지장보살(地藏菩薩)이나 모두 염불(念佛)도 역시 아무렇게나 그냥 그렇게 제시가 된 것이 아니라 영원적인 그 불성자리, 불성자리의 공덕을 우리한테 제시했단 말입니다. 그런 이름도 우리 사람들이 그냥 김 아무개다 뭣이다 이렇게 아무렇게나 짓는 것이 아니라 그 성자들이 하는 행위는 이것은 아무렇게란 것은 절대로 없습니다. 모두가 다 그 본체와 이 관계성에서 이루어진단 말입니다. 가령 나무아미타불 하면 나무아미타불을 하는 하나의 그런 명호(名號)밑에서 얼마만치 우리 중생이 많이 정화가 될 것인가 말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생명이 거기에 묻어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김 아무개 박아무개 그 이름들은 우리 중생들이 적당히 짓지 않습니까. 허나 부처님 명호, 부처님 이름보고 명호라고 하지 않습니까. 부처님 명호는 그렇지 않고 부처님의 공덕(功德)이 이름에 거기에 묻어있단 말 입니다.즉 따라서 그런 부처님의 공덕을 우리가 꼭 의식해야 됩니다. 끝도 가도 없이 전개되어 있는 생명의 바다자리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염불을 왼다하더라도 아, 관세음보살이 어디가 모양이 이렇게 한분이 아주 거룩하게 보인다는 그와 같이 관념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의 방편(方便)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로운 생명이 우주에 충만해있다. 불교란 것은 오직 그 우주적인 하나의 생명이니까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인 것이지 둘이나 셋이 있는 생명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봐서 나는 나 너는 너 그러는 것이지 우리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바탕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깨닫고자 하는 것은 꼭 자기 스스로 아, 뭐 무슨 성자가 되어가지고 자기 스스로 위대한 사람이 되고 한다는 그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천지우주와 자기와 결국 하나가 되어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야 깨달은 것입니다. 원래 하나니까 말입니다. 원래 하나인 것을 우리 중생은 나로 보고 너로 보고 우리가 분별하고 구분해서 본단 말입니다. 아무리 미운사람도 아무리 좋은 사람도 결국은 자기와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지장보살 염불을 한다하더라도. 더러 잘 모르는 사람들은 관세음보살 염불 하는 사람한테 대해서도 자기가 지장보살을 해서 조금 더 힘 얻은 사람들은 관세음보살 그만두고 지장보살을 하라, 이런단 말입니다. 굉장히 이것은 그야말로 참 옹색한 그런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지장보살을 왼다하더라도 지장보살로 해서 우주를 다 통투하니 조금도 막힘이 없는 그런 생명으로 봐야 그래야 지장보살 염불을 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하나의 중생의 그런 그릇 따라서 부처님 방편이, 즉 말하자면 여러 가지로 있는 가운데서도 이른바 총대명사(總代名詞), 총대명사의 명호는 내내야 아미타불(阿彌陀佛) 아닙니까. 그러니까 저 같은 사람 생각으로 해서는 기왕이면 총대명사 아미타불로 해서 그렇게 다 했으면 될 것인데, 이래저래 복잡한 이름을 그렇게 각기 고집을 부리고 한다는 것은 조금 그때는 자기 스스로도 그마만치 명호자체가 그것이 제한되기 때문에 이름도 역시, 이름이 중요한 것은 이름대로 해서 또 의의가 있지 않습니까.
가사 좁은 범위에서의 개념적인 이름과 보다 더 광범위한 그런 이름과는 또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헌데 그런 여러 가지 이름가운데서 이른바 그 총대명사는 역시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불경 보면 무생청정보주명호無生淸淨寶珠名號라, 무생청정보주명호라. 무생이란 것은 없을 무無자, 날 생生자 말입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결국은 청정보주淸淨寶珠라. 보배 보寶자, 구슬 주珠자. 생멸을 떠난 아주 그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청정보배같은 이름이란 말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아미타불阿彌陀佛 이름이라고 이렇게 돼 있어요. 경經에. 그래서 그 아미타불로, 아미타불로 통일하면 그와같이 이름자체가 아주 가장 보편적인 이름이기 때문에 우리한테 우리 공부에도 보다 더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여러분들 취향대로 하시되 하여튼 가급적이면 가장 그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그런 이름을 하나 취해서 그렇게 하시면 좋겠고, 또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다른 식의 그런 공부를 한다하더라도 모두가 다 근본자리를 안 떠나고 한다는 것은 똑같습니다.
어느 화두를 의심 하나 모두가 다 불성자리를 우리가 찾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공부나 그렇게 생각하면 좋은데 근본자리를 떠나서 그냥 우리 생각이 덮어놓고 의심한다든가 덮어놓고 염불만 한다든가 그래서는 우리 공부에 큰 도움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공부를 하든지 간에 우리의 본래면목자리, 우주의 근본자리를 우리가 안 떠나는 그런 자세에서 우리가 자기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가령 주문呪文을 외도 주문을 외는 그 주문 자체가 역시 우주의 그 본래 에너지 자리를 말씀했습니다. 마치 명호가 그렇게 하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다른 그 묵조黙照하는 잠자코 우리가 명상에 잠기는 그런 법도 역시 그 아주 그 묵시적黙示的인 것은 하기는 하지만 역시 우주의 생명자리를 바로 의미해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화두話頭나 어느 염불念佛이나 어느 주문呪文이나 또는 불경佛經을 외는 것이나 모두가 다 그 하나의 자리에 대한 그런 간절한 참구심參究心과 그런 그리움으로 해서 충만한 그런 마음으로 공부를 하셔야 그래야 우리 공부가 보다 더 속달이 될 것이고, 또 공부하는 방법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앉아서 하나 서서 하나 또는 반반 섞어서 하나 그것은 그때그때 상황따라서 능률적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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