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모든 ‘수(數)’에 ‘0’을 곱하면 왜 ‘0’이 되는가?

장백산-1 2020. 5. 6. 14:14

4. 모든 ‘수(數)’에 ‘0’을 곱하면 왜 ‘0’이 되는가?     


’수(數)'는 어떤 것(성분)으로 이루어졌나?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수학에선 ‘인수분해(因數分解)'라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가령 10을 인수분해하는 것은 곧 10이라는 수가 어떤 수들로 이루어졌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10을 구성하는 수들이 바로 인수(因數)입니다. 10은 10, 5, 2, 1 등과 같은 ‘인수(因數)’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인수(因數) 중에서 10이라는 수 자체와 1을 제하고 나머지 5와 2라는 수가 10의 인수(因數)입니다.


이런 어느 수의 인수관계(因數關係)를 일반화하기 위해 수(數) 대신 문자(文字)를 사용해 보겠습니다. Y의 인수(因數)가 a와 b라고 할 때, 이 관계를 수식(數式)으로는 다음과 같이 표시합니다. Y=a×b 이것을 약해서 Y=a b - - ①. ①식에서 b를 m-n 이라고 놓으면 다음과 같은 식이 됩니다. Y=a b=a(m-n)=am-an - - ②. ②식에서 m과 n이 서로 같다고 놓으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②식에서 m=n이면 ③. Y=a b=a×0=0  - - ④. 같은 데서 같은 것을 빼기를 하니 ‘0’이 됩니다. ④식의 결과 '0'에서「모든 숫자에 0을 곱하면 0이 된다」는 사실을 연산법칙에 의해서 밝혀낸 겁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모든 수는 ‘0’의 ‘인수(因數)’다」라는 말이 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 ‘0’은 제로(zero), 즉 ‘무(無)'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불법(佛法)’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현대과학에서도 ‘진공(眞空)'은 ‘무(無)’가 아니라 ‘만법(세상 모든 것)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만법’이 ‘진공(眞空)’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만법’이 곧바로 ‘진공’(색즉시공. 色卽是空)이고 동시에 ‘진공’이 곧바로 ‘만법’(공즉시색, 空卽是色)인 겁니다. 따라서 만법은 겉보기에는 각각의 모습이나 기능이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만법이 전부 다 ‘하나의 법’, 즉 ‘진공(眞空)’의 변현(變現)인 겁니다. 그렇다면 「모든 수는 ‘0’의 ‘인수(因數)’다」라는 말은 과연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의 뜻은 「모든 ‘수’는 바로 ‘진공(眞空)’의 표현이자 바로 진공(眞空)그 자체다」라는 말을 수학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양자역학에서는 이미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아인슈타인의 그 유명한 공식 E=m c² 에 대해서 현대과학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기서 E는 에너지(Energy), m은 질량(mass), c는 빛의 속도입니다. 즉 ‘질량’이 ‘에너지’로 바뀌는 것이 아니고, ‘질량’ 자체가 그대로 ‘에너지’이고, ‘에너지’ 자체가 그대로 ‘질량’이다 라는 말입니다. 양자역학의 세계는 ‘존재하는 것’과 ‘일어나는 일’이 둘이 아닌 세계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능소불이(能所不二)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즉 ‘작용하는 자(能)’와 ‘작용(能)’은 둘이 아니다 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주체(能)’와 ‘객체(所)’는 연기적(緣起的)인 관계를 이루면서 항상 서로 엇바뀌며 나타납니다.


이 경지에 이르면, ‘서로 엇바뀐다(互換)'는 말도 ‘존재(存在)의 진실(眞實)’을 잘 몰랐던 사람이 ‘존재(存在)의 진실(眞實)’에 눈을 뜨는 과정에서 고비가 되기는 합니다만, 역시 ‘무명(無明)’에서 깨어나기 위한 방편(方便)의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주체’ ‘객체’ 둘 다  ‘허공성(虛空性)’일 뿐이어서, 주체 객체 둘 다 스스로는 전혀 ‘작용’이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허공(虛空)’과 ‘허공(虛空)’이 서로 엇바뀌며 나타난다는 말은 군소리이며, 「‘작용의 주체’가 있어서 작용의 주체가 ‘작용’을 일으킨다」는 생각이 얼마나 허망한 생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같은 사실 때문에 성현들이 말씀하기를,「‘마음’에 주체와 객체가 없으면 즉, 분별(分別)이 없으면 곧장 ‘정각’(正覺)을 이룬다」고 했던 겁니다. 따라서 이 말, 마음에 분별이 없으면 곧장 정각(올바른 깨달음)을 이룬다 라는 말은 ‘마음 공부’의 요체가 된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결국 ‘진공(眞空)’과 ‘수’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같고, 같으면서 동시에 서로 다른 겁니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여기서 ‘수’는 바로 ‘만법(萬法, 이 세상 모든 존재)’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분신(分身)은 본래 ‘한 몸’을 여려 몸으로 나누었다는 뜻이고, ‘분수’(分數)는 수학에서의 분수가 아니고 본래 하나인 원수(元數)를 여러 가지의 수로 나누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 모든 것, 만법의 ‘근본’이 ‘하나’인 겁니다. 따라서 ‘같음’ 가운데 ‘다름’인 것이고,‘다름’ 가운데 ‘같음’인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동이법문(同異法門)입니다. 이 이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세상을 살면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이제 다시 위의 ③식으로 되돌아가 봅시다.「모든 수에 0을 곱하면 0이 된다」는 결과를 이끌어 내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된 건 다름 아닌, 바로 m=n이라는 간결한 수식이었습니다. 지금이야 「모든 수에 0을 곱하면 왜 0이 되는가?」 하고 물으면 도리어 그 물음이 이상하게 들릴 정도로 거의 상식화된 명제가 됐지만, 이 m=n 이라는 수식도 그저 연산법 상의 단순한 묘안 정도로 여겨지게끔 돼버렸어요. 그러나 저는 지금 m=n이라는 별 뜻도 없어 보이는 이 수식에 주목할 것을 권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 만법은 본래 ‘한 성품’이었던 겁니다. 고로 이 m=n의 진정한 뜻은 단순히 두 ‘수’가 같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 만법은 자체의 성품이 없어서 본래 ‘한 성품(一性)'이라는 뜻이며, 궁극적으로는 ‘평등’과 ‘불평등’까지도 전혀 동등하게 포함한 허공(虛空)과 같은 ‘본래의 마음자리’를 이와 같이 수식 m=n 으로 표현한 겁니다.


이것이  ‘진정한 평등(正等)'입니다. 그러므로 m=n 속에는 늘 m≠n이 포함되어 있고, m≠n 속에는 늘 m=n이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편한 말로는 ‘같음’ 속에 ‘다름’이요, ‘다름’ 속에 ‘같음’인 이치라는 말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같음’ 속에 ‘다름’이요, ‘다름’ 속에 ‘같음’인 이치라는 말의 뜻을 수학적으로 우격다짐 격으로 다음과 같이 표시할 수 있습니다. 즉 m≦n 이면서 동시에 m≧n 이다. 이 수식의 뜻은 ‘m’과 ‘n’이 같으면 즉, m=n 이 드러나면, ‘m’과 ‘n’의 다름 즉, m<n 혹은 m>n 이 숨어버리고, 또 반대로 m<n 혹은 m>n 이 드러나면 m=n 이 숨어버린다는 걸 m≦n 이면서 동시에 m≧n 이라는 수식으로 표시한 겁니다.


즉, ‘이(理, 본질)'이 드러나면 ‘사(事, 현상)'가 숨고, ‘사’가 드러나면 ‘이’가 숨는다는 말입니다. ‘숨고(隱, 은)  드러남(現)이 동시(同時)인 이치가 곧 m≦n 이면서 동시에 m≧n 인 겁니다. 그러므로  m≦n 이면서동시에  m≧n 이야말로 이사무애(理事無碍), 사사무애(事事無碍)를 수학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끝내 미완성인 채로 남겨 둘 수밖에 없었던 ‘통일장의 이론(統一場理論)'도 결국 알고 보면 ‘제3의 손’으로 ‘허공(虛空)’을 더듬는 것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과 같은 천재도 ‘통일장’의 현장에서 ‘자기 자신’과 나아가서는 자신의 연구행위마저도 결코 제외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내’가 곧 ‘우주’ 즉 ‘통일장’이고, ‘통일장’이 곧 ‘나’인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나’를 알 수 있겠습니까? 내 눈으로 어떻게 내 눈을 볼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깨달음(究竟覺)'이란 바로 ‘진정한 나(眞我)'를 깨치는 것인데, 그런데  ‘내’가 ‘나’를 알 수 없다면, 그렇다면 ‘진정한 깨달음’은 과연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말 그대로 ‘진정한 나(眞我)'라는 것이 있다면 무시무종으로 영원토록 변하고 옮기고 하는 일이 없어서 ‘진정한 나’일 터이니, 따라서 ‘진정한 나’를 깨달았을 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당연히 ‘진정한 나’를 ‘깨닫기 전’과 ‘깨달은 후’가 여여(如如)해서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정한 나를 깨닫는 것은 결코 ‘불각(不覺)'을 버리고 ‘정각(正覺)'을 얻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성현들이 말하기를, 「알 수 없는 그 자리에서 곧장 깨달아 들어가야 한다」고 했던 겁니다. 그렇다면,「만법이 몽땅 ‘한 성품(一性)’으로 돌아간다(萬法歸一)」는 사실은 또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러고 보면 m≦n 혹은 m≧n 이라는 수식도 결국 제 눈으로 제 눈을 관찰한 결과인 셈이군요. 그래서 성현들이 말하기를, 「만법은 ‘말’이나 ‘글’ 속에서가 아니라, 매 순간마다 ‘만법이 움직이는 모습(동용, 動容)' 속에서 알아봐야 한다」고 했던 겁니다. 어떤 ‘말’, 어떤 ‘글’인들 그렇지 않은 게 있겠어요? 그게 그저 내내 그런 겁니다.    · · ·     


어떤 중이 위산 선사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하니 『‘무심’(無心)이 ‘도’니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어째서 알아듣지 못하는가? ‘모른다는 것 그것(불회저,不會底)'이 

좋으니라.』『어떤 것이 ‘모르다는 것 그것’입니까?』『‘그대’가 바로 ‘그것’이요, 다른 사람이 아니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말하기를 『요새 사람들이 당장에 <모른다는 것 그것>을 알기만 하면 <그것>이 이 ‘부처’요 <그것>이 ‘마음’이건만, 만약 밖을 향해서 하나의 지식를 구하면서 그것을 ‘선’(禪)이나 ‘도’(道)라고 여긴다면 전혀 손을 써 볼 도리가 없도다. 이는 결코 똥을 퍼들이는 사람이라 할지언정, 똥을 퍼내는 사람이라 하지는 못하리니, 그대의 ‘마음 밭(心田)'을 더럽히기 때문에 이는 ‘도’가 아니니라.』라고 했던 겁니다.


- 현정선원, 대우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