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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처(1) - - ‘나’와 ‘세상’은 어떻게 생겨날까?

장백산-1 2024. 11. 15. 14:17

십이처(1) - - ‘나’와 ‘세상’은 어떻게 생겨날까?

 

t사람들은 육근을 통해 외부의 대상을 인식하여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안의 감각기능인 육근을 통해 외부의 대상인 육경을 인식하다 보니, 내 안에 육근이 진짜로 있고, 내 밖에는 육경이 진짜로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내 안에 감각활동을 하는 존재를 ‘나’로 그 감각의 대상을 ‘세계’로 나누어 분별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육근이라는 인연 따라 생겨난 감각기능과 감각활동을 ‘나’라고 여기는 잘못된 착각을 육내입처(六內入處) 혹은 육내처(六內處)라고 하고, 감각기능과 감각활동의 외부 대상을 ‘세계’라고 실체적으로 생각하는 허망한 착각을 육외입처(六外入處) 혹은 육외처(六外處)라고 한다. 육내입처와 육외입처를 합쳐 십이처(十二處)라고 부른다. 육내입처는 안(眼)입처, 이(耳)입처, 비(鼻)입처, 설(舌)입처, 신(身)입처, 의(意)입처이고, 육외입처는 색(色)입처, 성(聲)입처, 향(香)입처, 미(味)입처, 촉(觸)입처, 법(法)입처이다.

 

즉 ‘육근(六根)’은 인연 따라 생겨난 우리 안의 여섯 가지 감각기능과 감각활동을 의미하고, ‘육내입처’는 그 육근을 보고 ‘나’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의식을 뜻한다. 단순히 보는 기능과 활동은 안근이라고 하지만, 보는 자아가 있어서 세상을 보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허망한 의식을 ‘안입처’라고 하는 것이다.

 

남들이 나에게 욕을 할 때 이근에서는 그저 그 소리를 들을 뿐이다. 욕설이라는 소리의 인연이 생겨나면 인연 따라 이근은 그 소리를 듣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리를 듣는 존재를 ‘나’라고 착각하는 순간 상대가 ‘나’를 향해 욕설을 퍼 부었다는 어리석은 착각이 생겨나고, 상대방에게 욕을 얻어먹은 ‘나’, 욕설을 듣고 상처받은 ‘나’라는 자아관념이 만들어진다. 이와 같이 소리를 들음으로써 그 소리를 듣는 ‘나’라는 자아관념이 생겨날 때 이것을 ‘이입처’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봄으로써 ‘보는 나’라는 자아관념이 생겨나고, 들음으로써 ‘듣는 나’가, 냄새 맡음으로써 ‘냄새 맡는 나’, 맛봄으로써 ‘맛보는 나’, 대상과 접촉함으로써 ‘접촉하는 나’, ‘감촉을 느끼는 나’, 생각을 함으로써 ‘생각하는 나’가 있다는 허망한 착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육내입처다.

 

바로 이런 육내입처에서부터 자아관념, 잘못된 허망한 아상(我相)이 생겨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삼법인을 비롯해 끊임없이 무아(無我)를 설하셨는데, 본래의 무아를 중생들이 아(我)라고 착각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승불교의 『금강경』에서 끊임없이 외치고 있는 아상타파도 이러한 육내입처의 가르침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편의상 이러한 허망한 자아관념, 무아를 깨닫지 못한 채 육내입처를 ‘나’라고 착각하는 인식을 아상(我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함으로써 내 안에서 생각하는 어떤 존재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고 허망하게 착각을 함으로써 육입처 중에도 의입처의 잘못된 의식을 지니게 된 것이다. 내 안에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에 그 생각하는 ‘나’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부처님 말씀에 의한다면 육입처는 인연 따라 생긴 것이기에 인연이 멸하면 사라지는 허망한 것일 뿐이다. 육입처의 가르침에 의하면, 데카르트가 있다고 여긴 ‘생각하는 나’는 인연 따라 생겨난 공(空)한 것으로 의입처(意入處)에 불과하다.

 

앞에서 부처님은 중생들의 육근은 청정하지만, 중생들은 육근이 오염되어 있다고 했는데, 바로 육근이 오염되어 있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의식이 바로 육내입처인 것이다. 청정과 오염의 차이는 있지만 육근은 부처든 중생이든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감각기능과 감각활동은 부처이든 중생이든 누구나 죽을 때까지는 할 수밖에 없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육내입처는 중생에게는 있지만, 부처에게는 없다. 육내입처는 감각기관이거나 감각기능이 아니라 감각기능을 보고 ‘나’라고 착각하는 허망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결국 육내입처는 소멸되어야 할 허망한 의식이지만, 육근은 잘 지키고 수호하여 청정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다.

 

 

글쓴이: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