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할 수는 있지만 붙잡을 수는 없는 마음 거울
9. 모든 세상 모든 것을 담는 마음 거울
눈앞 모든 것 변하기에 무상, 허망한 영상을 놓을 때 자유
변함없는 건 텅 빈 마음 거울, 마음 거울이란 분별도 놓아버려야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보면서 “이것은 무엇이다, 저것은 무엇이다” 하고 분별하거나, 아니면 과거 이미지를 회상하면서 생각 속에 빠지지 않고, 그냥 조용히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을 응시할 수 있는가? 만약 보는 이의 언어적 해석이나 의견을 첨가하지 않고 그냥 그저 지금 여기 있은 그대로의 모습을 고요히 볼 수만 있다면, 어느 순간 눈앞에 보이는 일체의 영상은 마치 깨끗한 거울 위에 비추어진 하나의 이미지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마음이라는 이 거울은 일반 거울과는 달리 테두리가 없어 모든 세상 모든 것의 모습을 전부 담을 수 있다. 마음 거울 위에 하늘처럼 큰 모습도 나타나고, 먼지처럼 작은 모습도 나타난다. 하지만 마음 거울 위 풍경들은 어떤 고정된 모습 없이 계속해서 변한다. 예를 들어, 고개를 돌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만 머리 방향을 돌려도 방금 전 오른쪽을 향했을 때 보았던 그 전 영상은 이내 사라지고 없다. 길을 걸으면서 보게 되는 영상도 역시 앞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계속해서 그 전 영상은 이내 곧 사라지고 새로운 영상으로 끝임없이 교체되어 나타난다.
즉, 지금 여기 눈 앞에 나타나는 모든 영상은 금방 금방 변하기 때문에 무상(無常)하다. 어느 시간에 보았던 어떤 영상은 너무도 보기가 좋아 우리가 그 영상을 붙잡고 싶고, 그 영상에 머물고 싶다는 욕망이 올라 올 수 있다. 하지만 막상 내가 붙잡으려고 하면 흘러가는 강물을 붙잡을 수 없듯이, 그 영상을 고정시킬 수가 없다. 예를 들어, 하늘의 노을 풍경이 너무 좋아 이 장면을 내가 붙잡고 싶다 해도 계속해서 노을 풍경은 변한다. 친구와 차를 마시는 시간이 너무 좋아 이 장면에 머물고 싶어도 시시각각 변화하는 친구의 얼굴 표정과 차의 맛, 이야기 내용을 고정시킬 수 없다. 유튜브를 보듯이 내가 중간에 원할 때 잠시 멈출 수 있는 버튼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버튼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강물이 흐르듯이 마음 거울 위 영상은 무상하게도 끊임없이 변할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변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 마음 거울 자체가 항상 청정하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가 있다. 왜냐면 10초 전 에 봤던 풍경은 아무런 흔적을 이 마음 거울에 남기지 않고 현재 풍경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아주 깨끗하게 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벚꽃 나무가 많은 공원을 걷다가,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려 핸드폰을 꺼내 보게 되면 벚꽃 모습은 아무런 잔상을 남기지 않고 감쪽같이 사라지고, 대신 핸드폰 모습이 마음 거울 위에 주로 나타나게 된다. 그 어떤 풍경도 영구히 마음 거울 자체의 청정함을 물들이거나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더불어 마음 거울 위에 비친 모든 영상은 놀랍게도 아무런 무게가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마음 거울 위에 나타나는 영상은 계속해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허망한 것이다. 그 지나가는 어떤 영상에다 특별한 의미 부여를 해서 자꾸 생각을 하게 되면 그 영상이 무겁다고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되면 영상은 아무런 무게감이나 흔적 없이 곧 사라진다. 이렇게 계속해서 사라지는 가벼운 영상들의 끝없는 나타남과 사라짐을 보고 있으면 모든 영상은 ‘금강경’에서 말하는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와 같다는 느낌이 든다. 잠시 잠깐 마음 거울 위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지만 이내 곧 사라져 그 영상을 붙잡을 수 없고, 그 영상은 그 어떤 무게감도 없고, 정해진 의미도 없다. 허망한 영상들을 붙잡으려 애쓰지 않으니 일체의 모습으로부터 아주 자유롭다.
오직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계속해서 무상한 이미지들을 끝임없이 드러내고 있는 텅 빈 마음 거울이다. 이 마음 거울 자체는 시간이나 장소에 구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인연에 따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허망한 이미지들이 나타날 수 있도록 그 공간을 제공하고 있는 것뿐이다. 마치 십우도에서 보면 둥근 일원상(一圓相) 안의 영상들은 동자가 소를 찾으러 가기도 하고, 소를 찾아 소 등에 타기도 하고, 나중에는 소를 놓아주기도 하지만 텅 빈 일원상 자체는 변하지 않고 여여한 것과 같다. 중요한 점은 소를 찾는 것이 아니고 일원상 자체를 깨닫는 것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원상이다’ ‘마음 거울이다’ 하는 방편도 결국에는 생각이고 분별이다. 그 분별 생각 마저 다 놓아 버리고 오래된 거울(古鏡)조차도 없는 자리에서 자유롭게 한바탕 춤을 출 수 있어야 한다. 개나리와 벚꽃이 지고 나니 이제는 철쭉과 영산홍이 산을 아름답게 물들인다.
혜민 스님 godamtemple@gmail.com
[1727호 / 2024년 5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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