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佛眼, 부처의 안목)이 열리다 / 월호스님
늘 궁금하기 짝이 없는 대목이 있었다. 붓다의 안목(佛眼)은 도대체 어떤 안목일까? 최근 『유마경』을
번역하면서 불안(佛眼)에 대한 답을 찾게 되었다. 붓다의 안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유마경』은 삼세제불의 최상의 깨달음을 설한 경전이며, 붓다의 깨달음도 이 유마경으로부터 생긴다고
말하고 있다.
『금강경』에서는 오안(五眼), 즉 다섯 가지 안목(眼目)을 설하고 있다. 첫째 안목이 육안(肉眼), 둘째
안목이 천안(天眼), 셋째 안목이 혜안(慧眼), 넷째 안목이 법안(法眼), 다섯째 안목이 불안(佛眼)이다.
육안은 육신의 눈이고, 천안은 천상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다. 혜안은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안목이고,
법안은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안목이다. 그렇다면 불안, 즉 붓다의 안목은 어떤 안목일까?
불안은 색즉시색(色卽是色)의 안목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해탈의 모습이다.
꽃은 분별하지 않건만, 사람이 스스로 꽃을 분별해서 그 분별에 묶일 뿐이다. 유마거사의 침묵도 이에
다름 아니다. 심지어 말이나 문자도 해탈의 모습이요, 탐· 진· 치의 성품도 곧 해탈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얻을 것도 없고 깨칠 것도 없다. 이 얻을 바 없음을 얻는 것이 진정한 얻음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존재는 실체가 없는 아바타이기 때문이다.
이 몸은 아바타요, 붓다의 몸은 법신(法身이다. 생(生)과 사(死)라는 분별심이 있으면 병(病)이 있지만,
진리ㅐ의 몸인 법신(法身)은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거불래(不去不來)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병
또한 아바타의 병으로 관찰하면서, 자기의 병으로 남의 병을 가엾이 여겨야 한다. 이러한 법을 설하는
것이 진정한 자애다. 그러므로 방편(方便)이 없는 지혜(智慧)는 속박이요, 방편(方便)이 있는 지혜(智慧)
가 해탈이다. 지혜가 없는 방편은 속박이요, 지혜가 있는 방편이 해탈이다.
일체중생이곧 법신(法身), 아바타가 곧 깨달음(보리)이다. 곧은 마음이 도량이요, 삼계가 도량이다.
오욕락(식욕, 색욕, 재물욕, 명예욕, 장수욕) 대신 법락(法樂)을 즐기며, 무진등(無盡燈)을 밝혀라.
밥 공양 보다 법 공양의 모임을 가져라. 평등심으로 걸인에게 보시하면 여래복전과 동등하다. 중생계가
보살의 불국토이다. 끼리끼리 모이기 때문이다.
번뇌의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지혜의 보배를 얻을 수 없다. 일체 번뇌가 여래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일체의 마군과 외도들이 나의 시자다. 뭇 마군들은 생사를 즐기고 보살은 생사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며,
외도들은 모든 견해를 즐기고 보살은 견해에 있어서 동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살을 핍박하는 이는
불가사의 해탈보살이다. 당나귀는 코끼리를 차거나 밟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보리심을 발하고 대승(大乘)을 즐기더라도, 이 유마경을 듣지 못하면 큰 이익을 잃게 되리라. 이 유마경
을 수지 독송하고 남을 위해 설하는 이는 미륵보살의 위신력과 신통력을 이미 받고 있는 것이다.
불기 2564년(단기 4353년) 쾌청한 봄날, 행불사문 월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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