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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윳다 니까야] 오온의 무상함, 오온의 괴로움, 오온의 무아

장백산-1 2025. 3. 10. 11:22

오온의 무상함, 오온의 괴로움, 오온의 무아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왓티의 기원정사에 계셨다. 부처님은 라훌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라훌라여, 물질(色)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無常)합니다”

“무상한 물질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괴로운 것(苦)입니다.”

“무상하고 괴로운 것을 ‘나다’, ‘내 것이다’라고 하는 생각은 옳은가?”(無我)“옳지 않습니다.”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의식(識)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의식(識)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괴로운 것(苦)입니다.”

“무상하고 괴로운 것을 ‘나다’, ‘내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옳은가?”(無我)

“옳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무상한 줄 알기에 거룩한 제자들은 물질에 집착하지 않고 느낌, 생각, 의지, 의식에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욕망에서 벗어나고 해탈을 얻는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게 변하고 괴로운 법을 ‘내 것이다’, ‘나다’, ‘나의 자아다’라고 하는 것은 옳은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느낌은 생각 의지 의식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게 변하고 괴로운 법을 ‘내 것이다’, ‘나다’, ‘나의 자아다’라고 하는 것은 옳은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물질이든... 느낌이든... 생각이든... 의지든... 의식이든... 과거나 미래, 현재 중 어디에 속하든지, 안이거나 밖이거나, 거칠거나 미세하거나, 열등하거나 우월하거나,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그 모든 물질은 이와 같이 ‘내 것이 아니다’, ‘내가 아니다’,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바르게 관찰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보고 잘 배운 훌륭한 제자는 물질과 느낌, 생각과 의지, 의식에 대해서 싫어하여 떠나고,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해탈했다' 는 지혜가 생겨나서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그는 분명히 안다."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다섯 명의 수행승들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에 환희하며 기뻐했다. 그리고 이러한 설법이 행해지는 동안에 다섯 명의 수행승들의 마음은 집착 없이 번뇌에서 해탈했다.

 

✔ 이것은 오온(五蘊)과 삼법인(三法印)에 대한 초기 경전의 정형구로 자주 등장하는 경구다.

 

오온은 가깝게는 ‘나’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이고, 넓게는 일체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이 다섯 가지로 이루어졌음을 뜻하는 가르침으로, 오온은 곧 나요 이 세상 모든 것이다.

 

일체 우주법계, 삼라만상 전부를 가리키는 불교 용어가 일체제법이다. 일체(一切) 는 말 그대로 일체 모든 것이고, 제법(諸法)은 일체 모든 존재를 말한다. 여기에서 법(法)은 존재의 의미다.

 

오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으로, 색(色)은 물질을 수상행식은 정신으로써 느낌(수온), 생각(상온), 의지(행온), 의식(식온)을 말한다. 나도 이 세상도 전부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또 이 우주 삼라만상 일체제법은 곧 무상, 고, 무아라는 세 가지 즉, 삼법인의 특성을 지닌다.

 

나도 세상도 인연 따라 모였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는 무상하게 변하는 존재다. 이 몸도 생노병사(生老病死)를 겪고, 물질은 생주이멸(生住異滅)하며,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한다. 이 육신은 인연 따라 잠깐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소멸되는 허망한 것이다. 무상하게 변해가는 육신을 우리는 ‘나’라고 여기지만, 이 몸은 내가 아니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하지 않고,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아니니, 이 몸에 집착하는 것은 곧 괴로움이다. 이 몸은 언젠가 무상하게 허물어져 가는 것이니 이 몸은 곧 괴로움이다. 무상하고 괴로운 것은 내가 아니다. 무상, 고, 무아, 곧 삼법인이다.

 

정신작용도 마찬가지다. 느낌, 감정이나, 생각과 견해, 욕구와 의지, 분별의식 이 모든 것들은 전부 잠시 인연 따라 모였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는 무상한 것들이다.

 

홀로 있으면 외로움을 느끼고, 욕을 얻어먹으면 괴로운 느낌, 자존감이 떨어지는 느낌을 느낄 뿐이지, 그 느낌이 진짜 ‘나’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런 좋지 않은 느낌을 느낄 때 그것이 인연 따라 잠깐 왔다가 가는 무상한 것인 줄 모르기에, 그 느낌을 ‘나’라고 여기며 ‘내가 괴롭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연생 인연멸이기에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내가 아니다. 무상하게 무너지는 것은 곧 괴로움이다. 느낌에 집착하면 괴로울 수밖에 없다. 아무리 좋은 느낌도 언젠가는 무상하게 사라져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느낌, 수온도 무상하며, 괴롭고, 그러니 그 느낌을 나라고 할 수도 없다.

 

생각도 무상하게 변해가며, 내 생각대로 되지 않고, 변해갈 때 괴롭다. 무상하고 괴로운 것은 내가 아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그 모든 생각은 잠시 내게 왔다가 갈 뿐인 허망한 생각들일 뿐이다.

 

의지나 욕망도 변한다. 이것을 원하지만 곧 다른 것을 원한다. 한 가지를 원하지만 원한다고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변하고, 변하는 것은 괴로우며, 곧 내가 아니다. 내가 무언가를 원한다고 여기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그 때는 그것을 원하게 된 것일 뿐이다. 그것을 원하는 마음이 내 마음의 영원한 실체는 아니다. 이것을 원했다가 인연이 바뀌면 곧 다른 것을 원하게 될 뿐이다.

 

의식은 곧 분별을 하는 마음이다. 분별망상, 알음알이, 분별심이라고 한다. 분별심 또한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이렇게 의식하다가 저런 의식으로 바뀐다. 300만원의 월급이 많은 것이라고 여기다가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박봉이라고 여긴다. 같은 조건을 두고 분별심, 의식은 늘 변해간다.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며, 그런 분별심을 가지고 ‘나다’, ‘내 마음이다’, ‘나의 자아다’라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처럼 바르게 오온의 무상, 고, 무아에 대해 바르게 깨달은 제자는 물질에도, 느낌이나 생각, 의지, 의식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그것을 나라고 여기지 않아 집착을 떠나면 사로잡힌 것으로부터 해탈한다. 청정한 삶은 이루어지고, 더 이상 윤회의 괴로움은 없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