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길
(서프라이즈 / 개곰 / 2008-12-21)
노동당 부총재를 지낸 영국의 원로 정치인 로이 해터슬리는 어릴 때 일요일마다 사회주의 주일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사회주의 주일학교는 기존의 교회 주일학교가 중산층과 기득권자를 옹호하는 보수적 논리를 노동자 아이들에게 심어주는 데 문제 의식을 느낀 사람들이 세운 대안 주일학교였다. 앞에 사회주의라는 말이 들어갔고 교회가 아니라 허름한 강당 같은 곳을 빌려서 쓰기는 했지만 사회주의 주일학교는 교회 주일학교보다 더 종교적이었다.
찬송가도 불렀고 성서도 가르쳤다. 사회주의 주일학교를 이끄는 사람들 중에는 개혁 성향의 감리교 신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타성에 젖은 일반 교회의 주일학교보다 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사랑과 정의를 훨씬 진지하게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사회주의 주일학교는 모세의 십계명과 비슷한 사회주의자 십계명이 교훈이었다. 학교 친구는 장차 일터의 동지가 될 사람이니 사랑하라, 배움은 마음의 양식이니 배움을 사랑하라, 선하고 유익한 행동으로 하루를 거룩하게 하라, 예의를 갖추되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말라, 복수는 하지 말되 억압에 맞서고 권리를 내세우라, 약자의 벗이 되고 정의를 사랑하라, 세상의 좋은 것은 노동으로 만들어지며 불로소득은 일하는 사람의 재산을 빼앗는 것이다, 이성에 어긋나는 것은 믿지 말라, 자기 나라를 사랑한다고 해서 다른 나라를 미워해야 한단 법은 없다, 모두가 자유로운 시민으로 살아가는 날을 꿈꾸어라, 이런 내용으로 노래까지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정의감을 심어주었다.
로이 해터슬리에 따르면 영국의 노동 운동과 사회 진보를 주도한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이런 양식 있는 기독교인이었다. 18세기에 특권층만을 비호하는 기존 기독교 교단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감리교 운동의 주창자 존 웨슬리는 교도소 개혁과 노예 폐지를 부르짖었다. 웨슬리는 국가의 역할이 커지는 데는 반대한 보수주의자였지만, 평생을 근검 절약과 청빈을 부르짖었고 또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최대한 벌고 최대한 아끼고 최대한 베푼다"는 것이 그의 좌우명이었다.
영국의 기독교 신자는 부자일수록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사회에 기부하는 경향이 강하다. 기독교인으로서 빈부 격차가 심화되는 것을 염려하여 죽기 전에 사회로 환원하려는 사람이 많다. 자식에게 원망을 들으면서까지 그렇게 한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은 가난이 대물림되는 것을 염려하여 얼마 안 되는 재산이라도 자식에게 주려는 성향이 오히려 강하다.
영국의 기독교인이 참다운 신자답게 인생을 아름답게 마감할 줄 아는 것은 그가 평소에 다녔던 교회에서 참다운 기독교인의 길을 들려주는 목회자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한국 대형 교회의 목사는 십일조 타령, 헌금 타령 하면서 설교 내용에 돈 이야기를 빠뜨릴 때가 드물지만 영국 교회의 목사는 자기 교회에 다니는 신자가 헌금을 얼마나 하는지도 모른다. 헌금 봉투에 이름을 적지 않고 번호만 적게 되어 있으며 회계 관리를 따로 하기 때문에 목사는 돈 문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신자들의 헌금은 최소한의 교회 운영비만 빼고는 전액을 중앙 교단으로 올려보낸다.
대신에 교단에서는 목사가 어디서 목회 활동을 하더라도 나이가 들더라도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배려해준다. 신자가 몇 명밖에 안 되는 벽촌이라도 신자가 몇천 명이나 되는 도회지라도 목사의 월급은 동일하다. 한국처럼 신자 수로 자기 수입이 좌우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목사 월급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니다. 평균 2만5천파운드니까, 원화로는 한 달에 약 200만원꼴이다. 결코 넉넉한 돈은 아니다. 그리고 나이를 먹는다고 월급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나이를 먹을수록 연봉이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자녀들이 다 크면 아동수당이 안 나오기 때문이다. 영국 목사는 철저한 명예직이다. 감투를 써도 국물은커녕 고생만 하기 때문에 서로 감투를 미루려고 든다.
돈이 많으면서 자식한테 재산을 안 물려주고 자기가 살았던 공동체에 기부하는 영국의 기독교인, 자기 교회의 헌금에 일체 손을 댈 수 없는 영국의 목사를 보면 영국 교회는 자본주의의 논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공동체와 평등의 정신을 실천에 옮긴다는 점에서 오히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가깝다. 로이 해터슬리는 사회주의야말로 최상의 종교라는 말도 했다. 문제는 인간이 지금까지 도달한 수준으로는 신이라는 초월자에 기대지 않고 저렇게 이타적인 행동이 전체주의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재생산될 수 있는 구조를 아직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종교야말로 최고의 사회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역설적으로 들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의 교회는 철저한 자본주의, 그것도 천민 자본주의를 추구한다. 신자 수가 많으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하면 죽는다. 가장 숭고하고 고귀해야 할 종교의 세계에서 승자독식, 정글의 법칙이 관철된다.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면서도 가정의 소중함을 역설하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철새처럼 국경을 넘나들면서 번지르르한 소리만 골라서 하는 엘리트 좌파 진보주의자를 통렬하게 비판하여 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모두 욕을 얻어먹은 크리스토퍼 래시라는 미국의 사회학자는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교를 가진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래시는 오히려 반대라고 말했다. 내가 정말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에 옮기면서 기독교인답게 살아가고 있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불안감이 엄습한다는 것이었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마음이 편하기는커녕 항상 불안하다는 것이다.
아마 상당수의 한국 목사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돈 걱정일 것이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한국 교회에서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으려면 신자를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교회는 이미 종교가 아니라 천민 자본주의 논리에 가장 충실한 기업체일 뿐이다. 한국 목사들은 친일 뉴라이트 패거리와 어울려 다니면서 북한에 삐라나 날려보낼 때가 아니다. 한국 교회를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체가 아니라 예수의 길을 따르는 진정한 신앙 공동체로 먼저 바로세우고 나서 북한의 인권을 거론하든가 말든가 해라. 믿음을 돈으로 오염시키는 구조를 방치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앞장서서 더럽히면서 무슨 염치로 북한의 인권을 논하는가. 금권에 유린당하는 한국 기독교 신자와 목회자의 인권부터 지켜주고 나서 북한 인권을 떠들기 바란다. 주제 파악이 안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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