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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法) :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 ①

장백산-1 2021. 4. 5. 19:32

법(法) :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 ①

  

실체론적(實體論的) 사유 방식을 연기론적(緣起論的) 사유 방식으로 전환(轉換)

 

불교 교리 공부 이전에 부처님 가르침의 성격과 특징 이해하는 게 우선

불교는 개념적인 사고의 산물이 아냐…경험에 의한 직접적인 고찰에 의한 산물

바깥 세계를 보는 사람들의 지각작용과 인지작용이 오온 · 십이처 · 십팔계 

 

 

그간 연재한 부처님 출현의 문명사적 의미를 중심으로 삼보(三寶 : 불, 법, 승)의 첫 번째인 불(佛)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연재부터는 삼보의 두 번째인 법(法)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불교는 ‘가르침’을 중심(中心)에 놓고 있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철학적 종교 혹은 이법(理法)의 종교라고도 합니다. 그리스도교와 같은 계시(啓示)의 종교가 ‘믿음’을 신앙의 핵심으로 한다면 불교는 ‘가르침’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을 중요시 합니다. 

 

불교에 입문한다는 것은 곧 삼법인, 연기법, 사성제 등 불교의 기본교리를 공부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간 불교를 공부하고 또 가르쳐 온 제 경험으로 볼 때 불교교리를 공부하기 이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펴셨던 ‘가르침’의 성격과 특징들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우선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바탕위에서 불교를 바라볼 때 불교의 기본교리에 대한 이해가 보다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한편 한국불교인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불교 경전과 불교 교리에 대한 지적(知的) 이해(理解)를 ‘알음알이’라는 말로 경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지적 이해는 일상적 신행에서만이 아니라 깨달음을 위한 필요조건(必要條件)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연재를 시작하면서 지식불교의 폐해를 말씀드렸던 것은 불교 교리에 대한 지적 이해가 생활 속 실천(實踐)으로 이어지지 않고 지적만족으로 끝나버리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흔히 ‘온화한 급진주의’라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친절하게 가르침을 폈기 때문에 ‘온화’라고 하지만 그 가르침의 내용은 당시 사회의 통념적 사고를 완전히 전복(顚覆)하는 혁명적(革命的) 전환(轉換)이었기 때문에 ‘급진(急進)’이라고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χ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형태를 “무엇을 χ라 하는가”라는 질문 형태로 전환하셨습니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은 단순히 주어와 술어를 뒤바꾼 것이 아니라 존재(存在)와 사물(事物)에 대한 사람들의 사고를 그 근원에서부터 흔들어 버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실체론적(實體論的) 사유에서 연기론적(緣起論的) 사유로의 대전환(大轉換)이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실체론적(實體論的)인 사유 방식에 매우 익숙합니다. 이를테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등의 질문들은 사물(事物)과 존재(存在)의 본질(本質)을 전제(前提)하는 실체론적(實體論的) 사고로부터 출발하는 질문들입니다. 동서고금의 많은 인문교양서들이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등의 이런 질문에 답을 내놓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모두를 만족 시킬 답은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실체론적(實體論的) 사유에서 나오는 질문들은 사실은 대답이 불가능한 질문들입니다. 모든 경우를 다 포괄할 수 있는 ‘인간’ 혹은 ‘사랑’에 대한 보편적(普遍的) 답을 찾는 것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모든 경우를 다 함축할 수 있는 본질(本質)을 찾는 것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이런 실체론적(實體論的) 질문을 연기론적(緣起論的)인 질문으로 전환(轉換) 하셨습니다. ‘무엇을 인간이라고 하느냐.’ '무엇을 사랑이라고 하느냐' 이러한 질문은 맥락에 따라 다양한 답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답들은 각기 맥락적 의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유익(有益)함의 여부입니다.

 

실체론적(實體論的) 사고를 연기론적(緣起論的) 사고로 전환한 대표적 예가 바로 오온설(五蘊說)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온설은 ‘나란 무엇인가’라는 실체론적(實體論的) 사고를 거부하고 ‘무엇을 나라고 하는가’라는 연기론적(緣起論的) 사유로부터 나오는 질문입니다. 또한 오온설(五蘊說)은 ‘나’에 대한 분석의 결과가 아니라 ‘나라고 하는 경험’을 고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의 두 번째 특징이 바로 경험을 직접 사유하는 데 있습니다.

 

서양 고대철학을 비롯해서 근현대 철학에서 주된 작업방식은 존재(存在)와 사물(事物)에 대한 추상화(抽象化)입니다. 서양철학에서 흔히 사용되는 용어인 ‘본질(本質)’ ‘자아(自我)’ ‘실체(實體)’ ‘속성(屬性)’ ‘주관(主觀)’ ‘객관(客觀)’ ‘존재(存在)’ 등의 용어는 사물(事物)과 존재(存在)에 대한 추상적(抽象的) 사유의 결과물(結果物)로서 우리가 보통 개념(槪念)이라고 부르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실체론적(實體論的) 사고 방식의 철학이 잘못됐다든가 틀렸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론적(實體論的) 사고로 작업하는 서양철학의 존재(存在)와 사물(事物)에 대한 추상화(抽象化)의 결과물인  ‘본질(本質)’ ‘자아(自我)’ ‘실체(實體)’ ‘속성(屬性)’ ‘주관(主觀)’ ‘객관(客觀)’ ‘존재(存在)’ 등의 용어, 즉 개념(槪念)은 불교에서 사용하는 같은 글자의 용어들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입니다. 

 

흔히 서양철학자들이 무아설(無我說)을 비판하면서 자아(自我)가 없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지만 불교에서 부정(否定)하는 아(我)가 서양철학에서의 자아(自我)와 동일한 개념(槪念)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와 서양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 각각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아(自我)의 중요성을 전제하고 있는 서양철학 사상에 대해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도 곤란하다는 말씀입니다. 무아(無我) 오온설(五蘊設)에 관해서는 다음 연재에서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한편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이 개념적(槪念的) 사고의 산물이 아니라 경험에 대한 직접 고찰(考察)에 의한 결과물이라는 점과 직결된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자주 등장하는 ‘일체(一切)’ 에 대한 이해입니다. 흔히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세계(世界)’라는 개념(槪念)과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一切)’를 동의어(同義語) 처럼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세계(世界)’라는 개념(槪念)과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一切)’라는 개념 두 용어는 다소 의미의 중첩은 있겠지만 각자의 체계 내에서 지시하는 바는 결코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세계(世界)란, 마르쿠스 가브리엘(Markus Gabriel, 1980~)의 표현에 따르면 “세계(世界)란 우리가 없이도 존재하는 어떤 것, 혹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세계(世界)’를 뜻하는 일체(一切) 혹은 만법(萬法)이 의미하는 것은 내가 직접 경험한  나의 경험(經驗) 세계(世界)를 말합니다. ‘중생의 수만큼 세계(世界)가 존재한다’고 하는 말이 바로 나의 경험(經驗) 세계(世界) 그 의미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존재(存在), 그리고 세계(世界)란 곧 경험(經驗)하는 세계(世界)를 의미합니다. 불교의 이같은 경험론적(經驗論的) 세계관(世界觀) 결코 관념론적(觀念論的) 세계관(世界觀)이 아닙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있어 ‘경험(經驗)’이란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관념적(觀念的) 활동(活動)이 아니라 바깥 세계와의 교류(交流)의 결과물입니다. 지각과 인지를 통해 바깥 세계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과 함께 사람들은 매번 새롭게 창조됩니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 라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이러한 바깥 세계와 사람들의 지각 작용과 인지 작용의 상호작용에 대한 가르침들입니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 라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리차드 곰브리치(Richard Gombrich)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오늘날 우리가 인지심리학(認知心理學)이라 부르는 그러한 작업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580호 / 2021년 4월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