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7.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 묘행은 머무름이 없음)

장백산-1 2022. 4. 11. 00:10


7.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 묘행은 머무름이 없음)

 
계를 지킨다는 마음에도 머물지 않는 것이 참으로 계 지키는 것

보시를 한만큼 복덕을 기대한다면 또 다시 인과에 떨어져
무주상보시는 공한 단멸이 아니라 무량한 복덕으로 귀결
계를 지키는 것은 선 행하는 것 아니라 선악 분별 않는 것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인도 룸비니 동산.[법보신문DB]


하이고 약보살 부주상보시 기복덕 불가사량(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布施)한다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느니라.

세존께서 수보리에게 육바라밀법(六波羅蜜法)을 행하되, 육바라밀법에 머물지 말고 행하라 하셨다. 보시를 한다는 것에 마음이 머문다면, 보시하는 이와 보시를 받는 이의 두 분별이 생기는 것이므로, 그 즉시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이 나타나게 된다. 또 보시를 할 때 보시물에 마음이 머무는 것을 중생상(衆生相)이라 한다. 또 보시를 하는 것에 대해 복덕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면, 이는 수자상(壽者相)이 된다. 때문에 사상(四相-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마음이 머무른다면 설사 복을 받는다 하더라도 사상에 주착(住着-집착하여 머무름)하는 복이 될 뿐이다.

사상에 머무는 이러한 보시는 범부의 보시에 지나지 않으니 즉, 유위(有爲-한계가 있음)의 보시가 되어 복덕을 받는 것 또한 유위의 복에 떨어지게 된다. 이를 즉, 유위법(有爲法)이라 하는 것인데, 이러한 복은 아무리 큰 복을 짓는다 하더라도 필경에는 새어버리고 말 것이다.

보살의 보시는 허공 같아서 청정한 육근(六根-눈, 귀, 코, 혀, 몸, 생각)을 지니고 있을지니, 육근(六根) 육경(六境)에 머무름이 없고, 육경에 머물지 않음으로 보시를 하는 행위도 청정하여 보시하는 이나, 보시받는 이가 따로 있지 않으니, 허공 같은 보시가 된다. 허공이 우리에게 찰나를 쉬지 않고 공기를 보시하는 것과 같이, 보시하는 상이 없으며 흔적이 없는 것과 같다. 즉, 주는 시자(施者)와 받는 수자(受者)가 따로 없다. 이것이 바로 머무름이 없는 보시이고 다함이 없는 보시이며, 일어남이 없는 보시일지니 보살의 보시인 것이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없는 무주상(無住相)의 복덕도 허공과 같이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이요, 허공과 같이 무너짐이 없는 복덕이 될지니, 이를 무루법(無漏法)이라 한다. 또한 허공과 같이 항상 보시하면서도 보시가 아닌 것이 되니, 이를 함이 없는 법 즉, 무위법(無爲法)이라 한다.

이것이 곧 색(色-대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이며, 소리, 향기, 맛, 촉감, 기억 등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머물지 않는 보시요, 사상을 떠난 보시이고, 육바라밀법에 머물지 않는 보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경에 이르기를, “보살은 마땅히 이러히 보시하여 상에 머물지 말지니라”고 끝을 맺으신 것이니, 이어서 “이 어찌한 연고이냐?”고 물으신 것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광대한 복덕을 밝혀 주시려 하심이다. 보살의 보시는 상을 여읜 보시며, 머무름이 없는 보시이며, 공한 보시이니, 과보도 공할까 염려하는 대중을 위하여 주는 이와 받는 이가 공했으므로 보시와 복덕이 공한 단멸법(斷滅法)으로 알까 염려하심에서다. 즉, “보살은 마음이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 한 것을, “어찌한 연고인줄 아느냐?” 다시 물으신 것은, 만약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할 때, 상에 머물지 않는 인(因-씨앗)을 진정으로 허공같이 심었다고 한다면, 그 받는 복덕 또한 허공같이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복덕이 된다는 것을 알려 주시려 함이다.

수보리 어의운하 동방허공 가사량부 불야세존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不也世尊) 수보리야, 동쪽, 서쪽, 남쪽, 북쪽의 네 간방과 위아래의 허공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상에 머물지 않고 하는 보시의 복덕을 그냥 그 복덕이 불가사량(不可思量) 이라고만 해 두시고는 부정하시었던 것이다. 왜 그럴까? 복덕은 단순히 불가사량이라는 말로도 헤아릴 수 없는 한도 끝도 없는 까닭이다. 듣는 대중이 자기가 아는 정도에서만 불가사량이라고 짐작할 뿐, 불가사량이라고 하는 깊은 뜻을 모를까 봐 염려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수보리를 불러 물으시고, 수보리가 대답하게 하는 형식을 취하시어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의 무량한 복덕을 조금이라도 더 알려 주시려 말씀을 꺼내시되,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저 동방(東方) 허공(虛空)에 방(方), 원(圓), 장(長), 단(短)과 크고 작은 색깔과 모양을 가히 생각하여 나에게 말해 줄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심이다.

수보리는 세존께서 물으신 말씀을 듣고 속마음으로 생각해 보았다. 동방 허공을 헤아려보니 어떠한 것이 동방 인줄부터 몰랐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생각하는 동방은 남쪽에서 보면 북방이요, 북쪽에서 보면 남방이요, 동쪽에서 보면 서방이요, 서쪽에서 보면 동방이 된다. 사실 동방이라는 것도 없고 사방이라는 것도 없고 그저 허공일 뿐이다. 또 위에서 보면 하방(下方)이요, 아래서 보면 상방(上方)이니, 동방부터가 정법(正法)이 없어서 제한될 수 없을 뿐더러, 제한이 된다 하더라도 방(方), 원(圓), 장(長), 단(短)을 무슨 수로 헤아릴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단순하게 부처님께서 물으신 것에 대해 “못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복덕을 생각하는 것은, 복을 지으면 나에게 이익이 크게 되돌아오는 것을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보시를 하면 보시를 한 만큼은 물론, 보시한 것보다 훨씬 큰 이익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생각한다. 만약 이런 보시를 생각한 것이라면, 크나큰 오산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익이 생기는 즉시 그 인과로 말미암아 손해라고 하는 과보가 뒤따르게 됨이니, 결코 이익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손해의 과보를 통해 불편해지고 괴로워지는 마음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보시를 할 때, 마음이 보시에 머물지 않게 되면 인과가 생기지 않는다. 마음이 보시에 머물지 않으면 애초에 그 흔적이 어디에도 없는 것이 되므로, 원인에 의한 결과도 없다. 그러니 이익에 따른 손해라는 인과가 생기지 않게 되니, 결국 그 어디에도 손해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나, 괴로운 마음의 과보가 생기지 않게 된다. 그러함에 흔적 없는 것에 대해 무엇을 측정할 것이며, 어떻게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으니 한량(限量)이 없고, 머무름이 없기 때문에 흔적조차 없어서 시작도 끝도 없으므로, 이것이 진정한 복덕이요, 생각을 할 수 없는 불가사량이라 한 것이다. 한마디로 보시를 한다는 생각이 머무른다면 그 즉시 인과가 생겨 때가 되면 불편한 마음의 한계를 일으키게 되니 괴로운 마음의 과보를 받게 되고 마음이 머물지 않는다면 인과도 없고 과보고 없고 한량도 없고 크고 작은 분별도 없고 잴 수도 없으므로 이를 진정한 복덕이라 하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불가사량이라 한 것이다.

수보리 남서북방 사유상하 허공 가사량부 불야세존(須菩提 南西北方 四維上下 虛空 可思量不 不也世尊). 수보리야, 남쪽, 서쪽, 북쪽과 네 간방과 위아래의 허공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복덕 역부여시 불가사량(須菩提 菩薩 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수보리야, 보살이 모양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느니라.

수보리 보살 단응여소교주(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이렇게 가르친 바대로 머물지니라.

사유(四維)는 동서남북의 간방(間方)을 말하고, 보통 사면팔방(四面八方)이라 하는데 팔방은 사면을 상하로 나눈 것이고 중앙을 더하면 5방이요, 5방을 또 상하로 나누면 시방세계(十方世界)가 된다. 세존께서는 “수보리가 동방 허공 하나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시고, 더 나아가 남서북방과 사유 상하 허공을 물어 보시었으니, 이 대목은 충분히 설명하였으므로 전회의 내용과 중첩되므로 생략한다. 다만, 사유(四維) 간방(間方)이다, 사면팔방(四面八方)이다, 5방 시방세계(十方世界)다 하는 것들은 모두 나를 중심으로 지어낸 망상에 불과한 것이니 나 자신이 허망한 업력으로 생겼다 사라지는 거품과도 같은 것인 바, 나머지 사량하는 것들은 더불어 허망하기 짝이 없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사량이다 비사량이다 하는 것 자체가 허망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왜 허망이냐? 본디 바다는 조용하고 적요한 것임에도, 바람이라는 욕심이 불어서 파도가 일어나는 것과 같음이라. 그 파도를 보고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분별이야말로 허망한 것 중에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바보 같은 짓이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보시에 대해 준다, 안 준다 또한 주는 것조차 마음이 머물러서는 안 된다. 상에 머무름이 없는 보시의 복덕 역시 이와 같이 복이 있다 없다 또는 복덕이 한량이 있다 없다 하는 생각마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준다는 것도, 준다는 것에 머무름이 없다는 것도, 마음이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이 모든 것 자체가 바람을 일으키는 것과 같아서 파도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무주상보시복덕(無住相布施福德) 역시 생각을 일으켜 미쳐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보시가 이럴진댄 지계(持戒) 또한 마찬가지이다. 참으로 계(戒)를 지킨다는 것은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라는 것이 아니고, 선도 악이요 악도 악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생로병사는 세상의 모습이다. 다만 인연 연기에 의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므로, 어차피 살고 죽는 것은 연기의 모습인 것이다. 다만, 마음을 주착하지 말고 머물지 않아야 한다. 선은 악을 낳고 악은 선을 낳으니,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되면 선과 악은 서로를 영원히 낳고 멸하는 것을 반복하게 된다. 그러니 선도 악도 분별하지 않으면 남는 것은 연기에 따라 자연스런 생로병사의 모습일 뿐이니, 의도적인 분별로 계를 어기지만 않고 마음을 머물지만 않으면 된다는 말씀이다.

즉, 지켜야 된다, 안 지키면 안 된다 하는 마음조차 머물지 않는 것이 참으로 계를 지키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라, 죄라는 것은 마음 따라 생기는 것이니, 계라는 것, 죄라는 것 모두 무분별(無分別)하게 되면 계는 저절로 지켜지게 된다는 말이다.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역시 이와 같다. 이와 같이 사량이 완전히 끊어지게 되면 구경의 열반에 이르러 영원한 자유를 얻을 것이니, 이야말로 보살이 주하지 않는 보시가 되고 육바라밀법이 될 것이다.

진우 스님 조계종 교육원장 sansng@hanmail.net

[1627호 / 2022년 4월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