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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사람 오길 기다린 산속 도인 아닌 사람을 직접 찾아간 교사”

장백산-1 2022. 3. 27. 00:38

“부처님은 사람 오길 기다린 산속 도인 아닌 사람을 직접 찾아간 교사”

인간 삶 가르침 편 불교휴머니즘 회복이 이 시대 불교계 역할
자신의 길흉화복은 제사가 결정하는 것 아니라 내 행위가 결정
전통에서 온 고정관념 벗어나서 성성적적하게 불교 바라봐야



조성택 교수는 “관습에서 벗어나 불교의 특징을 올바로 이해하고 행하는 것이 탈종교시대 불교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주제는 ‘탈종교 시대의 불교 역할’입니다. 많은 분들이 지금 탈종교라는 변화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비단 불교계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에서도 교회에 나가지 않는 교인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소위 가나안이라는 신자들. 가나안이라는 표현은 ‘안나가'를 거꾸로 뒤집은 말입니다. 불교도 일종의 노령화 현상. 그리고 젊은이들이 더 이상 불교계에 유입되지 않는 것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보면 탈종교의 근본적인 문제는 불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동안 불교가 종교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이제야 말로 불교가 제대로 할 역할이 생기고 있다, 저는 오늘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들께 ‘탈종교 시대의 불교 역할’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전 세계 종교인구 중 기독교인이 30%이상입니다. 반면 불교는 겨우 7%입니다. 무슬림이 30%, 힌두교가 15%로 추정됩니다. 사실상 “불교가 어떻게 그렇게밖에 안돼?”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문명사회에서 종교가 해야할 역할을 얘기할 때 항상 불교가 기독교와 함께 소개됩니다. 실질적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종교가 인간에게 주는 이로움을 얘기할 때도 불교가 빠지지 않습니다. 이 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전 세계 종교인구 중 기독교와 무슬림을 합치면 60%가 됩니다. 인류의 과반 이상이 이제 유일신 신앙에 대해 회의를 갖고 바깥으로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탈종교 현상입니다. 하지만 탈종교의 ‘탈’에만 관심을 가져선 안됩니다. 탈, 나간다면 반드시 향하는 곳이 있습니다. ‘출’ 나가면, ‘입’ 들어오는 곳이 있듯이요. 아무 목적도 없이 집을 나간다면 가출이지만, 삶의 방향성이 정해져서 나간다면 출가가 됩니다. 그렇다면 종교를 떠났다는 사람들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요?

 

며칠 전입니다. 3월18일 유엔 산하 자문기구에 속한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에서 ‘2022 세계 행복보고서(2022 World Happiness Report)’가 발간됐습니다. 여기서 행복순위 1·2·3위 나라는 어디였을까요. 참고로 우리나라 행복지수는 세계 146개국 중 59위였습니다. 자, 기대했던 대로 1~3위는 바로 핀란드 · 덴마크 · 아이슬란드였습니다. 북유럽 국가들이에요.

 

근데 핀란드 덴마크 아이슬란드 이 사회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이를 조사한 학자가 있습니다. 미국 종교사회학자 필 주커만(Zuckerman, Phil) 교수입니다. 그는 북유럽의 공통점이 ‘신이 없는 사회(Society Without God)’라고 분석했습니다. 신을 믿지 않지만 오히려 강력 범죄율도 낮고 사람들 행복지수가 높다는 것이죠. 종교성 없이도 충분히 도덕 · 윤리 · 경제적으로 문제가 없고 풍요롭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종교성이 충만한 미국 사회보다도요. 이 분석은 기독교를 중심으로한 유일신 종교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존 쉘비 스퐁(John Shelby Spong) 신부의 분석처럼 미국에서 가장 큰 동창회는 ‘교회 졸업 동창회’입니다. 부모를 따라 고등학생까지는 교회를 다닙니다. 하지만 이들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교회도 졸업해버립니다. 이 비율이 69~74%에 달합니다. 물론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무종교인이라고 답한 사람이 2015년 56%였고, 2021년 60%였습니다. 특히 젊은층의 무종교인 비율은 69%였습니다. 이는 4~5년 뒤 한국 인구의 69%가 종교인이 아니란 것이죠.

 

미국인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전부 세속적인 욕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교회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마음 · 수행 · 도덕에 관심이 있습니다. 동시에 불교가 자신들의 정신 향상에 해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에서 영적 생활은 매우 중요하게 여기지만 종교적 형식이나 관습에는 얽매이지 않겠다는 것이죠. 이같은 사람들을 두고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다는 의미의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일상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겠다. 불교를 삶의 원칙으로 삼겠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미래지향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더이상 기복적 ·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세상일에 관여하고 벌과 상을 주는 초자연적인 존재에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탈종교라는 시대적 현상은 불교가 세상에 대해 해야할 기여가 다가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종교 카테고리에서 우리 스스로 불교를 끄집어 내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탈종교 시대의 불교 역할은 무엇일까요. 해답을 찾기 위해 불교 바깥에서 불교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휴머니즘'입니다. 부처님은 우리 삶의 문제를 더이상 신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을 위한 인간 삶의 가르침을 펴셨다는 것이에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부처님 당시 인도 주류 종교는 바라문교였습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신에게 길흉화복을 부탁하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신에 대한 제사를, 스스로 행하는 수행의 문제로 바꿔놨습니다. 또 당시 인도 바라문교의 사문들은 어떤 실질적 행위를 굉장히 중요시했지만, 부처님은 행위 근본에 있는 의도를 수행의 문제로 삼았습니다. 바로 의업(意業)입니다.

 

윤회(輪廻)에 대한 개념도 바라문교와 부처님이 달랐습니다. 윤회는 부처님이 처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인도의 종교문화가 받들고 있던 세계관이었습니다. 당시 인도사회의 윤회는 일종의 자연의 섭리로 이해됐습니다. 윤회를 벗어나는 것도 특정한 그룹의 특별한 수행을 통해서만이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윤회를 마음의 동학(動學·Dynamics) 문제로 전환시켰습니다. 십이연기(무명 · 행 · 식 · 명색 ·육입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를 보십시요. 윤회를 마음 문제로 돌렸습니다. 윤회가 자연의 위치에 있다면 내가 윤회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윤회가 나의 마음 문제로 전환되는 순간 윤회는 통제 가능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부처님 탄생게로 잘 알려진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는 어떻습니까. 저는 이 말씀이 부처님이 인본주의를 선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하늘 위, 하늘 아래는 모두 신들의 세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처님은 “하늘 위와 하늘 아래 나홀로 존귀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나의 길흉화복은 제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위가 결정한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하늘의 그물과 인간의 그물을 모든 그물을 벗어났다. 비구들아! 그대들도 천신과 인간의 그물을 벗어났다”는 전도선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교사로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 당시 우파니샤드(Upaniṣad)는 브라마니즘에서 철학적 사유가 더 깊어진 것이었습니다. 우파니샤드의 뜻이 무엇입니까. ‘가까이’를 뜻하는 우파(upa-), ‘아래에서’를 뜻하는 니(ni-), ‘앉다’를 뜻하는 샤드(ṣad)입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가까이 앉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들 우파니샤드들은 공개적으로 가르침을 펴지 않고, 귀에 소곤소곤 얘기했습니다. 진리는 비밀리에 전수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파니샤드 현인들 모습은 상당히 도인적입니다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은 도인(道人)이 아니라 교사(敎師)였습니다. 교사의 역할은 스스로 모범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분입니다. 부처님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가르쳤다는 것을 자칫 오해하면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의 능력대로 얘기했다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친절하게 가르쳤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이 부분을 강조한 것은 오늘날 불교 모습을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큰스님들도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셔야 합니다. 신비나 전설에 싸여있으면 안됩니다. 부처님은 친절한 교사였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됩니다.

 

부처님이 도인이 아닌 교사였던 또 하나의 이유는 직접 제자들을 찾아간 것입니다. 당신과 마지막까지 선정 · 고행 수행을 했던 이들을 찾아갔습니다. 이들에게 한 가지만 더 얘기를 해준다면 이들은 깨칠 수 있다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일종의 전략적 선택입니다. 보드가야에서 바라나시까지의 거리는 200㎞ 정도 됩니다. 이를 걸어가려면 하루에 20㎞를 걸어도 열흘 이상 걸립니다. 도로도 없던 그 험한 길을 찾아가 당신의 깨들음을 나누신 것입니다. 이것이 교사입니다. 산속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길 기다리는 그런 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는 “나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니…”라고 말했지만, 부처님은 자신과 똑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공유했습니다. ‘불자를 양성해라’ ‘연기법을 가르쳐라’가 아니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의 안녕과 행복이 목적이었습니다. 전 세계에 이런 종교가 어디있습니까. 제가 아는 한 이런 면에서는 인류역사상 불교가 최초입니다.

 

세 번째 특징은 언어의 소통성을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류문명사적 관점에서 보면 대단한 사건입니다. 왜 대단했을까요. 지금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라틴어입니다. 라틴어 성경이 독일어로 번역되기 까지는 1,500여년이 걸렸습니다. 어떻게 감히 ‘Vulgar language’로 성경을 번역할 수 있느냐고 생각했습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을 때 신하들이 얼마나 반대를 했습니까. 성인의 말씀을 어떻게 속어같은 한글로 쓸 수 있겠느냐고 따져 물은 것이죠.

 

하지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당시 인도사회에서 산스크리트어는 라틴어 이상으로 발달된 언어였습니다. 인도에서 중요한 베다는 산스크리트로 돼 있고 배운 사람들도 산스크리트로 얘기했죠. 제자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산스크리트로 바꿔야 권위를 얻을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부처님은 거절했습니다. 그곳에 가서 그 사람들이 쓰는 지방언어로 법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언어가 가진 권위를 부정하고, 언어(言語)의 본질(本質)인 소통(疏通)을 강조하셨습니다. 언어의 사회적 · 역사적 권위를 스스로 포기하고 소통(疏通)을 강조한 사례도 부처님이 처음입니다. 한국에서는 최근까지 큰스님들이 중요한 법문이나 오도송은 한자로 내야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이 강조하신 소통(疏通)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에서 오는 고정된 관념을 이제는 과감하게 벗어나야 합니다. 서양인들이 제게 “what is buddhism?”이라고 물으면 저는 한 사람의 깨달음이 모든 이에게 확장된 것이라고 답합니다. 그러면 서양인들은 깜짝 놀랍니다. 부처님의 사랑이 전 인류에게 뻗쳤다고 해도 감동받을 일인데, 한 사람의 깨달음이 모든 생명에게 확장됐다는 것이잖아요. 이것은 불자라면 무한히 자랑하고 실천해도 좋은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생명의 행복과 안녕입니다. 때문에 이제는 전통에서 온 여러 고정관념 · 선입견을 벗어나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적적성성(寂寂惺惺)하게 불교를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가 2022년 3월 20일 서울 전국비구니회관 법룡사에서 일요특강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정리=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626호 / 2022년 3월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