뗏목에 대한 비유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났는데 도중에 큰 강을 만났다고 하자. 강의 이 쪽은 두렵고 위험한데 강 건너 쪽은 안전하다. 그런데 강 건너 저 쪽으로 건네 줄 배가 없다면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강 건너 쪽은 안전하니 강을 건너긴 해야겠는데 배가 없으니 갈대와 나뭇가지 등을 모아 뗏목을 만들자. 그 뗏목에 의지해 강 건너 쪽으로 안전하게 건너가야겠다.
그래서 뗏목을 이용해 그는 결국 강을 건널 것이다. 강 건너 저 언덕에 도착해 그는 생각한다.
‘이 뗏목은 내게 큰 도움을 주었다. 나는 이 뗏목에 의지해 이쪽 언덕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러니 이제 이 뗏목을 짊어지고라도 가지고 가야 하지 않을까?’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뗏목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옳은 태도인가?”
“아닙니다. 부처님”
“그러면 뗏목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강을 건너 저 언덕에 도착한 그 사람이 생각하기를 ‘이 뗏목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지만, 이제 무사히 강을 건넜으니 뗏목은 놔두고 내 갈 길을 가야겠다.’라는 것이야말로 뗏목에 대한 바른 태도이다.
나의 가르침도 이와 같다. 나는 그대들에게 소유하라고 가르침을 준 것이 아니라, 뗏목처럼 강을 건너게 할 목적으로 소유에 관한 가르침을 설한 것이다. 이와 같음을 안다면 좋은 것에 대한 집착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나쁜 것에 대한 집착을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뗏목과 같은 것일 뿐이다. 가르침의 목적은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가기 위한 방편일 뿐, 뗏목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가르침 자체에 집착하여, 가르침을 절대시해서는 안 된다. 모든 불법의 가르침은 방편일 뿐이고, 방편이란 가짜란 의미다. 우리에게 목적은 ‘깨달음의 저 언덕에 이르는 것’일 뿐, 뗏목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가르침은 이와 같아, 언젠가는 버려야 할 것일 뿐이다. 붙잡고 안주하고 거기에 의지할 그 어떤 것도 없다. 그 때, 그 근기와, 그 시절에 필요한 가르침이라면 그 때 사용하고 수행하고 써야 하겠지만 사용한 뒤에는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뗏목, 새로운 방편을 얻을 수도 있고, 나아가 방편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안온한 저 언덕에 완전히 도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불교 경전의 말씀은 전부 다 방편이다. 그 말 속에 어떤 실체적인 진리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말이나 언어라는 것은 진실을 있는 그대로 담을 수 없다.
불교의 수행법 또한 전부 다 방편이다. 경전도 수행도 그 모든 것은 언젠가는 다 버리고 떠나야 할 것들이다. 그러니 어떤 경전에도, 어떤 수행에도 절대화하거나, 집착하지는 말라. 집착하게 되면, 거기에 머물러 의지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거기에 발목이 잡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된다.
많은 불자들이나 스님들이 방편이 진짜인 것으로 오해하여, 특정 수준의 방편에 사로잡혀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종종 보곤 한다. 방편을 내려놓을 때, 그리고 진리에 마음을 열고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한 발 내딛을 수 있다.
글쓴이 :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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