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면목 43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안 해도 안 되기에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안 해도 안 되기에 이 하나의 법은 사람들이 찾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결코 찾아지지 않는다. 이 하나의 법을 보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더 멀어질 뿐이다. 그러나 이 하나의 법은 찾고자 하지 않는다고 해서 찾아지는 것도 아니다. 이 하나의 법은 찾아도 안 찾나지고, 그렇다고 찾지 않아도 안 되니,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어, 발 딛을 곳 없이 꽉 막힐 뿐이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안 해도 안 되기에, 의식이 어찌 할 바를 몰라, 의식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고, 오로지 의식으로서는 모를 뿐인 공부가 무위의 공부, 불성, 자성, 주인공, 일심, 한마음, 본래면목 등의 공부다. 이 하나의 법은 보려고 하면 볼 수 없지만, 보려고 하지 않..

아는 이것 아는 그것이 참사람이요, 시크릿입니다

선(禪)의 진정한 시크릿(비밀) 언젠가 서구에서 인과응보의 법칙을 끌어당김의 법칙, 유인력의 법칙이라고 이름을 붙여 이것이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영적 전통의 '시크릿'이라고 광고하여 상업적으로 큰 재미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시크릿(비밀)은 임제어록에 있습니다. 선어록의 왕이라고 불리우는 임제어록에서 말하는 시크릿(비밀)이 무엇인지를 한 번 보죠. " 그대들이 만약 태어남과 죽음, 가고 머뭄을 벗어나, 자유롭기를 바란다면, 지금 여기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그 사람을 알도록 하라. 이 사람은 형체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뿌리도 없고, 바탕도 없으며, 머무는 곳도 없다. 활발발하게 살아 움직이고, 수만 가지 상황에 맞추어 세상에 펼쳐진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작용을 해도 정해진 곳은 없다. 그러므로 이것..

법문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모를 뿐'임이 분명해 집니다

법문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모를 뿐'임이 분명해 집니다  제가 설법을 할 때나 글에서나 '모를뿐'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음 공부는 머리로 법문을 듣고 이해하는 공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가장 중요합니다. 따라서 법문을 듣고 그 내용을 머리로 이해하고, 정리하고, 체계화하며, 내가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불교 경전을 대입해 보아서 딱딱 들어맞을 때 느끼는 쾌감 같은 것을 마음 공부라고 여기면 안 됩니다.  허공에 도장을 찍듯, 마음 공부는 하되 한 바가 없어야 하고, 공부를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붙잡아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좋은 법문일지라도 그것을 내 것으로 붙잡아 틀을 정해 놓고, 거기에 대입시켜 볼 어떤 기준점을 만들어 놓으면 안 됩니다. 방편으로 다양한 설법을 해..

다만 모른겠다는 그 마음이 곧 '이것'이다

다만 모른겠다는 그 마음이 곧 '이것'이다 분주무업 선사가 마조를 찾아왔다. 마조는 무업의 풍채가 좋고 목소리가 우렁찬 것을 보고 말했다. '몸은 으리으리한 불당인데, 그 속엔 부처가 없구나.' 무업이 마조에게 다시 물었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학문으로써 대강 살펴보았습니다만, 선에서 말하는 이 마음이 곧 부처란 말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조가 대답했다. '다만 알지 못하는 그 마음이 곧 이것이다. 다시 다른 물건은 없다.' [마조어록] 중에서 불교는 자성, 불성, 본래면목, 열반, 해탈, 주인공, 참 나, 본지풍광 등 다양한 방편의 용어를 써서 법을 드러내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방편상의 용어 속에는 '이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저 그냥 '이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것..

마음, 본래면목, 자성

마음, 본래면목, 자성 예수님의 말씀이 잘 녹아들어 살아있는 도마복음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주리라. 눈으로는 결코 보지 못하는 것, 귀로는  결코 들어보지 못하는 것, 코로는 결코 냄새 맡아보지 못하는 것, 혀로는 결코 맛을 보지 못하는 것, 손으로는 결코 만져보지 못하는 것, 생각으로는 결코 떠올리지 못하는 것을" 인류 역사상 많은 성인들은 바로 '이것'을 사람들에게 가리켜 보여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가 직지인심으로 가리켜 보이는 이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코로 냄새 맡을 수 없고, 혀로 맛을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을 황벽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은 생겨난 적도 없고 사라진 적도 없으..

지금 있는 그 자리가 다 진실하니(立處皆眞) 있는 그 자리에서 주인공이다(隨處作主)

지금 있는 그 자리가 다 진실하니(立處皆眞) 있는 그 자리에서 주인공이다(隨處作主) 어디를 가나 있는 곳마다 주인공이니(수처작주), 지금 있는 자리가 그대로 진실하다.(입처개진)... 만약 그대들이 태어나고 죽고, 가고 머무는 분별심, 생각에서 벗어나 자유롭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 법문을 듣는 그 놈을 알도록 하라. 그 놈은 모양도 없고, 뿌리도 없으며, 머무는 곳도 없이 활발발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임제록] 임제록에 나오는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있는 그 자리가 가장 진실하니(입처개진), 있는 그 곳에서 주인공이다 (수처작주) 라는 뜻입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일 뿐, 다른 때 다른 곳은 없습니다. 진실하다는 말도 하나의 방편일 뿐, 그저 지금 여기 눈앞의 ..

승의제와 세속제

승의제와 세속제 석가모니부처 입멸 후 500여 년 경에 나가르주나라는 제2의 석가모니로 칭송된 나가루주나보살이 진리는 말로 설명될 수 없음을 세속제와 승의제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진리라고 말하며, 절에서 말로 가르칠 수 있는 진리는 세속제, 즉 방편의 진리 밖에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즉 진리는 말로 설명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말은 의미가 담긴 언어이고, 사람들은 특정한 말에 자기만의 특정한 의미를 개입시킨다. 보편적인 의미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만의 특정한 의미와 개념이 담길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말로 설명하게 되면 그 설명은 어디까지나 진리 그 자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인식한 바의 상대진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를들어 불성, 법성, 참나, 마음, 법,..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것만을 원할 때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엔 아무 문제가 없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것만을 원할 때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엔 아무 문제가 없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내가 원하는 전부입니다. 지금 여기 있는 것 말고 혹시 당신은 다른 곳에, 혹은 남들에게, 혹은 미래에 있을 무언가를 원하고 있나요? 그렇게 원하는 그 순간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없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원하는 그 생각을 믿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 그것만을 원할 때, 지금 여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당신은 비로소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라는 본원의 자리에 도착해 있습니다. 그 무엇도 바라지 않고 추구하지 않게 됩니다. 추구하더라도 추구하는데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미래에 무언가를 하는 것을 꿈꾸는 것은 좋습니다. 그것을 ..

너무 평범하고 당연해서 물같고 공기같은 '이것'

너무 평범하고 당연해서 물같고 공기같은 '이것' 공기는 너무 흔하고 당연해서 공기를 코로 들이마시고 내쉬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없고, 숨쉬는 것을 지속하기 위해 특별히 애쓸 필요도 없다. 물은 맛이 너무 맹맹하고 심심해서, 탄산음료나 커피 같은 마실 것들에 비해 별로 감흥을 주지 못한다. 이와같이 물이나 공기처럼, 존재에게 가장 핵심적인 것들은 심심하고, 있는 듯 없는 듯 하여 아무 것도 아닌 것 처럼 느껴진다. 깨달음, 자성, 불성, 진리라는 방편으로 회자되는 물같고 공기같은 '이것'도 비슷하다. '이것'은 너무 당연하고 특별할 것이 전혀 없어서, 아이러니하게도 더없이 특별하기도 하다. '이것'은 공기처럼 물처럼 늘 항상 곁에 있지만, '이것'은 생겨나거나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나아지거나 ..

첫 번째 자리에서 분별하지 않고 보기

첫 번째 자리에서 분별하지 않고 보기 대승불교에서는 방편인 언어로 표현된 진리를 세속제라고 부르고, 제일의제 또는 승의제로 부르는 '진짜 진리'와는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일단 진짜 진리가 방편인 언어로 표현되고 나면 한 번 왜곡되고, 언어라는 상으로 그려지고, 있는 그대로를 언어로 짜맞추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과'라는 언어는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사과라는 진짜 사과를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저 '사과'라고 이름을 붙였을 뿐이지, '사과'라는 이름 속에는 사과는 없습니다. 그 이름이 사과라면 사과를 먹고 싶을 때, 그 이름만 들어도 사과를 먹은 것과 같을까요? 당연히 아니죠. 사과라는 이름, 언어에는 사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깨달음을 설명하는 여러가지 언어에는 '진짜 깨달음'이 없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