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본래면목을 확인하고, 잘 쓰고 있으면서 본래면목을 모른다고 시치미를 뗄 것인가?
조산본적 스님에게 청세스님이 와서 묻는다. "이 사람 청세는 몹시 외롭고 가난합니다. 조산본적 스승님께서 저를 좀 구제해 주십시오."
그러자 조산본적 스님이 "청세야!"하고 부르니까 예하고 청세가 대답하였다.
조산본적 스님이 말했다. "청원 땅에서 나는 백가네 술을 3잔이나 흠뻑 마셔놓고, 아직 백기네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구나" [무문관]
청세스님은 아직도 깨닫지 못한 자신이 한스러워, 스스로를 외롭고 가난하게 여긴다. 깨닫지 못한 수행자는 외롭고 가난하다. 그래서 조산본적 스님을 찾아가 청세 스님의 본래면목, 자성을 밝혀주기를 요청한다.
그러자 조산본적 스님은 말한다. "청세야!" 그랬더니, 청세스님이 버젖이 대답을 잘 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대답을 했는가?
청세스님은 자기의 본래면목, 자성, 불성을 보지 못해 외롭고 가난하다고 하더니, 자기의 본래면목을 잘 사용해서 대답을 하고 있지 않은가? '청세야!' 하는 소리를 들은 것은 무엇인가? 그 소리를 듣고 곧장 '예' 하고 대답하는 것은 누구인가?
불성, 자성, 본래면목이 이렇듯 활발하게 작용되고 있다. 불성, 자성, 본래면목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말을 들을 수도 없고, 말을 할 수도 없고, 숨을 쉴 수도 없고, 보고 듣고 느낄 수도 없고 무엇을 알 수도 없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나서 곧장 본것 들은 것 느낀 것 안것을 해석하고 분별하는 중생심 때문에, 첫 번째 자리에서 곧장 알아차리는 이 생각 이전 자리, 불성, 자성, 본래면목을 놓치고 있었던 것일 뿐이다.
보고 나서 분별하고, 듣고 나서 그 소리를 분별하고, 느낄 때 그것이 무슨 느낌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중생의 오랜 습관이 되어서, 사람들은 그렇게 분별하는 것이 나의 마음이라고 오해한다. 그렇게 분별하는 마음만을 가지고 쓰고 살아왔지, 분별이 일어나기 이전에 순수하게 보면 보는 줄 알고, 들으면 듣는 줄 아는 그 첫 번째 자리의 알아차림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살아온 것이다.
'청세야!' 하고 부르면, 그 소리를 알아차리고, 곧장 '예' 하는 이 주인공이 활활발발하게 이렇게 살아서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스스로 자성, 본래면목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도 본래면목을 아직 못 찾아 가난하다고 여길 것인가? 그래서 조산은 청세에게 술을 3잔이나 흠뻑 마시고, 입도 안 댄 것 처럼 시치미를 떼는 것이냐고 묻는다.
이미 불성, 자성, 본래면목을 확인하고, 그것을 잘 사용하고 있으면서, 그것과 함께 작용하고 있으면서, 모른다고 시치미를 뗄 것인가?
글쓴이 :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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