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긴한 비결
이 마음은 곧 마음이 없는 마음(無心之心)이다. 일체의 모습(相)을 떠나면 중생과 부처는 차별이 전혀 없다. 다만 능히 무심(無心/마음이 없음)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곧 궁극의 깨달음이다. 도를 배우는 이가 만약 곧장 무심하지 못하다면 오랜 겁(劫) 동안 수행한다고 할지라도 마침내 깨달을 수는 없다. 삼승(三乘)의 공덕과 수행에 사로잡히면 해탈하지 못한다.
본래부처에게는 진실로 한 물건도 없다. 본래부처는 그저 허공처럼 텅 비어 통하고 고요하며, 밝고 미묘하며 안락할 뿐이다. 스스로 깊이 깨달아 들어간다면 곧장 바로 이것이다. 본래부처는 원만하게 구족되어 있어 하나도 부족함이 없다.
팔만 사천 법문은 팔만 사천의 번뇌에 대응하여 설한 것으로 다만 중생을 가르쳐 교화하여 부처로 이끌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본래 어떤 법도 없다. 벗어나는 것이 법이요, 벗어날 줄 아는 자가 부처이니, 다만 모든 번뇌에서 벗어날 뿐, 다시 얻을 법은 없다.
도를 배우는 자여, 만약 요긴한 비결(要訣)을 알고자 한다면, 다만 마음 위에 한 물건도 붙이지 말라.
범부는 경계를 취하고, 도인은 마음을 취하지만, 마음과 경계를 모두 잊어야 참된 법이다.
도를 배우는 자는 즉시 마음 없이 묵연히 계합할 뿐, 마음을 일으키려 하면 곧장 어긋난다.
만법이 오직 마음일 뿐이지만, 마음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
결코 털끝만큼이라도 마음을 향하여 나아가려고 하지 말라. 만약 부처님이 마중하는 등의 여러 가지 좋은 모습을 보더라도 그것을 따라가려는 마음이 없어야 하고, 여러 가지 나쁜 모습이 나타나더라도 역시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다만 스스로 마음을 잊으면 법계와 같아져서 자재함을 얻게 된다. 이것이 요점이다.
본래 마음에 계합할 뿐, 법을 구할 필요가 없다. 마음이 곧 법이니.
✔ 본래면목, 불성, 자성, 마음, 법은 그렇게 이름 붙여진 무언가를 대상으로 찾아 볼 수 없다. 그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그 마음은 곧 마음 없는 마음이다.
불성을 어떤 대상이라고 여겨 찾아 나서려고 한다면 평생토록 찾아 헤매더라도 결코 찾을 수 없다.
본래부처에게는 진실로 한 물건도 없다. 그저 텅 비고 고요하며 안락할 뿐이어서 전혀 부족함이 없다.
다만 일체의 모습, 상(相), 분별상(分別相)을 떠나면 중생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중생이다. 『금강경』에서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했듯이, 일체의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본다.
상을 떠나 무심(無心)할 수만 있다면, 분별없이 무심할 수 있다면 곧 궁극의 깨달음이다. 무심한 마음으로, 내가 없는 마음으로 법문을 들을 때 비로소 문득 본성을 체험할 수 있다.
온갖 방편의 수행과 공덕에 사로잡히면 해탈하지 못한다. 손가락에 사로잡히면 달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중생들에게 팔만 사천 가지의 번뇌와 분별이 있으면 법문도 팔만 사천 가지가 생겨난다. 사람들은 불법은 너무 어렵고, 경전도 양이 너무 많다고 하지만, 바로 그렇게 많은 이유가 중생의 분별이 많기 때문이다. 그 모든 분별과 번뇌에 대해 각각 부처님께서는 대기설법(對機說法)으로 그 사람이 처한 분별고뇌에 맞는 처방전의 법문을 설하신다. 그것이 바로 방편 법문이다.
이를 응병여약(應病與藥)이라고 하여, 병에 맞추어 의사가 처방전을 달리하는 것과 같이 부처님도 중생의 번뇌망상에 맞추어 방편법이라는 약을 처방하신다.
그러니 모든 법은 다만 중생의 번뇌망상이라는 병을 치유하기 위한 임시적인 방편의 약일뿐이다. 본래는 어떤 법도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열반이나 해탈이라는 별도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극락정토나 천당, 유토피아나 신의 세계가 따로 있어서 그곳에 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다 구족되어 있다. 다만 중생이 번뇌에 휩싸여 그같은 사실을 보지 못할 뿐이다. 그렇기에 부처님은 다만 중생의 번뇌망상을 깨뜨려주는 것일 뿐이다. 중생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분별과 그 분별로 인한 취사간택심, 그리고 그 취사심으로 인해 파생되는 온갖 괴로움들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다양한 방편으로 중생들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것 뿐이다.
이것이 바로 사성제(四聖諦)다. 이렇듯 중생이 괴로워하니(苦聖諦) 그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어(集聖諦)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고, 괴로움이 제거된 뒤의 해탈의 길을 보여주며(滅聖諦), 괴로움을 제거하는 길(道聖諦)을 안내해 주는 것이 바로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다.
이것이 전부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사성제에 전부 포섭된다. 괴로움을 해결해 주는 것이 불법이다. 괴로움이 사라지면 본래 있었던 원만구족하고 밝은 진리가 드러난다. 그 번뇌망상과 괴로움으로 인해 중생의 삶만을 허망하게 보고 살아오다가 번뇌망상과 괴로움이 타파되자 본래부터 있었던 부처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처럼 다만 모든 번뇌에서 벗어날 뿐, 다시 얻을 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는 얻어야 할 법이 없다. 다만 없애야 할 번뇌망상과 분별심이 있을 뿐.
그러니 이 법을 깨달을 요긴한 비결을 알고자 한다면, 다만 마음 위에 한 물건도 붙이지 말라. 열반이니, 해탈이니, 자성이니, 불성이니 하는 그 어떤 것도 붙이지 말라. 그것은 중생의 번뇌에 상대하여 사용한 임시방편의 용어였을 뿐, 그런 어떤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범부중생은 대상 경계를 취하며, 경계에 집착하느라 법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도인은 경계를 취하는 대신 마음, 법, 진리, 불성을 취한다.
처음 견성한 뒤에는 중생의 경계가 따로 있고, 이 부처의 경계가 따로 있는 듯이 느껴지기에, 세간은 싫고 이 출세간은 좋아서 자꾸만 세간을 버리고 출세간만을 취하려고 한다.
그러나 꾸준히 공부하여 보임을 이어가다 보면, 몰록 다시 한 번 불이법을 체험하게 됨으로써 결국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세간이 곧 출세간임에 확고하게 자리 잡으니, 이제는 더 이상 세간적인 문제 상황에서 도망치려고 하지 않는다. 부처도 잊고, 중생도 잊는다. 마음도 잊고 경계도 모두 잊어, 비로소 참된 법이 드러난다.
이처럼 만법이 오직 마음일 뿐이지만, 마음이라고 할 것이 따로 없으니, 다시 구할 것이 무엇인가? 마음 없음에 묵연히 계합할 뿐.
털끝만큼이라도 부처를 향해 나아가려고 하지 말라. 부처를 구하려 하거나, 찾고자 하지 말라.
만약 이 공부 중에 부처님께서 자신을 찾아와 마중하는 등 여러 가지 신기하고 신통한 일이 생기더라도 그 모든 것은 헛것이니 따라가려 하거나 집착해서는 안 된다. 여러 가지 나쁜 모습이나 두렵게 만드는 일들이 생겨나더라도 마찬가지로 두려워할 것은 없다.
그 모든 것이 내가 만드는 환영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오직 나 하나 밖에 없다. 마음 하나, 자성 하나 밖에 없는데 나를 괴롭힐 수 있는 자가 따로 있겠는가?
본래 우리에게 이미 구족되어 있던 그 마음에 계합하면 될 뿐, 다시 법을 구할 필요는 없다. 괴로움이 소멸된 자리가 곧 법이지, 따로 법은 없다.
글쓴이 :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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