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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名)과 모양(相)을 빼고 보라.

장백산-1 2024. 1. 10. 15:44

이름(名)과 모양(相)을 빼고 보라.


법성게에 , 무명무상절일체, 즉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서 일체가 다 끊어졌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금강경에는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즉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여래를 보리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것 두 구절이 불교 공부에서는 아주 중요한데요, 어떻게 하는 것이 이름과 모양이 끊어진 것이고, 과연 무엇이 일체 상을 상이 아니게 보는 것일까요?

우리가 대개 마음이라고 알고 있는 대상을 아는 마음인 식, 즉 알음알이, 분별심은 명색을 대상으로 아는 마음입니다. 즉 식의 대상이 이름과 모양(명색)이지요. 사람들이 사물이나 대상을 분별해서 알 때 머릿속에 이름을 부여해서 입력합니다. 컴퓨터도 파일 하나를 저장하려면 이름을 지정해 주어야 하듯, 우리도 머릿속에 무언가 특정한 모양의 사물을 저장할 때도 이름을 부여해서 기억하는 것이지요.

사과를 예를 들어보면 내 뇌에 사과라는 이름과 ‘사과’라는 모양이 동시에 들어옴으로써 기억에 저장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대상이 마찬가지입니다. 눈으로 무언가를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의식으로 대상을 헤아릴 때 언제나 이름과 모양으로 분별해서 아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처음 뭔가를 배울 때 정확히 이런 방식으로 배우잖아요. 사과 모양 그림을 보여주고 ‘사과’라는 이름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사과’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게 되는 모양과 이름을 불교에서는 명색이라고 부르고, 이 명색을 분별해서 인식하는 마음을 ‘식(識)’이라 합니다. 사람들의 알음알이, 분별심, 식(識)은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집니다.

 어린 아이는 처음에는 세상을 이렇게 이름과 모양으로 분별해서 알지 않습니다. 세상을 그저 통으로, 한바탕으로 보는 것이지요. 분별을 모르는 어린 아이들은 아무런 분별이 없습니다. 전부 하나지요. 내편, 네 편도 없고, 크다 작다도 없고, 잘났다 못났다도 없이 그냥 전체를 통채로 하나로 분별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러다가 명색으로 대상을 분별해서 판단하는 방법을 배우면서부터 세상을 둘로 쪼개고 나누어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번뇌망상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지요. 점차 명색으로 대상을 기억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잘나고 못난 사람, 능력 있고 없는 사람, 좋은 직업과 나쁜 직업, 부자와 가난, 성공과 실패 등 다양한 것들을 자기 방식대로 명색을 붙여 분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별에는 실체가 있어서 그렇게 이름을 붙이는 게 아니라, 비실체적인 것을 단지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그렇게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한 것이죠. 그러나 그렇게 분별해서 이름 붙여 해석하다 보면 우리는 그것을 실체라고 착각하고 거기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부터 모든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마음공부는 이렇게 어릴적부터 만들어 온 상을 짓는 작업, 이름과 개념을 부여하는 작업을 다시 빼버리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금강경에서 상을 타파하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부여해 온 상이나 명색이 사실은 허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로 셋으로 쪼개고 분별해서 대상을 차별적으로 인식하던 것을 다시금 그 모든 상을 타파한 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공부인 것입니다. 상과 개념과 이름을 부여해 분별해서 인식하게 되면 좋고 나쁜, 옳고 그른 등의 두 가지로 나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좋은 것에는 집착해서 괴롭고, 나쁜 것은 싫어하면서 거부하기에 괴로운 고통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해석하거나 개념 짓지 않고 이름을 부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 앞의 모든 대상들을 바라봐 보세요. 이름과 모양이 없을 때 ‘나’는 누구입니까?

2015.03.11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