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유무에 집착함이 없이 지금 여기에 어우러진 모습 그대로 보는 것이 중도(中道)

장백산-1 2022. 3. 26. 22:55

인제 백담사 무금선원 유나 영진 스님

유무에 집착함이 없이 지금 여기에 어우러진 모습 그대로 보는 것이 중도(中道)

화엄경은 이 세상 모든 법을 통섭해서 한마음 밝힌 가르침
법문 듣고 기도 ‧참선하며 지혜의 눈을 떠 복 주는 주체 돼야
있는 그대로 간단 명료한 것이 선이며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

 

영진 스님은 “부처님 정각의 경계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 화엄경”이라며 본뜻을 이어받아 수행하고 기도할 것을 당부했다.

 

 

저는 선원에서 화두를 가지고 정진하는 사람의 입장이며 교학자는 아닙니다. 그래서 ‘화엄경’을 주제로 법문한다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 오늘은 ‘화엄경’의 전체 모습을 말씀드리고, ‘화엄경’이 어떤 사상(思想)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화엄경’의 본뜻을 이어받아서 수행하고 정진하고 기도할 것인가, 이런 측면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한국에서 주로 유통되는 ‘대방광불화엄경’은 39품 80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품마다 부처님을 증명으로 수많은 보살님이 법문하시고 묻고 이런 식으로 전개됩니다. 소설에 비유한다면 대하(大河) 장편소설(長篇小說)처럼 멋지게 짜여 있는 경전이 바로 ‘화엄경’입니다. 

 

‘화엄경’의 큰 뜻은 ‘통만법 명일심(通萬法 明一心)’, 일체 모든 법을 통섭해서 한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성도하시고 마음자리(한마음)를 보셨습니다. 부처님의 안목으로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은 도(道, 마음자리, 한마음) 아닌 게 없습니다. 깨닫지 못한 안목으로 보면 길고 짧고, 좋고 싫고, 탄생과 죽음, 오고 감, 너와 나, 선과 악, 부유함 가난함, 높고 낮음, 음과 양, 모이고 흩어짐, 시작과 끝, 이런 감정이 들어가지만, 깨달은 자의 안목으로 보면 이 세상 일체 모든 것이 도(道, 마음자리, 한마음, 부처)입니다. 

 

불교는 이 세상은 큰 바다와 같다고 표현합니다. 바다는 어떤 존재입니까? ‘화엄경’에서 바다는 10가지 아주 훌륭한 기능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중에 몇 가지만 말씀드리면 바다는 시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다 속에서 사고가 나서 죽은 시체가 있어도 파도가 육지 밖으로 언젠가는 밀어냅니다. 또 하나의 위대한 점은 바다는 배척하지 않습니다. 금정산에 흐르는 맑은 물, 또 우리가 살면서 배출하는 오‧폐수 모두 바다가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 있습니다.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로 모이면 바다는 그 많은 것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지만 딱 한 가지로 통일시킵니다. 그것이 짠맛입니다. 만법을 다 통섭해서 일심을 밝힌다는 것이 ‘화엄경’의 대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불법을 바다에 비유한 것입니다.

 

‘대방광불화엄경’은 부처님 정각의 경계를 그대로 표현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또 아주 서사적이고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부처님의 안목으로 보면 이 세상은 중중무진(重重無盡) 법계연기(法界緣起)의 세계입니다. 예불할 때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시방삼세(十方三世) 제망찰해(諸網刹海)를 염송합니다. 시방삼세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모든 시간과 공간을 말합니다. 제망찰해는 제석천에 있는 그물, 인드라망입니다. 제석천의 그물이 아주 가느다랗고 정교하게 엮여 있는데 그 그물코마다 구슬이 하나씩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물토마다 달려있는 구슬에 빛이 비치면 어떻게 될까요? 이 구슬이 저곳을 비추고 저 구슬이 이곳을 비추고 해서 중중무진의 세계가 벌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 빛은 서로 방해하지도 않습니다. 서로 돕습니다. 이것이 법계연기의 세계입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연기(法界緣起)의 세계를 표현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판소리 심청가입니다. 심청가는 불교의 화엄 사상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심청가의 하이라이트는 심봉사가 눈을 뜨는 장면입니다. 

 

심청이가 인당수에 떨어졌는데 아름다운 연꽃에 받혀져서 살아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임금님이 심청이를 왕비로 삼습니다. 그리고 심청이의 아버지를 찾기 위해 전국에 있는 맹인을 대상으로 잔치를 벌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를 찾은 심청이는 “아버지, 저 딸 청이요”라고 합니다. 심봉사는 꿈에 그리던 딸의 목소리가 들리니까 “어디 보자. 내 딸 청이야.” 이러면서 눈을 꿈벅이다가 번쩍 눈을 뜹니다. 눈을 뜨니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그 자리에 있는 모든 맹인이 다 눈을 뜹니다. 이것이 ‘화엄경’의 중중무진 제망찰해 법계연기 사상입니다. 여기서 봉사가 눈을 뜨고, 저기서 봉사가 눈을 뜨는, 그야말로 광명의 세상이 펼처지는 것입니다. 

 

광명의 세상이 펼처지는 것을 설명하자면 모든 사람들이 육신의 눈을 떴다고 해도 되고, 지혜의 눈을 떴다고 해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지식을 모셔서 법문을 듣고 또 법당에서 기도하고 참선하고 온갖 선을 다 받들어 행하는 것은 결국은 지혜의 눈을 뜨기 위해서입니다. 언제까지 다른 이에게 복을 달라고 애걸할 것입니까? 내가 나에게 복을 주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제시한 것이 불교입니다. 이 세상에는 부처 아닌 게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평등(平等)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데 왜 스스로 낮추고 중생놀음을 하느냐, 이 말입니다.

 

지금부터는 의상 스님에 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범어사를 창건하신 분이 의상대사입니다. 이분은 신라 중기 때 원효대사와 함께 정진하셨습니다. 원효 스님 이야기는 잘 아실 겁니다. 의상 스님은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당나라의 화엄의 이조(二祖)인 지엄 스님 문하로 들어갑니다. 그때가 661년, 의상대사의 나이 37세 때입니다. 그리고 10년간 지엄 스님께 ‘화엄경’을 배웁니다. 지엄 스님께서 보니까 신라에서 온 사람이 어느 중국 사람보다 뛰어납니다. 어느 날 당신 방에 의상 스님을 불러서 “그동안 수고했네. 이제 자네가 지금까지 공부한 ‘화엄경’을 요약해서 가지고 와라.” 의상 스님은 “알겠습니다.” 하고는 몇 날 며칠을 줄여서 10권으로 만들어갑니다. 그것이 ‘대승장(大乘藏)’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엄 스님은 “이것도 많다. 다시 줄여 와라.” 그래서 210자로 줄여 갑니다. 그것이 의상 대사 ‘법성게(法性偈)’입니다. 

 

‘화엄경’을 10조9만5048자라고 합니다. 방대한 그 ‘화엄경’을 10권으로 줄이고 또 줄여서 ‘법성게(法性偈)’로 축약하였습니다. 이 ‘법성게(法性偈)’를 만(卍)자 모양으로 배대하면 시작과 끝이 똑같습니다. 의상 스님은 더 자신감이 생겨서 다시 여덟 자로 줄입니다. 차라리 한 자로 줄이라면 마음 심(心)이라고 하면 됩니다. 여덟 자로 줄이셨는데 기가 막힙니다. 행행본처(行行本處), 가도 가도 본래 그 자리, 지지발처(至至發處), 도착하고 도찯해도 출발한 그 자리입니다. 여러분, ‘법성게(法性偈)’를 염송하면서 탑을 돌다 보면 그 자리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표현하셨을까. 우주 법계를 볼 때 부처님은 안목으로 우주 법계를 볼 때 가도 간 것이 아니고 와도 온 것이 아닙니다. 생겨도 생긴 것이 아니고 떠나도 떠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상(無常), 항상하지 않는다, 매 순간순간 변화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있다, 없다 하는 표현은 없습니다.

 

다만, 제법종연생(諸法從緣生), 이 세상 모든 것, 모든 현상은 인연(因緣) 따라 나타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 ‘나는 이것을 공이라고 이야기한다, 일어났다 사라지는 이런 모든 현상을 공(空이라고 한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역위시가명(亦爲是假名), 공(空) 역시 잠시 이름을 붙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중요합니다. 역시중도의(亦是中道義), ‘이것을 중도(中道)라고 한다.’ 불교의 핵심이 중도(中道)에 있습니다. 

 

현상을 따라가다 보면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범어사에서 강원 생활했는데 50년이 넘게 흘러서 이 자리에 앉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렇게 무상한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젊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공부해야 합니다. 현상을 따라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 마음이 주인공(主人公)입니다.


의상 스님이 지엄 스님께 ‘법성게(法性偈)’를 바친 해가 668년, 45세 때입니다. 그 뒤 신라에 돌아오셔서 이곳 범어사를 비롯하여 전국에 화엄 십찰을 만들어서 ‘화엄경 선양 운동’을 하십니다. 그 덕에 우리가 이 귀한 ‘화엄경’ 법석도 열고 기도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화엄경’은 법계연기를 표현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도 소멸한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여러분 여기 범어사 보제루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건축 자재 중에서 어떤 것이 중심입니까? 보제루를 풀어놓으면 보제루라고 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건축 자재 중에는 대들보, 기둥 등 각각의 명칭이 있겠지요. 그런데 수많은 건축 자재들을 조합해놓으면, 그러니까 인연(因緣이 모이면 보제루라는 건물이 됩니다. 보제루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건축 자재가 다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연 화합으로 모이면 보제루, 인연 화합이 흩어지면 각자 목재의 이름으로 돌아갑니다. 보제루와 수많은 건축 자재는 하나이면서 전체이고 전체이면서 하나입니다. ‘법성게’에 나오는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지혜가 없는 중생은 눈으로만 보고는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를 분별하고 판단합니다. 있다는 것에도 집착하면 안 되고 없다는 것에도 집착하면 안 됩니다. 재산이 많으면 물론 기쁘겠지요. 그런데 또 주식을 잃었다 하면 슬픕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것입니까? 있다 없다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중도(中道)입니다. 중도(中道)를 연기(緣起)라고도 표현할 수도 있고 무아(無我)라고 도 표현할 수도 있고 공(空)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름(옷)만 다르지 중도 연기 무아 공은 같은 뜻입니다. 

 

그렇다면 중도의 세계, 법계연기의 세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우리의 안목이 부처의 안목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중도의 세계를 보려면 나의 입장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 금정산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금정산의 모든 나무가 똑같이 생겼으면 아름답다고 할까요? 굽어지고 부러지고 넘어진 나무도 있는 그 자체가 어우러져서 우리는 아름답다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이것이 중도입니다.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 참선(參禪)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부처님 말씀이나 여러 가지 경의 말씀은 활과 같은 것입니다. 활은 휘어져 있습니다. 굽은 것도 있고 곧은 것도 있고 이렇게도 설명하고 저렇게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사의 말씀은 활의 줄과 같다고 했습니다. 활줄은 곧습니다. 활이 굽어 있으면 당기는 활줄은 곧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간단명료한 것이 선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불교를 정말 잘 선택하셨습니다. 경전 중에는 ‘화엄경’이 최고고, 또 화엄경을 한마음으로 들어가면 선입니다. 그래서 화엄경 사상은 모든 법을 다 통섭해서 한마음을 밝힌다고 한 겁니다. 경상도 말 중에서 세계를 관통한 말이 바로 ‘이뭣고’입니다. 세계를 모두 털어서 가장 멋진 말입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시고 법문도 열심히 들으시는 가운데 본래 나의 면목이 무엇인가, ‘이뭣고’도 하시면서 부처님처럼 대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3월3일 범어사 보제루에서 봉행된 ‘선지식 초청 1000일 화엄법회’에서 백담사 무금선원 유나 영진 스님이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624호 / 2022년 3월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