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마음은 두 모습이 없으니 감정에 휘둘리지 말아야

장백산-1 2025. 1. 7. 13:51

마음은 두 모습이 없으니 감정에 휘둘리지 말아야     

 본래 마음은 고락의 두 가지 감정 없으니 원융하여 걸림없어

제법이 일체이니, 원인과 결과는 한 치의  오차 없이 계속돼

마음이 본래 공적하나 무명분별이 움직인다는 착각 불러와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법의 성품은 본래 원융(圓融)하여 두 모습이 없다.”
본래 마음(법성)의 모습은 두 가지 감정이 아니거늘, 두 가지 감정의 마음은 고락(苦樂)과 생사(生死)를 만든다. 부처님은 두 가지 감정이 없으므로 고통도 없으나 두 가지 분별심(分別心)을 가진 중생은 늘 괴로움이 따른다.


법(法)은 세상의 모든 모습과 생각, 감정 등의 마음 전체 즉, 일체(一切)를 말하는 것으로서, 본래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부처의 성품이 그렇고, 마음을 깨쳐서 본래의 성품으로 돌아가면, 원융하고 원만하여 방해됨이 없고 걸림이 없으며, 그러므로 괴로움과 고통, 불행, 불만이 없다는 뜻이다. 무이상(無二相)은 두 모습이 없다는 것인데, 두 모습이란 분별(分別)을 뜻하는 것으로서, 엄밀히 해석하면 즐겁고 괴로운 고락(苦樂)의 두 가지 감정을 내지 않으면 일체의 세상을 두 가지로 분별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모든 행위는 고통과 괴로움을 없애고 즐거움과 기쁨을 얻기 위한 것이다. 

가족, 연애, 성공, 명예, 돈, 건강, 장수, 예술, 놀이, 여행, 미식, 권력, 지배, 등에 대해 욕심을 부리는 것은 모두 나의 감정과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한 행위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욕심은 인과(因果)의 과보(果報)가 따르기 마련이니, 즉 고락(苦樂)의 두 마음이 생기게 되는데 고락은 동전의 양면처럼, 계절이 순환하는 것과 같이, 악순환을 거듭하며 생사(生死)와 고락(苦樂)의 윤회(輪廻)를 낳게 된다.

그러므로 본래 원융했던 법성(法性)의 마음으로 돌아가려면 두 가지 마음의 감정이 없어야 하는데, 이는 그리 쉽게 되는 것이 절대 아니므로, 우선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에 대한 믿음을 갖고 부단히 마음을 닦아 감정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 먼저,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감정을 갖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좋은 일, 즐거운 일, 괴로운 일, 기쁜 일 등에 대해, 좋다 나쁘다, 즐겁다 괴롭다, 기쁘다 슬프다 하는 두 가지 마음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은 나의 관점에서 옳다 그르다, 정의와 불의, 좋다 나쁘다, 곱다 밉다, 내 편, 네 편 등의 감정을 내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 보려는 습(習)을 길러야 한다. 이렇게 하여 분별심을 갖지 않게 되면, 자연스럽고 여여(如如)한 마음으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 되어 무심한 상태에서 고민하지 않고 편안하게 말과 행동이 명쾌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업을 없애기는커녕, 업을 더하고 더하여 고통과 괴로운 일이 인과(因果)의 과보로서 자꾸자꾸 생기게 되어 악순환을 거듭하기 때문이다.
 

‘법성게’ 저자이자 ‘해동화엄초조’인 의상 스님 진영. 일본 고산사(高山寺) 소장.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일체의 법은 움직이지 않으니 본래 적멸하다.” 
세상과 마음의 제법(諸法)은 본래 움직임이 없거늘, 업(業)이 없으므로 고락(苦樂)과 생사(生死)도 없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니 부처의 성품이요, 중생은 마음을 움직여 분별(分別)하니 늘 괴로움이 따른다.


제법(諸法)은 일체(一切)를 말하는 것으로, 일체란, 시방삼세(十方三世)를 뜻한다. 시방(十方)은 동서남북 중앙을 상하로 합친 것으로, 모든 공간을 뜻한다. 삼세(三世)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제법이란, 일체의 인과와 인연을 말하는데, 인과는 원인과 결과의 움직임이고, 일체의 법은 원인과 결과가 한 치의 오차 없이 계속되는 것을 말한다. 

이를 12연기(緣起) 법이라고 하는데, 본래 12연기가 생기기 이전의 모습을 적멸이라 하고, 적멸은 고요함 마저 없어졌다는 뜻으로써, 이 경지는 깨치기 전에는 가늠할 수가 없다. 그러나 현상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니, 일체의 법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제법(諸法)이 부동(不動)하다는 의미는 고요함, 즉 정(靜)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흔들림 없는 마음의 본래 모습을 뜻한다. 제 1구의 법성이 원융하기 때문에 본래 고요함마저 고요한 즉, 두 가지 감정의 마음이 생기기 이전의 마음을 말한다. 이를 본래적(本來寂)이라 한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은 본래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처럼 느끼는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 안에는 오대양 육대주가 있고 산과 강, 하늘과 구름, 70억의 인구와 엄청난 생물들이 움직이고 있으나, 지구의 질량은 1그램도 차이가 없다. 또 지구 밖의 태양계 저 끝 우주에서 볼 때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 한 점의 먼지에 불과한 것이다. 설사 지구가 돌고 또 사라진다 해도 전체 우주 자체는 부동(不動)하여 변함이 없는 것처럼, 생로병사(生老病死) 그 자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은 공(空)으로 돌아갈 뿐, 늘거나 줄지 않고 공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니, 결국 움직이지 않는 것이 되는 것이다. 

마음도 이와 같아서 본래는 고요하고 고요하여 전혀 움직임이 없는 부동지(不動智)의 마음을 갖고 있었으나, 어느 순간 무명(無明)에 의한 분별(分別)이 생겨서 12연기가 도는 것처럼 착각하는 순간의 때도 있을 것이나, 결국은 공을 벗어날 수 없고, 본래 부동(不動)인 적멸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하여, 물리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보면 모든 것은 움직이는 것처럼 착각될 뿐이니, 본래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고 적멸한 것이다. 

시시비비(是是非非)하거나, 희로애락(喜怒哀樂)하거나, 생로병사(生老病死)하거나, 정의와 불의도,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도 화로 속에 떨어지는 눈송이처럼 사라지며, 고요하고 고요하여 고요함마저 사라질 뿐이다. 그러니 집착하는 마음만큼 애쓰는 마음만큼,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마음만큼, 사라지고 없어지는 마음만큼, 괴롭고 슬프고 불행한 과보(果報)가 생길 뿐, 결국은 얻는 것도, 가질 것도, 내 것도 없는 것이니,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분별(分別)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아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매 순간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이라는 화두를 잊지 말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습(習)을 길러야 한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760호 / 2025년 1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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