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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곧 진실이다

장백산-1 2023. 11. 3. 14:02

현실이 곧 진실이다


초기불교의 교리를 공부할 때 바라문교 즉 힌두교의 교리와 비교를 하게 됩니다. 특히 요즘에 초기불교
경전의 팔리어 원음 니까야 등이 한역되어 나오고 공부하는 사람들도 늘어나다 보니까, 대승불교나 
선불교의 불성, 본래면목이라는 것이 힌두교의 아트만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분들도 생겼습니다.

힌두교의 특징은 이 세상은 전부다 허망하다라고 말합니다. 불교랑 비슷하죠? 몸도 허망하고 이 세상 현실은
허망하고 꿈과도 같기 때문에 현실은 중요하지 않더고 합니다. 힌두교에서 현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힌두교에서 중요한 거는 따로 있지요.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아트만입니다. 아트만을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이나 
본래면목과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불성이나 본래면목은 힌두교의 아트만과는 전혀 다름니다.

힌두교의 아트만은 내 안에 참된 자아가 있고, 이 아트만만이 참되고 진실된 실재라고 말합니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현실은 가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보면 불교하고도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불교도 이 
현실을 허망한 망상이라고 하고 중요한거는 불성, 본래면목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인 불성 본래면목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입니다. 방편으로 그렇게 얘기한 것일 뿐이고, 
불교는 오히려 힌도교와는 거꾸로입니다. 힌두교는 현실은 가짜고 내 안에 있는 참나인 아트만만 진짜라고 
말을 하고, 불교는 참나는 본래 없다고 해서 무아를 말합니다. 대승불교나 선불교에서 불성, 주인공, 본래면목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같은 명칭은 어디까지나 방편의 이름일 뿐입니다.

육조단경에서도 ‘본래무일물’이라고 하여 본래 한 물건도 없다고 했고, 임제스님도 ‘구할 수 있는 부처도 없고, 
이룰 수 있는 도도 없고, 얻을 수 있는 도도 없다’라고 했으며, 대혜종고는 ‘전해줄 수 있는 법은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백장은 ‘부처는 구함이 없는 사람이니, 구하면 도리에 어긋난다’고 함으로써 불성이나 참나를 
구하려고 해서는 안 됨을 말합니다.

이처럼 언어를 빌어 방편으로 불성 견성이라는 세속제를 설했을 뿐이지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은 금강경을 
비롯한 모든 경전과 선어록에 누누이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것은 힌두교에서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요.  처음에 이러한 불교의 방편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트만을 얘기하는 힌두교의 가르침과 불교를 헷갈려 합니다. 불교에서는 내 안에 불성이든 
뭐든 뭐라고 부를 만한 특별한 실체 같은 것이 있어서 그것을 찾아야만 하고, 그것을 찾지 못하면 중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찾아야 하거나, 구해야 할 것이 본래 없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힌두교에서는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의 현실은 가짜이고 허망한 반면에 내 안에 있는 아트만은 진실한 실체라고 
말하지만, 불교는 내 안에 불성이든 본래면목이든 뭐라고 부를 만한 진실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참된 진실은 
오로지 지금 여기 있는 현실 그 자체라고 말합니다.

제법실상, 즉 삼라만상 그 자체가 그대로 실상이기 때문에, 현재라는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의 모습 그대로가 
명백한 진리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실은 허망한 것이고 진짜는 따로 있다라는 것이 아니라, 현실 
이 자체가 진실이라고 바로 알려주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러니 현실이라는 진실 위에 서 있으라고 입처개진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진실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지금 여기에 진리, 법, 마음이 그대로 100% 드러나 있음을 설합니다. 현실을 버리고 또 다른 진실한 
무언가를 찾거나 얻으려 한다면 그것은 망상이고 외도인 것입니다. 내 안에, 삶 위에 모든 진실은 100% 모두 
드러나 있습니다.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