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엔 생겨난 것도 없고 사라진 것도 없다 - - 몽지와 릴라
눈앞에 펼쳐진 책의 글자를 보고 있다. 까만 글자들이 눈으로 들어오고 그 문자를 읽으면서 뜻도 알아진다. 눈은 글자를 따라가고, 글자는 의미를 드러내고, 의미를 따라 생각이 일어난다. 생각이 일어나는 이 경험을 그대로 보면 마치 허공에 구름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 같고 바람이 불어왔다 사라지는 것 같다. 계속해서 글자는 읽히고, 뜻은 알아지고, 생각은 얼개를 이루며 일어나 올라온다. 그러나 그런 경험들은 머물러 있지도 않을 뿐더러 붙잡을 수도 없다.
글자를 보는 나 자신도 찰나지간도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 그 변화가 미처 내 눈에 감지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도 쉬지 않고 순간 순간 변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어제의 내 눈과 오늘의 내눈은 같지 않다. 그러므로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는 나를 나라고 할 수 없다. 모든 것은 모든 것의 인연(因緣)과 질서(秩序)에 따라 변하고 나타나고 사라진다.
내가 어떤 대상을 붙잡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은 대상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붙잡고 있다는 생각이 방금 일어나 그 생각에 내가 갇혔을 뿐이다. 철저히 보면 볼수록 모든 것은 머물러 있지 않고 잡을 수도 없다.
마음공부가 진전된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뚜렷이 보게 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막연히 생각에 사로잡혀 세상을 보았다. 시간도 존재하고 공간도 존재하며 자기가 경험하는 일들이 머물러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세상을 뚜렷이 보면 볼수록 시간도 공간도 경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니 저절로 뚜렷이 보이며 저절로 뚜렷이 알게 된다.
이미 기존의 존재하는 세계속의 존재하는 나로 살았던 것이, 점점 기존의 존재하는 세계라는 견고함이 사라지고 나의 존재감도 사라진다. 세상과나를 보는 관점이 뒤집히고 대상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다. 점점 생각의 사슬에서 풀려나면서 생각, 느낌, 감각, 욕망 욕구 충동 의지 의도, 인식 분별심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뚜렷이 보게 되어 해방감을 느끼고 무거운 삶의 짐이 저절로 가벼워진다.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은 생각과 감정에 사로잡혀 실체가 없는 세상을 실재라고 착각한 세상이었다. 이 세상은 지금 이 순간 마음에서 일어난 생각과 감정과 감각을 얼기설기 얽어매어 조작(造作)한 꿈 같은 허깨비 같은 물거품 같은 실체가 없는 세상이다.
마음에 밝아질수록 있는 그대로의 세상은 무게가 사라지고, 무언가에 얽매여 살아온듯한 나 자신도 구속에서 풀려나 자유로워진다. 나라고 여겼던 나도 마음의 표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본래 마음인 진정한 나, 진짜 나, 진짜 주인은 분리(分離)되지 않은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의 진실(眞實)은 내가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고 내 머리에서 글자의 뜻이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글자가 읽히고 뜻이 떠오르고 의미의 얼개를 짓는 일이 마치 바람이 부는 것처럼, 구름이 흘러가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느낌 감정, 생각 이미지, 욕망 욕구 충동 의지 의도, 알음알이 지식 인식 분별심이 구름처럼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진실로 생겨난 것도 없고 사라진 것도 없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소리없는 아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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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들아, 지혜로 살펴 비추어 보아 안과 밖이 뚜렷하면 스스로 본래 마음을 알게 된다. 본래 마음을 알면 곧 본래 해탈이고, 해탈을 얻으면 곧 반야삼매이며, 무념(無念)이다.
-육조혜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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