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의 참!] '양심에 뿌린 씨앗'과 '욕망의 씨앗'
이봉수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 원장 입력 2022.03.22. 03:02[경향신문]
1973년 9월11일 칠레 수도 산티아고, 화창한 아침인데 국영 라디오가 난데없이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방송을 반복한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피노체트의 쿠데타 개시를 알리는 군부의 암호였다. 라틴 아메리카 최초로 민주적 선거를 통해 집권한 아옌데 대통령은 미국 기업이 독과점한 구리광산의 국유화를 추진하는 등 칠레 경제의 자립을 추구했다. 쿠데타군은 대통령궁을 폭격한다. 폭격 직전 아옌데는 남아 있던 라디오방송을 통해 죽음과 칠레의 미래를 예고한다.
장기지속 구조로 기득권층 재집권
이봉수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 원장
“제가 칠레인의 양심에 뿌린 씨앗이 영원히 시들어버리지는 않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그들은 무력이 있고 우리를 지배할 수 있겠지만 사회변혁은 범죄로도, 무력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고, 국민이 역사를 만듭니다.”
그는 소총으로 맞서다가 끝내 죽음을 택한다. 피노체트가 집권한 17년간 4000여명이 납치·살해·실종됐고 2만8000여명이 고문당했다. 1986년 산티아고를 방문한 적이 있다. 마침 비가 내리는 도시는 음산했고 대통령궁 주변에는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칠레의 독재체제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한국도 다를 바 없는 암담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봄이 되면 얼음이 꺼지듯, 철옹성 같던 독재체제도 균열이 생겨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진다. 남한에서는 이듬해 6월항쟁으로 독재가 무너지고, 칠레에서도 1990년 봄 피노체트가 권좌에서 쫓겨난다.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 이틀 뒤인 지난 11일 칠레에서는 가브리엘 보리치 대통령이 취임했다. ‘1990년 민주화 이래 칠레에서 가장 왼쪽에 서 있는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는 그는 “신자유주의 천국이던 칠레를 신자유주의 무덤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36세인 보리치는 아옌데의 외손녀를 국방장관에 임명했다. 아옌데의 최후 연설처럼 국민이 역사를 만들어 아옌데를 다시 부른 것이다.
여기서 떠오르는 이가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이다. 그는 기존 역사학에 반대하여 개인 대신 집단, 연대(年代) 대신 구조(構造), 정치 대신 사회를 탐구했다. 인간 삶의 조건을 결정짓는 구조는 지중해와 같은 지리적 여건이나 벼·밀·옥수수로 나눠지는 대륙별 주식 작물 등 훨씬 장기지속되는 요인들이지만, 기득권 카르텔의 승리로 끝난 한국의 대선 평가에도 유사한 분석틀을 활용해보고 싶다.
윤석열 반면교사로 새 변혁 가능성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의 ‘20년집권론’은 당원의 분발을 촉구하는 발언이었지만, 강고한 기득권 카르텔의 실체를 가벼이 여긴 단견이었다. 기득권 카르텔은 노론이 장기집권에 들어간 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뿌리가 깊다. 그들의 권세는 일제강점기로 이어져 일본 귀족작위를 받은 76명 중 57명이 노론 계열이었다는 책도 나왔다. 친일파는 해방 후에도 정계, 언론계, 학계, 법조계, 군대와 경찰의 핵심요직들을 차지했다.
국민의힘은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정당이지만 민주당도 일부는 기득권층 엘리트 카르텔에 편입돼 진보정당으로 부르기도 민망한 상태다. 이번 대선에서 서울은 거주하는 아파트의 값과 윤석열 후보 득표율이 정비례했는데, 몰표를 준 이들의 표심에는 ‘욕망의 씨앗’이 들어 있다고 본다.
장기지속되는 구조를 우리 정치현실에 원용해 보면 반복되는 기득권층의 재집권이 설명된다. 민중의 개혁의지가 체제나 제도 변화로 안착하지 못하고 외세나 기득권 세력에 압도당해온 것이다. 동학혁명 이후 청·일 지배, 4·19혁명 이후 5·16 쿠데타,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전두환 집권, 1987년 6월항쟁 이후 노태우 집권, 촛불혁명 5년 만의 윤석열 집권은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장기지속 구조는 이처럼 억압의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사회가 큰 충격을 받고 일탈했을 때 정상 궤도로 복귀하는 동력도 된다는 점은 희망적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좌절된 혁명들도 장기지속 구조를 형성해 새로운 변혁의 불씨로 되살아나곤 한다.
한국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윤석열 당선인이 국정운영을 잘할 것’이라는 기대치는 39%밖에 안 된다. 정책은 실종되고 정치와 언론이 부추긴 증오와 혐오가 집단지성이 아니라 ‘집단오류’에 가까운 투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5년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이 또한 정치교육의 반면교사가 된다면 정상복귀의 동력은 계속 축적될 것이다. 역사는 비틀거리면서도 진보한다고 믿고 싶다.
이봉수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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