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정토신앙은 아미타불 중심 종교

장백산-1 2024. 9. 23. 15:39

6. 그 부처님은 아미타
 
 정토신앙은 아미타불 중심 종교

아미타불의  가장 큰 특징은 광명 광명은 중생에게 지혜 · 자비로 작용
자비 원력으로 아미타불 명호 계속 재생  어느 순간 중생이 알아차리게 돼
“그 국토에 계신 부처님의 명호는 ‘아미타’이시며, 지금 여기 현재하여 설법하고 계신다.”

극락정토에 계신 부처님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이십니다. 아미타(amita)는 ‘헤아릴 수 없다’는 ‘무량(無量)’의 뜻입니다. 무엇을 헤아릴 수 없냐하면 ‘수명(壽命)이 무량’하여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āyus, 아미타유스)’이라 하고, 광명이 무량하여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ābhā, 아미타바)’이라 합니다. ‘무량수경’에는 무량광불을 포함하여 12개의 명호가 있고, 범본에는 무려 스물의 명호가 제시됩니다. 무량수불이라는 명호에만 수명에 대한 의미가 있고 나머지는 모두 빛을 포함하고 있어서 아미타불의 가장 큰 특징은 광명(光明)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광명은 중생에게 지혜와 자비로 작용하게 됩니다.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중생의 생각으로는 완전하게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무량수경’의 ‘동방게’에는 이 부처님의 지혜가 얼마나 뛰어난지를 이렇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설령 모든 사람이 다 도를 얻어 지혜가 허공과 같아서 억겁 동안 아미타불의 지혜를 사유하고, 온 힘을 다하여 그것을 극진히 강설하다가 목숨을 다한다고 해도 여전히 모른다.” 이처럼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인지 중생이 숙세에 여러 부처님을 뵈어야만 정토법문을 좋아하며 듣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아미타경’을 읽고 극락에 가고자 발원한다면 오랜 생 동안 부처님과 인연이 있었던 것입니다. 

정토법문에서 참으로 부처님께서 자비롭다고 느끼는 부분은 바로 법장비구가 “저의 이름이 시방국토 국토 끝까지 들리도록 하겠다”고 서원을 세우는 부분입니다. 중생은 스스로 잘나서 정토신앙을 선택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법장비구의 서원 속에서 아미타불은 정토신자든 아니든, 불자이든 아니든, 모든 중생이 자신의 이름을 들을 수 있도록 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중생인 우리가 아미타불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께서 중생을 자신에게로 이끄신 것입니다. 만약 아미타불의 명호를 듣기까지 자신의 어떤 노력이 작용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중생의 아만(我慢)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빛에도 육안(肉眼)으로 인식할 수 있는 가시광선과 그렇지 못한 적외선·자외선이 있음을 알고, 소리에도 가청주파수와 비가청주파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아미타불의 명호 또한 중생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부처님의 자비 원력으로 계속 배경 음악으로 깔려 있다가 어느 때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타력의 신앙인 정토불교에 들어선 불자님은 ‘금강경’에 나오는 ‘무주상(無住相)’의 마음을 다소 실천하고 있으며, 불교가 추구하는 무아(無我)의 도리에 어느 정도는 들어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염불한다” “내가 정토 수행을 한다”라고 하지 않고, 아미타불 덕분에 정토신앙을 만나고, 염불하며, 극락에 왕생한다고 하기에 비교적 ‘나’를 덜 내세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다”고 하면 벌써 정토문(淨土門)이 아니라, 성도문(聖道門)이지요. 그래서 정토신앙은 중생 중심이 아니라 아미타불 중심의 종교입니다. 물론 아미타불 입장에서는 중생만을 위하는 최고의 해탈 방편인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를 김호성 교수님은 최근 출간한 책에서 ‘중생주의’와 ‘불타주의’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염불하는 자신이 바로 중생임을 자각해 인정하고 아미타불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께서 실제로 존재하시는 세상을 만나는 것을 큰 복으로 여깁니다. ‘기신론’에도 부정취의 중생이 신심을 성취하려면 “1만 겁 동안 부처님께 직접 공양을 올려야 한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순간에도 극락에서는 아미타불께서 설법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극락에 왕생하기만 하면 부처님을 직접 뵐 수 있고, 그 법문을 직접 듣게 된다는 것이니, 불자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상상만 해도 설레는 일입니다. 이제 세친의 ‘원생게’  중 한 구절을 되뇌어 봅니다.

“여래의 미묘한 목소리는 청정하게 울려 퍼져 시방에서 들을 수 있도다.”

나무아미타불.

미탄 스님 mitankha@gmail.com

[1745호 / 2024년 9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