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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 아닌 수행인 무위의 수행

장백산-1 2024. 12. 22. 14:31

수행 아닌 수행인 무위의 수행

 

 

사람들이 대상을 파악하여 그 대상이 무엇인지 알 때는 늘 분별하여 대상을 알아왔다. 이것이 곧 식(識)이다. 그러나 사념처는 전혀 다른 봄을 설하고 있다. 보자마자 과거로부터 만들어 져 온 업식(業識)을 통해 분별해서 무엇인지를 아는 방식이 아닌, 오직 지금 이 순간 눈앞의 대상을 판단 분별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대상을 보는 전혀 새로운 방식이다.

 

이 사념처는 내가 억지로 해야 하는 수행이라기 보다는 저절로 일어나는 것에 가깝다. 유위(有爲)가 아닌 무위(無爲)다. 내가 ‘알아차림’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알아차려짐’이 그저 일어난다. 다만 그동안 우리는 ‘알아차려짐’ 뒤에 내 생각과 분별로 그 알아차려진 대상을 해석 판단함으로써 유위조작해서 대상을 알았다고 착각한 것일 뿐이다.

 

사람들이 새를 볼 때, 당연하게 ‘내가 저 새를 본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것은 눈앞의 현실에 대한 나의 생각, 판단, 분별에 불과하다. ‘내가’, ‘새를’, ‘본다’고 분별하기 이전에, 사실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봄’, ‘알아차려짐’이 먼저 있다. 소리가 나면 어떤 소리인지는 사람에 따라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소리를 따라 분별하는 능력 말고, 분별 이전에 소리가 일어났을 때 그 소리가 일어났음을 알아차리는 이 본연의 능력은 우리 모두에게, 심지어 어린 아기에게도 이미 갖추어진 것이다.

 

바로 이 맨느낌, 분별 이전의 봄, 이 순수한 텅 빈 분별없는 알아차려짐, 그것이 바로 사념처, 위빠사나다. 없던 능력을 수행을 통해 키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본래적으로 이미 있던 것이지만, 분별로 인해 오염되어 있던 것을 다시 돌이키는 것이다. 본래적인 고유한 지혜로 그저 되돌아가는 귀의(歸依)의 여정일 뿐이다.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